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그, 그게 사실 부채 없이도 도술을 쓸 수 있다네."


"흐음."


"아주 귀여운 수준이지만."


"으흠."



퍽도 그러시겠단 눈이었다.


들킬 위기에 처해있었다.


의심을 푼 쪽의 창고지기가 자신의 동료를 쳤다.



"예끼 이 친구야.

다른 도사님께서도 지팡이 잘만 잃어버리시잖나.

자넨 뭐 이리 회의적인가."


"그래도 한두군데가 아니잖나."


"도사님이 도술이라도 보여주셔야 믿겠나?"



뭐야.


일이 갑자기 쉽게 풀리는데.


땅에 나비 낙서를 하고 도술로 살려냈다.



"날아라."



나풀나풀. 나비 한마리가 날아올랐다.



"이제 믿겠나?"


"분명히 도사님께서 부채 없인 못 쓴다고 그러셨는데."


"'부채 없이 가능한 건 이게 전부' 란 걸 자네가 잘못 들은 거겠지."


"그래그래, 도술 아무나 하나?"


"그럼 저 여자는?"



신중한 창고지기가 무당 여인을 가리켰다.



"저 여자야, 변태라서 곧 범해진다는 사실에 내심 흥분했나보지."


"아."



무당 여인을 바라보는 신중한 창고지기의 눈이 '의심' 에서 '한심' 으로 전환되었다.


졸지에 변태가 되어버린, 아니 이미 변태이니,

변태성이 세상에 공개되어버린 무당은 억울함에 진짜로 눈물이 나고 있었다.



"자네가 자꾸 자리를 비워주질 않으니, 저 여자는 몸이 달아오른 채 기다리기만 하잖나.

보게. 저기 저 원통함의 눈물을."


"정말이로군."


"저, 저 그런 변태 아니거든요?"


"미안하게 됐네, 처자.

이 친구가 눈치도 없이."


"저흰 가보겠습니다.

식당 쪽에 있을 테니 재미 보신 후에 불러주시지요."



울먹울먹.


겨우 창고로 들어선 무당 여인은, 별로 기뻐보이지 않았다.



"나, 나 그렇게 변태 아닌데....

아가, 넌 내 말 믿지?"



무당 여인이 배를 만지며 훌쩍였다.



"엇!"


"왜 그러시오?"


"방금 찼어요! 방, 방금!"



헤헤, 헤헤헤-.


웃었다가 울었다가 분주한 여인이었다.


저게 임신인가.


변신술을 풀고 창고를 뒤졌다.


사다리와 도적들이 입던 옷을 발견했다.


그놈들, 복식이 통일되어있었단 말이지.


무당 여인에게 하나 건네주고 나도 입었다.


이걸로 속여봐야지.



*



옷소매로 무당 여인의 얼굴을 닦아주며 거목 앞에 이르렀다.


"죄송합니다. 늦었어요." 라고 하니 통나무 요새 안으론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무당 여인이 속삭였다.



"이렇게 쉽게 속는 걸 보니 바보 천치들 뿐인가봐요."


"입조심하시오.

창고지기놈들에게 들킬 뻔한 걸 잊은 게요?"


"창관의 기녀들에게 들킬 뻔했다고요? 뭐를요?"


"됐소. 말을 말아야지."



올라가보니 자못 진지한 분위기였다.


예의 뚱보가 비쩍 마른 남자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 주변에는 부하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뚱보의 뒤에는 부채가 놓여있었는데, 홀쭉이의 뒤에 지팡이가 놓여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예쁘게 장식되어 있네요.

없으면 도술을 못 부린다는 보구는 저거 아닐까요?"



무당 여인이 속삭였다.


그런 모양이었다.



"변해라."



미리 창고에서 그려놓은 쥐 낙서를, 도술로 살려냈다.


낙서에 쓰인 종이는 콩쥐전의 한 페이지였던지라, 쥐의 몸에는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쥐에게 작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가서 홀쭉한 놈의 지팡이와 뚱뚱한 놈의 부채를 들고 와라."


[찍?]


"못 알아먹겠단 표정하지 말고.

술법 푼다?"


[찌익....]



풀이 죽은 쥐가 앞쪽을 향해 나아갔다.


좌중의 맨앞에 앉은 뚱보와 홀쭉이는 누군가에게 혼나고 있었다.



[이 멍청이들아! 눈은 뒀다 어디다 쓸 게냐!]



혼을 내는 자는 자그마한 신장이었는데, 몸 이곳저곳에 나무줄기가 얽혀있었다.


무당 여인에게 소곤거렸다.



"인간은 아닌가보구만.

저 자가 요술을 알려준 요괴인가 보오.

아마 나무 요괴겠구려."


[내가 너희들에게 무슨 어려운 명을 했더냐?

임산부를 노리라는 건 그리도 어렵더냐?!]


"죄송합니다 두목님."



뚱보 녀석이 나무 요괴에게 사과하였다.



"덤으로 두목인가 보고."


"희안하네요."


"뭐가 말이오."


"저 도적단 두령, '기' 가 안 느껴져요."



''기' 라니. 사이비 선무당도 아니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다.


실제로 선무당인 건 둘째치고, 

무당 여인이 기 비스무리한 걸 감지하는 모습은 종종 보여줬기에

딴죽걸지 않았다.



"아니, 기가 있긴 한데 자신의 기가 아닌 느낌이에요."


"무슨 뜻이오?"


[찍. 찍찌직.]



술법으로 만들었던 쥐가 내 발치를 콩콩 쳤다.


쥐가 무언가를 들고 돌아와 있었다.


나는 쥐에게 작게 대답했다.



"그건 지팡이가 아니라 붓이야.

다시 찾아와."


[찌잉직익....]


"저기 서 있는 두목은 인형이고,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 같아요."


"감히 수장을 조작하는 간 큰 녀석이 있단 말이오?"


"조종하는 본체의 기는 아래에서 느껴져요."


"아래라?"


[찍찍.]



아래에 뭐가 있나 상념에 잠기려니까 쥐가 도로 발치를 두들겼다.


나는 퇴짜를 놓았다.



"그건 지팡이가 아니라 고삐잖아.

다시 찾아와. 지팡이로."


[찌쥐이익....]


"그건 그렇고 어째 김 치찌개님은 보이지 않네요.

어서 데리고 나가야 할 텐데."


"정말, 총잡이 양반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구려.

어디로 간 겐지."


[거기! 조용히 안 하냐!]



도적단 두목이 호통쳤다.


합하고 입을 닫았다.



[낙호 녀석이 부활하면 도적질해서 희희낙락하는 생활도 끝이란 말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겠어?!]



후우- 하며 두목이 풀썩 주저앉았다.


[찌직] 하며 쥐도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도 물론 허탕이었다.


도적 두목은 뚱보 옆의 홀쭉이에게 명했다.



[그래, 납치해온 여자나 꺼내봐라.

맛이라도 봐야할 것 아니냐! 기왕 데려왔으니.]



두목의 지시에, 홀쭉이가 뒤에 놓아두었던 지팡이를 잡았다.



"너 잘 봐. 저게 지팡이야. 응? 지팡이."


[찍찍찌익.]


"알아들었으면 안 들키게, 저 사람이 지팡이 내려놓으면,

슬금슬금 가서 빼앗아와."



쥐가 출발했다.


홀쭉이가 뭐라 주문을 외자 지팡이가 '펑' 하며 여인을 뱉어냈다.


푸른 머리, 푸른 눈, 밀짚모자.


밧줄로 단단히 포박되어 있었지만 총잡이 여인이었다.



"포수님이네요."


"생기가 넘치는 걸 보니, 해코지를 당하진 않았나보구려."


"색기가 넘친다고요?"


"아고 이 오라질 놈들아!!

느이들이 그러고도 동료드냐!!

고향 모시리에서 지내긌단 사람 끌고 나서놓구선 우째! 나만! 두고! 간단 말이드냐!!

아이에에, 이 쌍노무자슥들아아악!!!"



고래고래. 재회한 여인은 시끄러웠다.


자신을 납치한 납치범들 앞에서 굴하지 않고 동료의 험담을 부르짖는 패기.


말법적 패기가 그윽한 여인의 앞에서 좌중=도적들은 할 말을 잃었다.


격렬하게 전후 (교접) 를 행하겠다던 두목만 쭈뼛쭈뼛 다가갈 뿐이었다.



[이보, 이보게.]



요새 저 대사 자주 듣네.



[동료가 있단 말이 진실이더냐?]



총잡이 여인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썩어도 내 갑사였는디 도적 놈들헌티 알려줄 성 싶드냐?"



기개 있는 여인이었다.


뚱보 녀석이 대신 답했다.



"예 두목님. 세명이 있었습니다."


[찌직. 찍.]



아 거, 이 녀석, 몰입도 부수는 짓거리 하나만은 제대로 하네.


쥐가 복귀했다.


앗, 이번엔 지팡이가 있었다.


쥐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잘했다. 잘했어.

다음엔 부채. 저 뚱뚱한 사내 뒤에 놓인 부채다."


[찌익?]


"아니 쟤는 별로 안 뚱뚱하잖아.

그냥 키가 큰 거지.

체구가 큰 거라고."


[찍, 찍찌?]


"쟤? 쟤는 여자야.

... 못 믿겠단 표정 하지마. 가슴이 나왔잖아.

가슴만 있으면 다 여자냐고? 세상이치가 그런 걸 어쩌란 말야. 반항하니?"


"도사님 뭐하세요...?"



무당 여인이 아픈 애 바라보는 시선으로 날 대했다.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나.



"저기 뚱뚱한 사내 녀석이야. 알겠지?"


[찍찍.]



쥐가 내달렸다.


뚱보가 설명했다.



"셋 다 계집이었고, 비렁뱅이처럼 꾀죄죄했습니다."


[멍청한 것! 누가 옷의 상태를 물어봤느냐!

임신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걸 물은 게 아니더냐!]


"그건 잘 기억이 안 납니다, 두목."


"무복을 입은 계집이 배가 부풀어 있었습죠."



홀쭉이의 말을 듣고 두목이 바닥을 쳤다.



[임신을 한 줄 알았으면 데리고 왔어야지!]


"셋은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요. 강쪽으로 가고 있었고."


[강이 뭐 어때서!]


"강은 그 놈의 영역이잖습니까."



그 놈?


그 놈이 누군데.


요괴와 손을 잡고, 요술까지 부리게 된 도적단이 두려워하는 놈이라?


궁금하다.


실로 궁금해.


그러나 내 궁금증은 쥐 녀석이 짓뭉개고 말았다.



[찍찍, 찍. 찍.]



이쯤 되면 알고서 즐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이건 부채가 아니라... 나뭇가지잖아.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이런 걸 헷갈리니?"


[찍찍지익, 찍!]


"하나 더 들고 왔다고?

보여줘봐."


[찍.]


"야야, 이번에도 틀렸어.

이건 부채가 아니라 애널플러... 이게 왜 여깄냐?

누구한테 구해온 거야."


[찍찍. 찌지익.]


"그 뚱뚱한 여자한테서 구해왔다고?

세상에. 얼른 반납하고 와.

뚱뚱한 사내야. 알았어?

뚱뚱한. 사내.

너 이번에도 실패하면 진짜로 계약 해지한다."


[찌이윅....]



쥐가 통통 달음박질쳤다.



[으으으.]



두목되는 녀석이  머리를 싸맸다.



[내, 강가에 분신체라도 만들어 보내겠다.

세 계집의 인상 착의를 고하거라.]



'그 놈' 의 영역이네 어쩌네 설전을 벌이는 모양이더니, 대담해졌네?


의외였다.



"한 녀석은 봇짐이 많았습니다.

팔찌가 있고, 검은 머리에 목소리가 예뻤습니다."



내 얘긴가.


후후. 또 내 아리따운 육성에 매료된 사람이 있나보구만.



"두번째는 꼬맹이였습니다.

빨강 머리에 시건방져서 한대 쥐어박고 싶어지게 생긴 애였죠."


"걔 댕기 비싼 거 쓰던데, 걜 납치했으면 돈 좀 벌지 않았을까?"



말단 하나가 수군거렸다.



"세번째는 배가 부른 무당이었는데....

젖이 컸습니다."



꿈틀.


무당 여인이 움찔하였다.



[가슴이 크단 특징 말고는?]


"어... 젖이 컸습니다."


"엄청 컸죠."


[알겠으니까, 그 밖의 특징은 무엇이 있냔 말이다.]


"저, 젖, 젖이 컸어요."


"우리 머리통보다 컸죠."


[이 녀석들, 가슴만 봤느냐?]


"그, 앗, 그, 그게-."


"두목님도 그 가슴을 봤으면 이해하실 겁니다.

그건 정말... 으음."


"그렇죠. 정말... 으음."



도적단 사내 놈들이 서로 동조의 눈빛을 주고 받았다.


신기하게도 도적단에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여자들은 눈을 질끈 감거나 한숨을 내쉬거나 하는 등 가지각색의 반응이었다.


참고로 우리쪽 여자, 무당 여인께서는....



"나, 가, 가슴... 엄청 보여졌나봐요.

어떡하죠? 나 아, 앗, 아직 시집도 못 갔는데."



시뻘개져서는 내 소매자락만 붙잡고 있었다.


두령이 노발대발하려던 찰나, 도적단의 계집이 나섰다.



"그 임신한 계집이라면 머리색이 눈에 띄었습니다."


[머리색이 어쨌느냐.]


"백발이 많았습니다. 젊은 나이임에도."


[백발이?!

설마 눈이 분홍색이었느냐?]


"똑바로 보진 못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머리 묶는 방식이 굉장히 독특했는데, 말의 꼬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고보니 무당 여인 눈은 언젠가부터 연분홍색이었다.


머리는 내가 묶어줘서, 포니테일이었다.


두목은 낙담하였다.



[으으아으. 낙호 놈이 기어이 찾은 셈이구나.]



잠깐. 알겠다.


그러니까 무당 여인의 백발과 홍안이 무언가의 증거인 거야.


'낙호 놈' 이 찾고 있던 '무언가' 의 증거인 거지.


도적 두목의 계산에서는, 무당 여인은 이미 낙호마을에 갔으니, '낙호 놈' 의 수중에 떨어진 거라 본 걸테고.


호칭으로 보았을 때 도적 두목과 '낙호 놈' 은 적대 관계이니, '낙호 놈' 이 잘 되는 꼴을 보기 싫었을 테지.


그래서 배 아파하는 거고.


... 응? 근데 무당 여인이 임산부란 건 어떻게 안 거야? 이 도적 두목은.



'꼬르륵'



돌연 울린 고전적 방해에 추리가 끊겼다.


무당 여인이 얼굴이 시뻘개져있었다.



"저, 저기 배가... 고파서요."



'올라오기 전에 창고에서 먹었잖소?' 라는 무례한 말은 하지 않았다.



"댇지. 그만 좀 먹으시오."


"제, 제가 아니라 아기, 아기가요. 아기가... 배가 고프대요."


"그 변명 전에도 쓰지 않았소?"



허어. 숨겨뒀던 육포를 꺼내 건넸다.


울까 말까 망설이는 낯으로 무당 여인이 육포를 물었다.


비상식량이었는데.



"퉤엣. 맛 없어라."



이 양반이?



"앗, 죄, 죄송해요. 입덧... 인가봐요."



한대만 쥐어박을까?


아주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게 다 임신 때문이 아니오.

도대체 그 놈의 정인情人은 뭐하는 작자길래 그리 감싸고 도시오?"


"말했잖아요. 그런 사람 없어요."


"그 말을 믿으라고?"


"차, 참말인데."



무당 여인의 눈망울이 흐물거렸다.


아우 진짜.



"됐소. 내가 말을 말아야지."



통나무 요새에 들어올 때 했던 말을 다시 써먹었다.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어라.


분위기가 싸한데.


다들 우릴 보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 잡담이 많이 시끄러웠나요."


[분홍색의 눈, 대체로 하얀 머리카락, 부른 배, 큰 가슴.]



두목이 무당 여인을 손가락질하였다.



[맞지 않느냐?]


"맞네요."


"딱 저 녀석입니다."


"저 가슴은 한번 봤으면 못 잊죠."


[그럼 그거구만.]


"무슨 그거요."


[잡아.]



나무 요괴의 말이 떨어졌다.


두목의 지령에, 도적들이 벌떡 일어섰다.


손에 하나씩 무기를 들고 있었다.


나도 무당 여인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섰다.



"제길! 들켰다!"



*


이번화 원본은 이쪽
그나저나 계속 백업을 까먹게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