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지?"

나의 질문에 녀석은 순간 당황한 듯했다. 아마 녀석이 나한테 동일한 질문을 하더라도 나 또한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상대편의 답변에는 항상 정답만을 제시해야 한다는 본능이 잠재하기 때문일 테지. 

"이상원."

나는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고, 녀석은 내 손을 잡았으며, 나는 녀석을 정중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게 아니라, 나의 진짜 이름이 뭐냐?"
"당신은 여러 이름을 갖고 있지요. 당신은 자신이 관심을 갖고 찾아가는 세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십니다."
"아니, 내가 원래 있던 세계에서 나는 뭐라고 불렸지?"
"그것은 저도 모릅니다."

녀석은 내가 원래 있던 세계에는 가본 적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네가 원래 속했던 세계에서 나는 뭘로 불렸지?"
"당신은 우리 세계를 다스리는 왕의 동생으로 불렸습니다."
"그럼, 너를 나한테 보낸 김준수가 네가 살던 세상의 왕이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어디 커피숍이라도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너, 커피 잘 마시니?"
"이 세계에 커피가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아직 한 번도 마셔보지 못했습니다."
"설탕만 많이 넣으면 맛있을 테니까 한 번 마셔보지? 커피값은 내가 낼 테니까."

나는 주위를 둘어보았다. 조금 값싸 보이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커피 빈이나 스타벅스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아메리카노 한 잔하고 크림을 잔뜩 넣은 것 한 잔 주세요."
나는 덜 떨어진 양복쟁이를 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로 안내했다. 혹시나 나를 쫓는 양복쟁이들이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맞은 편에 앉은 온순한 양복쟁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내가 뭐라고 불렀으면 좋겠나?"
"로빈입니다."

로빈? 중세 시대에 셔우드 숲에서 산적질을 하던 유명인이 생각났다.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혹시 휴대폰이나 다른 위치추적장치를 갖고 있나?"
"휴대폰이 있습니다. 저는 다른 위치추적장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럼 휴대폰을 끌 수 없나? 자꾸 위치추적을 당할까 봐 마음에 걸리거든."

로빈은 내 말을 잘 듣는다. 휴대폰의 전원이 꺼지자 약간 가지고 있던 마음의 긴장이 다 풀렸다. 
"로빈, 내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나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릴 수 있었을 텐데. 왜 알리지 않았나?"
"동료에게 알리려면 전화를 해야 하고, 한참 제가 누구를 발견했는지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었지요."

나는 껄껄 웃었다. 내가 이 양복쟁이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뭔가 거창한 의사소통 수단을 숨기고 있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자네 왕을 배신하고 나를 위해 일할 수 있겠나?"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떠나온 세상에는 제 가족들이 살고 있거든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두 분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메리카노와 크림 커피가 나왔다. 나는 크림 커피에 설탕을 듬뿍 넣어 로빈에게 접대했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로빈 휴대폰의 전원을 꺼놓게 한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 모든 부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 나의 형(정말로 나의 형일까?)이라는 사람은 하나의 휴대폰이 꺼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고, 전원이 마지막으로 꺼진 곳에 부하들을 파견할 것이 틀림없다. 

"자 밖에서 이야기하자. 이렇게 앉아만 있으니 답답하군."
나는 로빈을 이끌고 커피숍 밖으로 나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몇 가지 정보를 더 얻고 싶었다.

"네가 속한 세계의 왕은 이 세계에서는 김준수라고 불린다. 본래 이름이 뭔지 아는가?" 
"왕 본인께서는 자신이 원래 속한 세계에서 사울이라 불린다고 하셨고, 제가 속한 세계에서도 왕을 사울 왕이라고 불렀지요." 

"사울 왕이 원래 속했던 세계는 시온이라고 불리지 않나?"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순수의 세계, 시온이라고요." 

순수의 세계? 아직은 왜 시온의 세계가 순수의 세계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것도 중요한 정보일 것이다. 내가 원래 속했던 세계인 시온에는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 너는 어떻게 이 세계로 오게 되었지?" 
"제가 이 세계에 오게 된 방법은 모릅니다. 사울 왕께서 저희를 이 세계로 데려오셨죠." 

나는 로빈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이쯤 해서 로빈과 헤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언젠가 좋은 계기가 있다면 로빈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로빈, 한 가지 부탁을 하겠다. 나와 헤어지고 나서 5분을 기다릴 수 있겠나? 나의 위치를 알려주더라도 5분의 여유를 주게. 내가 충분히 도망칠 수 있도록."
"5분 후에 휴대폰을 켜더라도 당신의 위치를 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휴대폰이 꺼진 것을 분명히 사울 왕이 알 테니까. 다만 나와 싸우다가 휴대폰의 전원이 나갔고, 그 사실을 뒤늦게 발견해서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면 될 것이다."

나는 로빈에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지갑을 꺼내 운전면허증을 살펴보았다. 내 주소지로 간다면 나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많은 단서가 있을 것이다. 다만, 나의 형 사울이 그리 멍청하지는 않을 테지? 분명 강력한 부하들을 보내 내 주소지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세계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면, 나는 결국 사울을 만나야 할 테고, 그 부하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겠지? 사울은 나와 형제니까 그의 부하들이 궁극적으로 나보다는 전투력이 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내 전투력으로는 약한 부하가 다수로 덤빈다면 이길 자신이 없다. 아까의 로빈보다 더 강한 전투력을 갖고 있고, 그 숫자가 2명만 되어도 과연 내가 당해낼 수 있을까? 

나는 고민 끝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거주지로 가서 필요한 정보를 얻기로 했다. 나는 신용카드를 이용해 가까운 현금지급기에서 최대한의 현금을 인출했고 지하철을 이용해 주소지 근처의 역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