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애들은 착한 애를 좋아해. MT 가서도 묵묵히 설거지 하고 있던 애가 제일 마음에 들더라."

별 거 아닌 이야기인데, 아직까지도 (전)형수의 그 말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여자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면, 나는 슬그머니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 뭔가 일을 찾기 시작했다.

밥상 앞에 수저를 챙겨주거나, 물을 떠다 주거나, 화장실 가는 척 그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를 집어서 휴지통으로 가져가거나.

그런 별 거 아닌 일들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일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데면데면한 사람들의 뒷바라지 같은 것들을.

혼자서 그런 일들에 신경을 쏟고 있자면, 인간관계의 소음에서 한 발자국 멀어진 것만 같았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소속감과 거리감의 경계. 그 균형이 마음에 들었다.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서로 바라보는 정도가 내게는 어울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그릇을 닦았다. 전등이 고장 난 주방에서 뜨거운 물에 불린 밥풀을 수세미로 밀었다.

거실에서는 아내가 보는 TV쇼 소리가 들렸다.

슬슬 분위기가 누그러져 가는 대학 MT의 그날 밤처럼, TV쇼의 소리를 멀고, 소란했다.


밤이 되면 아내는 TV쇼를 더 보다 잔다는 핑계로 안방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안방 침대에 누우면 그녀는 소파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의 (그녀가 언제 마지막으로 벴는 지도 모를)베개를 끌어 안고 잠의 틈새에서 방황했다.


그 날 대학 MT의 주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이곳 안방의 침대 위에서도 경계를 헤매고 있었다.

이곳이 내 삶의 균형이며, 내가 좋아하는 지점이라고 믿으면서.


아마 몇 주 내로, 어쩌면 오늘이나 내일, 그녀는 내게 아무런 맥락도 없이 화를 낼 것이다.

나는 그녀와 싸울 것이고 그녀는 한 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지. 그러고서는 내가 모르는 남자와의 밀회에 한 주를 온전히 투자할 것이다. 어쩌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 젊은 시절의 간지러운 감정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나는 멀리 차창 밖으로 보았던 아내의 남자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 날 밤부터 줄곧,

사실은 누군가 나를 바라봐주었으면 했다.


내 손에서 씻겨 하얘지는 그릇들을 하나하나 내려놓으면서, 나는 그들을 보고 있었다. 드문드문 조명 속에서 잡담을 속삭이는 그들을 보고 있었다. 계속.

그래서 그 날 아내가 내게 다가와 고맙다고 했을 때, 어깨를 기대었을 때, 내 기다림을 보상 받은 것만 같았다.

이 거리감이 정답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언젠가 아내는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더 먼 세월이 지나서, 우리가 서로 몰랐던 시간의 몇 배를 같이하게 되면. 그녀는 스스로 그녀의 실수를 밝힐 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경계에 앉아 그때를 기다릴 것이다.


묵묵히 그녀의 뒷바라지를 하는 나를, 다시 돌아봐 줄 때까지.



경계

2022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