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의 노른자가 두 개일 때, 길을 가다가 떨어진 동전을 주웠을 때, 원하던 물건을 싼 값에 얻었을 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우리는 운이 좋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운이 좋다는 것은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나 역시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해 왔다. 만약 내가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친구와 만났던 것은 대학교 2학년의 심화화학개론의 수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도 만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전공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것은 나와 같은 학년의 같은 학부생이라는 의미일 것이니까. 하지만 그와 나는 놀라울 정도로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난 그가 나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사건은 그 수업의 기말 고사 시험 결과를 확인하던 날이었다. 다른 시험 결과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은 시험 결과. 한 번도 빠짐없이 수업에 출석했고, 레포트나 기말 시험의 결과도 상당이 괜찮았던 나에게 있어서 그 결과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난 곧바로 교수님을 만나러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실험실에서 방금 내려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흰색 가운과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손. 무엇보다 충혈된 눈과 부스스한 머리는 그가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일하는 조교나 대학원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이번 1학기에 수요일 3교시와 4교시 연강이었던 심화화학개론 수업을 수강했던 학생입니다. 오늘 오전에 성적에 관해 공지를 받았는데 제가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 성적이 너무 낮아서 혹시 성적평가에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가능하면 교수님과 직접 만나서 제 성적이 낮은 이유를 자세히 들어보고 싶어서 그런데, 혹시 교수님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오늘이 힘들다면 면담이 가능한 날짜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난 최대한 친절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나의 목적을 말했다.

잠시만요 교수님께 지금 메일을 보내겠습니다. 전화가 빠르기는 하지만 아마 학술 회의 중이셔서 전화는 안 받으실 것 같거든요. 하하. 메일은 자주 체크하시는 분이시니 아마 금방 답이 올 겁니다. 계속 서 계시기도 그럴 것 같으니 여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안내를 받은 자리에 앉았다. 결코 편안하다고는 할 수 없는 차갑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였다. 의자에 앉아 잠시 방을 둘러보았다. 제목조차 읽을 수 없는 외국어로 된 책부터 번역되었지만 제목이 너무나도 난해해서 펼쳐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책, 제목조차 적혀져 있지 않은 파일과 아무렇게 어질러진 A4용지더미, 수 많은 실험기구와 잡다용품, 테이블 위에도 수 많은 책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정리가 되어진 것도, 그렇다고 아주 어지럽혀져 있는 것도 아닌 악간 불편한 상태. 책상 위의 동물모양의 인형들과 작은 주사위나 모형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짙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옆에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던 조교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가 무엇을 해도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뒤에 먼지를 조금 닦아 내기 위해 인형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을 다시 움츠림과 동시에 나의 시선은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의 창문으로 검은 모자를 쓴 데다가 그 위에 후드까지 뒤집어쓴, 게다가 마스크까지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창문이 먼지로 흐릿했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가 교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들어오세요.”

조교가 대답을 하자 그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약간 긴 머리와 흰 피부, 눈이 크고 눈썹은 옅었다. 눈가에는 잔주름이 없었고, 마스크 너머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코가 높았다. 외모에 대해 잘 모르는 나 조차도 한눈에 잘생긴 외모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옷은 단정했고, 가방은 세련되었으며, 먼지의 향만이 가득했던 방 안에 희미하게 상큼한 향을 퍼뜨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조교는 나에게 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말을 지금 막 들어온 남자에게 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성적 때문에 왔는데요. , 자세한 건 교수님과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아 그러시면 잠시 저쪽에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기 저 분도 같은 이유로 오셨거든요. 아마 곧 교수님께서 답장을 해 주실 겁니다.”

조교의 목소리가 한층 밝았다. 아마도 일거리가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밝은 대답을 듣고 남자는 내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난 그제서야 그에게서 눈을 거두었다. 하지만 지루한 방을 계속해서 관찰할 생각은 없었다. 인터넷에 접속되지 않는 휴대전화를 들여 보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가방 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어제 밤 꿈에서 보았던 특이한 구조의 건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스케치 중에 잠시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남자를 흘겨보았다. 딱히 그에게 흥미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랜 습관이었고, 목적이 있는 행동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는 휴대폰을 보지도, 책을 읽지도, 그렇다고 잠을 자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우연히 눈이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그를 흘겨보았지만 여전히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스케치를 하던 손이 잠시 멈추었지만, 이러한 행동이 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케치를 재개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 꿈 속에서 보았던 그 건축물의 모습이 눈 앞에서 아른거리지 않았다. 왜 이 남자가 나를 보고 있는지에 대해 자신에게 되물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난 추리력이 그렇게 좋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리 오랜 시간을 생각해 보아도 아무런 답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교수님께 메일이 왔습니다. 아마도 1시간 정도 걸리실 것 같다고 하십니다. 혹시 다른 용무가 있으시다면 잠시 다녀오셔도 괜찮으실 것 같은데요? 돌아오신 뒤에는 오늘 오후 9시까진 여기에 계신다고 하시네요. 원하신다면 여기에서 계속 기다리셔도 되는데, 제가 조금 급한 일이 있어서 실험실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 냉장고에서 원하는 음료수를 꺼내 먹어도 괜찮다고 하시니 필요하시면 마음데로 꺼내 드셔도 괜찮습니다. 혹시 급한 일이라도 생기시면 실험실은 바로 맞은편이니 찾아와 주세요. 그럼.”

조교는 필요한 말을 쏟아낸 뒤에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나와 나를 쳐다보는 수상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난 이런 거북한 환경에서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확인을 해야만 했다. 때문에 나는 세번째로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침내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이 한 마디는 내가 꽤 오랜 시간동안 신중하게 고른 단어만을 연결시킨 것이었다.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에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가 그저 내가 앞에 앉아 있다는 것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난 최대한 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단어들을 조합하여 내보내어 그의 반응을 살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저기, 그게, , 죄송합니다.”

?”

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에게 무언가 실수할 것일 수도 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사과를 드리고 싶네요. 방금 전부터 저를 보고 계시길래 혹시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가 싶어서 물어본 겁니다. 아무래도 제 착각이었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난 빠르게 사과했다. 문제를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처음부터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집중하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을 걸기가 좀 그래서.”

그는 말을 흐렸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처음부터 나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잠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는 나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오늘 그를 처음 보았다. 그는 나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나 역시 그에게 감사를 받거나 사과를 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나에게 피해를 입혔거나,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사건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그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내가 누군가를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은 꽤나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에게 질문을 하기로 결정했다.

죄송하게도 제가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 저희가 언제 만났었죠?”

그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희던 얼굴이 약간 붉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이라고 느껴질 수준의 시간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그 시간동안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미 이야기는 너무 많이 진행되어 버렸기 때문에 난 더 이상 이 대화를 끊을 수 없었다. 난 그가 착각이었네요라는 말을 하거나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라는 말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해 준다면 이 대화는 단순한 착각에서 시작된 대화로 끝이 날 것이고, 그렇다면 난 아무런 문제없이 내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대화는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성적 때문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나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적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낮아서 오신 것 맞지요? 아마도 원래는 AA+를 예상하셨을 텐데. 그렇죠?”

순간 동공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하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성적에 관련해서 교수님을 방문한 사람의 목적은 거의 비슷하다. 누구나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맞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성적과 제 성적이 바뀌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과를 드린 거예요. 고생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사과한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해되자 마자 몇 가지의 의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난 그 의문을 가만히 진정시킬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잠시만요. 그런데, 그건 당신이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걸 사과해야 할 사람은 교수님이나 조교 분이지, 당신도 피해자 인건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그것보다, 당신의 성적이 제 성적과 바뀐 건 어떻게 알았지요? 교수님께 메일이라도 받으셨나요? 전 못 받았는데.”

아니요, 아니요, 교수님께 메일을 받은 건 아니고요. 그냥, 성적이 너무 높으니까 누군가와 성적이 바뀐 게 분명하니까요. 그리고 그냥 우연히 당신이 같은 이유로 여기에 온 걸 알았으니까 추측한 거예요.”

그의 대답은 내 의문을 해소해 주기는 커녕, 반대로 더 많은 의문을 낳을 뿐이었다.

성적이 높은 게 의심스러워서 왔다고요? 왜요? 아니 그것보다도, 어떻게 성적이 바뀌었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전 당신과 대화하기 전까지는 성적이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그냥 교수님이 채점을 실수하거나, 계산을 실수하거나 뭐 그런 걸 생각했을 뿐 이었고요.”

아니, , 그러니까.”

문뜩 내가 너무 공격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았다. 약간 붉게 물든 그의 얼굴과 식은 땀, 그리고 당황스러운 표정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약간의 죄책감이 밀려왔다.

,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너무 흥분했던 것 같네요. , 이해가 안되는 게 있으면 이해가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거든요. 안 좋은 습관인데. 교수님께서 오시면 알게 될 일인데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 뭘 좀 마시는 게 어때요? 탄산은 드시나요?”

그는 몸을 약간 움츠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음료수를 마셨다. 머리 속이 약간 복잡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성적과 내 성적이 바뀌었는지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어차피 교수님이 오면 알게 될 일이었기에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조금 전에 하다 말았던 스케치를 들여 보면서 그 건물의 생김새를 다시 기억해 내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 그가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가능한 모든 해답을 머리속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한 의문을 순식간에 주워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도 답답했다. 앞으로 45분이라는 기나긴 시간동안 이 의문과 싸워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다. 너무나도 다행스럽게도, 그 고문은 그렇게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정말 궁금하세요?”

그의 물음은 너무나도 반가웠다. 세간의 표현을 잠시 빌리자면, 마치 수 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솔직히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순간 미소가 튀어나왔지만 자연스럽게 입에 손을 가져다 대어 그것을 감추었다. 그리고 일부러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 뭐가 말입니까?”

이 말을 내뱉은 뒤에 나는 잠시 후회했다. 혹시라도 소심한 그가 내 대답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얼버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제가 어떻게 당신의 성적과 제 성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하시지 않았나요? 원하신다면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믿으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이 없는 듯 끝을 흐렸다. 물론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난 그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준 적은 없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인 거예요. 들려주려고 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물어 본 사람도 없었고요. 그냥 최근 들어서 한번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우연히 당신을 만나게 된 것뿐이니까요. 어쩌면 저에겐 우연이 아닐 수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