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면서도 어둑칙칙한 벽장식과 카페트. 그 복도를 따라 서있는 동상과 장식품들. 검정색과 하얀색 계열의 색상으로 디자인된 귀품있는 옷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그곳을 뚜벅뚜벅 걸어왔다. 마침내 저 너머에 보이는 검붉은 계열의 옷을 입은 악마. 왕좌에 턱을 괴고 앉은 그 남자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마왕이었다.
 
"아버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주변 사람들을 몇명만 남겨두고 다 잘라버리라니..."
"그만 하거라."
"이렇게 한꺼번에 다 자르게 되면 백성들의 의심만 더 커진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그만 하라고 했잖느냐."
"그리고, 이건 또 뭡니까? 성을 통째로 옮겨버리다니 이게..."
"그만 하라 하지 않았느냐!"
 
마왕이 왕자를 향해 신경질스럽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근심과 분노가 섞여있었다.
 
"아버님, 이게 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성을 통째로 옮기시다니! 설마 아직도 그 예언자의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시겠죠?"
"맞다. 맞으니까 제발 그만 좀 해라!!"
"아버님, 예언자의 말을 함부로 믿으면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언자의 말만 좇다가 다른 가능성들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다 전멸하게 될 거라고요! 그런데도 아직도 그 예언자의 말을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왕자가 마왕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 비친 마왕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마왕이 한참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조심히 말을 열었다.
 
"예리우스 하네언. 슬레이어 왕국의 변두리 시골마을 출신의 예언자. 예리우스는 그의 부모님이 좋은 예언가가 되라고 붙인 이름이지. 지금 따지고 보면 그 소망이 적중한 거겠지만. 아무튼,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0년 전에,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평범한 생활을 살아가다가, 자기가 예감한 일이 계속 맞아 떨어지자 주변의 총애를 얻고 그 마을에서 유명해졌다. 이후 그 명성을 찾아 만나러온 슬레이어 왕국의 촌장이 그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지. 그런데 촌장이 생각하기에도 그의 말이 너무 착착 맞아들어가는 거야. 그래서 그걸 왕에게 보고했더니 국왕이..."
"아, 그 지루한 레퍼토리는 그만 하시고, 성은 대체 왜 옮기신 거에요? 설마 그 '혁명과 부흥이 교차하여...' 뭐시기하는 거 때문에 옮겨버리신 거냐고요? 그 예리우스인가 예리한인가 하는 사람 말이 신통한 건 인정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설마 다른 예언이 있다는 거에요?  아니면..."
"......그렇다."
 
마왕이 기운없는 말투로 인정했다. 왕자는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왕에게 대들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자신조차도 전혀 모르는 일이라니. 왕자는 약간 짜증났지만 호기심이 생겨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공주를 납치하고 몇 년 뒤에, 내가 예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마법으로 내 분신을 만들어 예리우스를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잘 변장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예리우스는 역시나 나를 알아보았지. 그래도 공격을 하지는 않더라고.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 나라가 어떻게 하면 슬레이어 왕국을 막을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랬더니 예리우스가 이런 말을 하더군. '공주를 납치하고 10년이 지난 해까지는 잘 버티실 수 있으시겠지만은, 그 뒤로는 만만치 않은 적수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리우스에게 그 적이 누구인가를 물어보았다. 혁명과 부흥 뭐시기는 됐으니까 더 자세한 것을 달라고.
예리우스는 그게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한 거라 하더라고. 그래서 몇 번을 설득한 끝에 얻어낸 게 이 두루마리다. 나는 이걸 얻고 진짜냐고 물어봤다. 예리우스는 곧 다른 손님들이 올 것이니 여기서 열지 말고 마왕국에서 그 두루마리를 열어보라고 조언했었지.
나는 그 말을 따라 내 나라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걸 열어보았고, 나는 그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어봐라. 이 두루마리다."
 
마왕이 자신의 왕좌 아래쪽에 감쳐둔 두루마리를 꺼내 왕자에게 던졌다. 왕자는 그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읽어보자 왕자도 마왕의 행동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공주가 납치되고 약 십 년 후, 마왕의 대항마가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천재적인 언변과 지략으로 계획을 구상하며, 검 하나로 무쇠를 완벽하게 두동강 내는 자들이다.
이 자들 외에도 대항마들은 더 있을 것인데, 그대들은 그들을 쉽게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두루마리를 첫번째로 펼친 그곳에서부터 그자들이 본격적으로 반역의 날개를 펼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위치가 어디입니까? 어딘데 이러시는 겁니까?"
"내가 그때 머리에 온갖 생각이 가득했지만, 내가 그 위치만큼은 정확히 기억한다. 그곳은 바로 비서실 건물. 그러니까 우리 마왕국 최대의 비서실 건물에서부터 우리들의 대항마가 활동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설마..."
"그래. 그 대항마라는 자들이 비서실 건물에서 뭔가를 할까봐 그곳 사람들을 다 해고시키고 흩어지게 만든 거지. 그들이 천재적인 언변으로 그들을 홀린다거나 하면 이쪽에서 무척 곤란해지니까."
 
마왕이 말을 마치자 왕자의 손이 충격으로 약간씩 떨리더니 두루마리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왕자의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보았고, 어떤 사건을 떠올렸다. 그 기억과 두루마리의 내용이 맞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저, 사실 이 자들은... 이미 활동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이느냐?"
"네. 정말입니다.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비서실 건물을 막아놓은 철문에 큰 구멍이 생겼답니다. 이게 너무 반듯하게 잘려져 있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게 설마..."
"맙소사, 이 예언이 이미 실행되고 있었다니. 말도 안돼..."
 
마왕이 영혼이 나간 표정을 짓더니 신경질을 내며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애꿎은 동상에 화풀이를 하고 나니 분이 어느정도 진정되었다. 머리카락은 뽑히지 않았지만 뭔가 더 중요한게 뽑힌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