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만화같이 절묘하고 영화처럼 아련한 만남이, 드라마같이 달콤하고 시처럼 낭만적인 그런 만남이. 나에게도 오지 않을까? 같은 것 말이다. 누구나 이런 상상 한 번쯤은 하잖아? 내가 그리 특별한 사람인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런데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운명적인 만남이 이런 건 줄 알았으면 난 그런 만남을 꿈꾸지 않았을 거야. 그도 그럴게 내 눈앞에 어떤 미친 여자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져서 시커먼 아스팔트를 새빨간 색으로 덧칠하고 있을지 누가 알았겠어?

 

이 일이 일어난 지도 어느덧 두 시간 하고도 삼십팔 분. 이쯤에서 추가할 사항들이 몇 개 있다.

 먼저, 이 여자는 정말 ‘미친’여자가 맞는 모양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진짜로 이 여자가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그러니까 뇌에 이상이 있다는... 그냥 쉽게 말해 정신병자다. 물론 차별이나 비난의 의도는 전혀 없다. 실제로 그렇다니 뭐 어떻게 잘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야, 이것 좀 열어줘.”


 침대에 누워 당당히 오렌지주스 뚜껑을 열어달라며 히죽대는 이 여자가 나와 동갑이라는 것이다.


“...줘 봐."


아무리 그래도 환자의 부탁을 마다하진 않는다.


 처음에는 완전히 죽은 줄로만 알았다. 아니, 그런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말해서 뇌가 멈춰있는 상태였다. 어이없는 그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아, 아프다.”


 아. 아. 프. 다. 이 네 글자가 적당한 바람을 타고 살랑살랑 날아와 내 고막을 두드렸다. 이 조용한 노크는 뇌까지 전달되는 과정에서 말도 안 되게 증폭되었고, 결과적으로 난 우레와 같은 굉음을 들은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정신을 번뜩 차리고서 본 휴대폰 액정 너머엔 ‘119’ 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언젠가 구급상황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아무개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구급차는 네 생각보다 더 빠르게 도착하니 걱정하지 마라.’다. 신고를 한 지 몇 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으니 말이다. 물론 이건 체감상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 정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정말 빨리 도착한다는 건 장담할 수 있다.

 어찌됐든 구급차는 도착했고 저 여자가 들것에 실려 가고, 어째선지 나도 합승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꼬박 두 시간 반 동안 이 병원 신세인 것이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앞으로 1주일간 입원치료를 받고 나서는 후유증 같은 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신체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지 아까 말 한 대로 정신적으로는 문제가 꽤 심각하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증세가 있다나. 당사자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하니 내가 좀 알아보라고 하던데 도대체 내가 어찌 압니까. 저도 오늘 처음 본 앤데.

 이 와중에 주스 뚜껑은 왜 이리 안 열리는지.


“언제 열어 줄 거야? 빨리 좀 줘.”


열어주지 말까.


 그나저나 지금 얘기하는 걸로 봤을 땐, 조금 짜증난다는 점을 빼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보이지는 않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잠시 검사결과가 잘 못 나온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넌 조금만 더 참아봐라. 지금 온 힘을 다해 열고 있잖냐.


“아, 빨리 달라고!! 진짜로.. 빨리 좀.. 하아, 빨리. 하아. 이제 그건 됐으니까.. 하아, 물이라도 제발...”


 순간적으로 병명이 ‘오렌지주스 중독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겠지. 이런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물이라도 빨리 가져다주자.


 내가 물을 건네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컵을 낚아채 간다. 그리고 낚아채 간 컵은 놔두고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약봉지를 꺼낸다. 곧바로 봉지를 뜯고선 알약 두 개를 꿀꺽 삼킨다. 그리고는 한 봉지 더, 두 봉지... 세 봉지...

어라?


“뭐, 뭐하는 거야! 무슨 약을 한 번에 그렇게 많이 먹어?”


5초간 침묵.


“으히. 에헤헤. 침대 푹신푹신 하다아..”


? 잠깐, 설마.


 당황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몸뚱이를 봤을 때만큼. 내 몸이 저절로 튀어나갔다. 손을 뻗었다. 주머니 속에는 알약 서너 봉지가 더 들어있었다. 약국명은 쓰여 있지 않았다.


“이게... 뭐야?”


 대답은 없었다. 단지 나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며 웃는 그녀석의 표정만이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상태가 안 좋다. 이러면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의사를 불러오고 싶어도 혼자 여기에 둘 수가 없다. 한마디로 진퇴양난. 두 마디까지 하자면 사면초가다. 지금 나는 수백 수천의 병사에게 사방으로 포위를 당한 것과 같다.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자, 이게 몇 개일까.”

 브이 모양을 한 손을 좌우로 흔들며 물었다.


“두 개잖아. 나, 바보 아니야.”


 오. 불행 중 다행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대화를 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럼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아까 먹은 약은 무슨 약이야?”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있다.

몇 초 후, 고개를 살살 든다.


“기분이 나빠질 때 먹으면 엄청 기분이 좋아져.”


 내 예상이 맞았다. 이 녀석이 방금 먹은 건, 그거다. 마약이다. 도대체가 고등학생이 그걸 어떻게 구한건지.


“그럼 그 약은 어디서 났어?”


 이렇게 묻자 깜짝 놀란 얼굴로 과도하게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안 돼! 그건 말하지 말랬어.”


“그 말은 누가 했는데?”


“그것도 말하면 안 돼...”


“그럼 의사선생님한테 가보자.”


“아앗, 그것도 안되는데...”


 도대체 되는 게 뭐냐.


 그런데 이 녀석, 내가 쉴 틈 없이 질문공세를 펼친 탓인지 몸을 웅크리고 조금씩 떤다. 어쩔 수 없다. 일단 진정시켜야 한다. 이러다 난동이라도 피우면 곤란하다.


“미안해. 이제 그만 물어볼게. 편하게 있어.”


“진짜...?”


고개만 살짝 들어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로 말했다.


“응, 진짜.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도 돼.”


 이렇게 말하자마자, 웅크리고 있던 몸을 재빨리 풀고 침대 위에서 내 쪽으로 기어 온다. 긴 머리가 침대 바닥에 쓸린다. 태양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저기..!”


 조금 더 다가온다. 고여 있던 눈물이 마를 만큼 뜨겁게 눈을 부릅뜬다.


“혹시..!”


 이젠 이마가 서로 닿을 지경이다. 나는 뒤로 조금 물러섰다.


“...오렌지주스는 언제 먹을 수 있는 걸까?”


 아, 주스.


“어.. 잠깐만 기다려, 금방 열어줄게. 이게 잘 안 열려서..”


 내 앞에 있는 저 녀석이 자세를 고쳐 쪼그려 앉고선 두 손을 가슴께로 모은다.


“힘내, 넌 열 수 있을 거야!!”


 근데 이거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안 열린다. 제조사한테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얼마동안 끙끙대다가 겨우 열자, 뻥 소리가 났다. 제품이 신선하다는 증거라고 했던가. 그나저나 중요한건 이게 아니다.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저기 저 녀석에게 이 오렌지주스를 얼른 갖다 바쳐야 한다.


“자, 여기. 이제 마실 수 있...어?”


 문제가 하나 생겼다. 주스 병을 건네주다가 바닥에 조금 흘리고 말았다. 이 주스, 하나부터 열까지 짜증난다. 어쨌든 흘린 주스는 닦아야 하기에 이 녀석을 잠시 혼자 놔두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어쩐지 병실에는 휴지가 없었기에 얼른 다녀왔는데, 돌아와 보니 그 녀석이 곤히 자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다. 그래도 열심히 열어 준 주스인데 막상 안 먹어주니 서운하다. 그래도 이제야 좀 한숨을 돌릴 시간이 생겼다. 이제 뭘 할까. 깰 때까지는 옆에 있을까.






 나도 깜빡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눈을 뜨니 하늘이 노랗다. 불 꺼진 병실에 들어오는 석양은 약간 느낌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하늘이 노란 건 노란 거고, 침대위에 아까까지 아무 걱정 없는 듯이 자던 그녀가 없어졌다. 불현듯 좋지 않은 장면이 머리에 스쳤기에, 주위를 둘러봤다. 내 걱정과는 달리, 허무하게도 내 바로 뒤에 그녀가 있었다. 서 있는 그녀를 보자 나는 걱정과 궁금증을 8 대 2 비율로 섞어 질문을 던졌다.


“어디 갔었어?”


 돌아온 대답은 아까의 모습과는 달리 다소 차분했다.


“화장실, 그나저나 할 말이 있는데.”


 약발이 떨어진 모양이다. 아까의 아이 같던 모습은 어느 정도 옅어졌다.


“그 전에, 오렌지주스 고마워.”


 그러고 보니 주스 병이 비어있다. 결국은 마신건가.


“너, 내가 약 먹는 거 봤지?”


“응.”


“그 뒤의 모습도 봤고.”


“으응.”


“어차피 들켰으니 어느 정도는 말해줄게. 일단 이 약은 니가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나름대로 사연은 있지만 당연히 말 못하고. 가끔가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으면 아까처럼 정신이 가버려. 어린애처럼. 이거 말고 더 궁금한 거 있어? 이렇게 말해도 다 대답해 줄 수는 없지만.”


 일단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했다.


“몸은 괜찮아?”


“뼈가 조금 부러진 거 빼고는 괜찮아.”


 그걸 빼면 안 되지 않나.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한 쪽 다리와 팔에 깁스를 한 채였다. 정말 괜찮은 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아까 걸어 다니던 모습을 보면 괜찮겠지. 그리고 궁금한 점은 하나 더 있다.


“그럼 하나 더 물어볼 게 있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떨어진 거야?”


 평화롭던 나의 주말을 무참히 박살내 버린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경위가 무엇인가. 상당히 궁금하다.


“아.. 그건 내가 약 먹고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어쩌다 집에서 떨어진 거야. 집이라고 해도 2층이었으니 이 정도 꼴로 끝난 거지.”


 ... 잠깐, 집에서? 그것도 2층이라고? 난 그 때 집에서 막 나온 참이었다. 참고로 ‘204호’에서. 그렇다면.


“혹시 몇 호 인지 알 수 있을까.”


“203호인데, 그건 왜 물어봐?”


 아아. 그런 것인가. 정녕 이것이 문학에서 말하는, 영화에서 호소하는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인가. 아무리 봐도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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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때 써봤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글이 되었습니다. 부족한 점.. 밖에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언을 얻어보고자 여기 챈에 올려봅니다. 제목은 어그로 용으로 약간 웹소설스럽게 지어봤습니다. 제목도 문제라면 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