회광반조 8장 보러가기


"엄마. 나 기운이 없어. 오늘 학교 못 가겠어."

"무슨 소리야. 고2가 학교를 안 간다니? 너 정신 나갔어!"

"아니 진짜..."

"일어나. 엄마가 학교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1986년 가을. 연희는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 저번 달부터 자꾸 아프다고 학교 빼먹은 것이 여러 번이었다. 명자는 수험생이라 체력이 부족해서겠거니 하고 자꾸만 한약만 먹인다.


"안 먹을래."

"너 요즘 통 기운을 못 차려서 내가 경동시장 가서 지어온 거야. 이거 얼마나 비싼지 알아? 없는 형편에 엄마가 비상금 깨서 해주는 거야. 좀 마셔 봐. 너 공부하느라 체력이 없어서 그러는 거니까 이거 먹어야 돼. 써서 그러는 거야? 그러면 잠깐만 있어 봐. 꿀 좀 타줄게."


연희는 마지못해 한 그릇 들이킨다.


"여보. 아무래도 영 이상한데. 병원에 한 번 다녀와 보지 그래."

"저 맘 때면 다 저래. 수험생인데 기운이 펄펄 나는 게 더 이상하지."

"그래도 너무 기운을 못 차리잖아."


"우웩!"

"아니, 이게 얼마나 비싼데 이걸 다 토하고 있냐."

"내가 못 먹겠다고 했잖아..."

"일단 일어나서 준비하고 학교 가. 쓰러지더라도 공부는 해야 돼."


휙, 콰당ー


"어머, 야. 연희야. 이거 왜 이래. 연희야!"






"엄마..."

"어, 깼냐? 엄마랑 병원 갔다오자."






"좀 어떤가요?"

"아무래도 이제 증세가 백혈병인 것 같은데..."

"백혈병요?"

"아무래도 가망이 없습니다."

"무슨 가망이 없어요?"

"아무래도 오래는 못 살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아무래도! 뭐가 자꾸 아무래도여. 정확하게 말을 해 봐요!"

"백혈병이라구요. 백혈병은 오래 못 살아요."

"아니, 의사 선생님. 말을 그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거예요? 뭐 조금 보고 오래 못 살 것 같대? 좀 자세히 봐요!"

"자세히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전형적인 급성 백혈병이니까요!"


내 인생의 모든 풍파는 다 지나갔다고 여겼건만, 신도 참 야속하다. 딸에게 백혈병을 주시다니.


신당역 네거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철모머리의 여인.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이상하다 여길 뿐이다.






의사는 무책임하게 시한부 선고를 내렸지만, 명자는 엄마로써 최선을 다 했다.


"지네 말려서 가루낸 것이 좋다던데."

"사슴고기를 한 번 맥여 봐."


동네 사람들은 야매 치료법을 내놨다. 야매긴 해도, 나름 자기 일처럼 여기고 걱정해 주었다.


"나더러 무슨 지네를 먹으래!"

"먹어야 돼! 그래야 살어!"

"싫어!"


지네가루라는 기괴한 음식을 두고 거부감이 드는 건 당연한 일. 연희는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연희가 달려나가는 걸 보고 동네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거 영훈 엄마! 연희 붙잡어! 빨리!"

"연희야! 가만히 있어! 아니, 환자라는 애 힘이 왜 이렇게 세! 누가 여기 연희 좀 붙잡아요!"

"아악!"


동네 한복판에서 동네 사람들이 둘러싸고 마치 돼지 잡듯 연희를 잡는다.


"다리 잡어! 다리! 어, 옳지!"

"연희야! 입 벌려! 입!"

"으으음, 으음!"


흡사 사극 단골 장면인 장희빈 사약씬.


"아앍! 그앍! 갉!"


동네 사람들이 요동치는 팔다리를 붙잡고, 명자는 필사적으로 연희의 입을 벌려 마침내 입에 가루를 털어넣는다.


"옳지! 이거 먹어야 나어! 먹어야 돼!"

"갉! 콜록, 콜록! 그만! 앍!"

"어, 다 먹었어! 좀만 더 먹어!"


"아이고, 가시내. 아이고, 이게, 크크큭, 뭔 난리고. 하이궁. 카카칵."

"수고했어. 아이고, 진을 그냥 다 뺐네."

"연희야, 아이고, 너 엄마가 주는 거를 잘 먹어야지. 니네 엄마가 이래 용 쓴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연희는 다시 이부자리에 누워 있다.


"엄마, 나 오므라이스라는 거 한 번 먹어보고 싶어."

"오므라이스? 그게 뭐야?"

"그 밥이랑 햄이랑 야채 넣고 케첩이랑 볶고 위에 계란 지단 같은 걸 얹은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하니?"

"하긴... 그렇지..."

"잠이나 자."






"연희야. 아침 먹자."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니가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분명 엄마는 오므라이스 같은 건 할 줄 모르는데.'

분명 명자가 누군가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우리 딸아이가 오므라이스를 먹고 싶어 해요. 그런데 제가 오므라이스를 할 줄 몰라서, 한 번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분명 이랬을 것이다.


명자는 오므라이스가 어디서 어떻게 생긴 것인지 말하지는 않았다. 연희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연희는 그 일로부터 30년이 흐른 후에도 아들들이 먹을 저녁을 차릴 시간이 되면, 가끔씩 엄마가 가져다주었던 오므라이스를 생각한다. 엄마에 대한 기억,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떠올라 뭉클함을 주는 오므라이스.




삘릴릴리릴리ー

"네. 사근동입니다."

"명자야. 나다."

"아버지!"

"무슨 일 있냐? 엄마 제사 때도 안 내려오고."

"아버지, 사실은... 연희가 좀 많이 아파요. 정신이 없다보니 엄마 제사도 못 챙기고 오빠만 내려가라고 했어요."

"연희가? 워디가?"


차마 아버지에게 말하기는 착잡했지만 너무나도 억울한 마음에 모두 토로를 하고 보니 시한부 선고 받은 얘기까지 모두 토해냈다.


"시상에, 시상에. 워쩌케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헌티 말을 허지, 왜 아무 말도 없었냐."

"아버지. 내가 어차피 토요일에 내려갈 거야. 아버지 얼굴 본지도 너무 오래됐다."

"연희는 워쩌구? 최 서방이 잘 돌보겄냐?"

"하루 비우는 건데 뭘."


원래 명절에는 시골에 내려갈 수가 없다. 명절대목에는 가게 일이 너무 바빠 대원이와 연희까지 동원될 정도다 보니, 명절은 그냥 건너뛰고 엄마 제사 때 내려간다. 그것도 이번 해는 걸렀으니 이번에 내려가면 작년 제사 이후로 아버지 얼굴을 뵙게 된다.




"아버지!"

"왔구나! 그래, 어찌 왔어? 버스 타고 왔어?"

"응. 버스 타고."

"고단혔겄다. 어여 들어가자. 애미야, 방 좀 뜨시게 뎁히자."


시골집은 예나 지금이나 고즈넉한 멋이 일품이다. 기와집 한 채 옆으로 감나무 하나. 어렸을 때부터 저 감나무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 멀리 읍내를 바라보던 것이 생각 난다. 도시에 적응하여 퇴화한 몸은 그 때는 어떻게 나무를 그렇게 잘 탔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 한다.


명자에게 저 기와지붕은 곧 놀이터였다. 그 비싼 기왓장을 하도 밟아서 몇 장이나 깨뜨렸던지. 엄마는 빨래를 두드리며 지붕 위에 올라간 명자를 보고 저 가시내는 닭이 환생한 게 틀림없다곤 하셨다.


언제 지었는지 몰라도 아버지 어렸을 때도 이 집은 그대로였으니 적어도 70년은 넘었을 테지. 온돌에 몸을 지지니, 피로가 저절로 풀린다.


"아버지. 날이 부쩍 추워졌어요. 요즘도 논에 나가셔?"

"응. 가끔."

"큰 오빠가 알아서 다 할 텐데 뭐하러."

"집에만 있으면 갑갑혀. 나는 평생 농부나 하고 살아서, 발이 저절로 논에 가네."


연희 이야기를 애써 피하려고 명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낸다.


"을매나 마음고생이 심혔냐. 나도 요로코롬 마음이 아픈디, 부모인 네 심정은 어땠을겨."

"그러니깐. 내가 요즘은 무슨 정신으로 사는지 모르겠어."

"아이고, 하느님. 그 어린 것을 그저 놔두시고, 이 늙은 몸을 대신 데려가슈."

"아버지. 왜 그런 말을 해."

"이것아, 부모가 죽으면 그저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사는겨. 날 봐라. 나는 그 갓난아이, 이름도 못 지은 그 놈, 낳은지 며칠도 채 안 돼서 하늘로 돌아갔는데 그 놈을 아직도 잊지를 못 하고 이러고 살지를 않냐. 하물며 18년을 키웠는데 무참히 죽어버린다면 그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있겄니?"


굳세게 버텨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품은 너무 따뜻했다. 주름진 아버지의 눈에 진주처럼 맺힌 눈물이 가슴 속으로 파고든다. 따뜻한 온돌방의 온기, 그리고 아버지가 명자를 울렸다.


"괜찮어. 괜찮어. 부모는 사람 아니냐. 왜 울음을 참냐. 울어부러."






"아버지. 그만 됐어요. 안 그래도 집에 연희 먹을 거 별거별거 다 사서 다 쟁여놨어."

"그려도 이거 한 번 맥여봐라. 우리 밭에서 나는 건 진짜 좋은 약이여. 우리 집안 사람들 다 병이 없잖여."

"이걸 어떻게 다 들고 버스를 타."

"야, 안 그려도 흑석동 애들 불렀어. 명석이 차에 싣구 가."

"어? 오빠가 가게 닫고 온대?"

"어. 아까 아침에 출발한다고 전화했으니까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됐어."




한 시간 있다가 집 앞으로 둘째 오빠네 차가 선다.


"트렁크에 간신히 다 넣었네. 출발하자구. 아버지, 우리 가요.

"그려. 조심혀라. 그리고 명자야, 연희가 다 나으면 데리고 같이 내려와. 꼭."


시집 가던 날 같다. 아버지를 떠나려고 하면 꼭 목이 메인다. 


"알았어요. 날 추워지니까 아버지 감기 조심하세요. 다음에 올 때까지 건강하셔요."

"나는 걱정 말어. 연희나 신경 써."


고향의 흙길을 달려 서울로 향한다. 차 뒤로 흙먼지가 자욱한데, 그 사이로 손 흔드는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고향 동네를 돌아나오며 차창 옆으로 비치는 비어있는 논의 황량한 모습과 마주한다.






"누님도 참. 그렇게 큰 병이면 대학병원엘 가야지, 그냥 동네 의원에다가 물어보고 말아요? 당장 한대병원에 입원시켜요. 누님이 지금 돈 걱정할 때예요?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약을 처방 받아야지."


아버지한테 소식을 들은 막내동생이 찾아와 성화를 낸다. 그 성화에 못 이겨 한양대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혈병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와중에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백혈구 수치가 높아진 거지, 백혈병이 아니예요. 그냥 잘 먹고 처방해 주는 약 잘 드시구요, 잘 자면 저절로 낫게 되어 있어요. 도대체 그, 어느 병원에 가셨는데 그런 소리를 해요?"

"신당역에 경성의원..."

부끄러운 마음에 명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아이고. 괜히 마음고생하고 돈만 날리셨어요. 이거 가지고 1층에 약국 가셔서 처방 받으시고요. 앞으로는 그런 병원 절대로 가지 마세요. 아셨죠?"

"네..."


큰 병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가장 중요한 시기의 반 년을 놓쳐버렸다. 그 덕에 수학은 완전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개놈의 자식, 누구 인생 말아먹을 일 있어? 학교까지 쉬게 했더니 이게 뭐야!"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큰 병 아니라잖아."

"에휴. 그 놈 머리털을 다 뜯고 싶네."


87년 2월, 연희도 완쾌를 해서 두 모녀는 시골에 갈 준비를 한다.


삘릴릴릴릴리ー


"네, 사근동입니다."

"연희 어미야."

"큰 오빠? 우리 내일이면 내려갈 건데 뭐하러 전화했어?"

"아버지 돌아가셨다."


회광반조 10장 이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