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 우주정거장에서 책을 읽으며 내 머리 위에 있는 지구를 보는 것은 언제나 한결 같이 아름답다.

푸른 바다, 녹색의 숲, 흰색 구름, 우리를 방사선 속에서 정말 막아주었는지 의문이 갈 정도로 얇고 검푸른 지구 대기, 그리고 멀리서보면 그저 경이롭기만한 태풍의 눈까지 지구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여기선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로 느껴진다.

내가 정말 저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도 잘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1988년 처음으로 우주로 나가기 전 먼저 갔다온 선배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우주에서 지구를 10초만 봐바, 그러면 자연스럽게 신을 믿게 될 거야 그렇게나 아름다운 것이 자연적으로 생겨났다고 하기에는 믿기지가 않거든"

 

애초에 그 선배가 그리스 정교회 출신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지만 다시보니 이제는 확실히 수긍이 간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세계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리가 없다.

예전에 미르에서 처음으로 지구를 보았을 때의 미국인의 표정은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후에 들려오는 풍문으로는 환경운동가가 됐다나 뭐라나

 

'우주비행사'란 냉철한 판단을 중시여기고 그에 맞춰 감수성을 배제하는 훈련을 받아 오로지 합리적 판단만을 하는 마음 없는 기계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 기계 같은 이들에게 지구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우주비행임무에는 너무나도 먼 것이고 오히려 그들에게 지구란 우주 속 작고 푸른 먼지에 대해 냉정하게 분석하고 계산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냉철한 성격의 우주비행사도 한 순간에 환경운동가로 바꾸는 지구를 보면 도대체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가,

그 어떤 뛰어난 문학가라도 지구가 가진 아름다움을 인간의 어휘로는 절대로 표현 할 수 없을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크리카레프, 아무리 지금 지상 상황이 개판이라 체류가 연장 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쉬기만 할꺼야? 얼른 회수 캡슐 운반하는거나 도와"

"예예 관제소 아저씨"

 

사실 나는 진작 지구로 귀환 할 예정이었다. 

90년대에 들어 여러 악조건 때문에 소련의 경제사정이 나빠져 혹시나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예정된 기한에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믿고있었다.

 

미친 KGB 보수파 꼴통들이 땅크를 타고 모스크바로 쳐들어오기 전까진......

애당초 지상과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있어 가끔 전파가 닿는 TV와 라디오가 전부라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TV에서는 8월 중순에 보수파 녀석들이 크림 반도에서 휴양하는 고르바초프를 감금시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나

안 그래도 동서독 통일 이후로 숨이 끊겨가던 소련인데 이젠 어떻게 될지도 가늠이 안간다. '이때다!'하고 미국이 쳐들어오기라도 할러나

 

 "야 프로그레스로 가는 길은 그쪽이 아니야 또 멍때려?"

 

미루에서 나와 함께 체류 중이던 아르체바스키가 마치 스파이더맨 처럼 거꾸로 매달린 채로 멍 때리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아르체바스키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인 것에 반해 조부모가 머나먼 극동의 반도출신이라 아직 동양인의 느낌이 조금 남아있는 외모다.

 

"아니 밑에 보이는 푸른 먼지를 보다가 잡생각 좀 하고 있었어"

"지구가 정말 아름답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데, 그래도 우리가 여행온건 아니잖냐"

"그건 그렇지"

 

가끔 이 녀석은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정곡을 찌르는 말을 가끔 한다. 다른 곳은 몰라도 우주비행사라는 직업 한에서는 분하지만 이 녀석은 확실히 모범답안이다.

 

"크리카레프, 너는 이번 보급에 뭐 부탁한 것이라도 있어?"

"있는 것이라곤 밀크티 하나 정도?"

"머그컵도 아닌 밀봉된 봉지에 빨대 꽂아 먹는 밀크티가 뭐가 맛있냐, 취향이 참 독특해"

"외모가 어떻든 결국 본질은 같잖냐"

 

아르체바스키는 '어련하시겠어요' 라는 표정을 하며 먼저 프로그레스로 들어갔다.

일을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창밖을 보니 때 마침 소련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저기서는 지금 거대한 정치적 변혁이 일어나고 있는 반면 미르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들이 전과 변함없이 똑같다. 가끔은 밑에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게 맞는지 의문이 갈 정도다.

 

"크리카레프 여기 밀크티, 자 받아"

"어 고마워"

"나중에 일 끝나면 나도 하나 줘"

"한번 생각해 볼게"

 

아깐 취향이 어쩌니 하더만 결국은 자기도 먹고 싶었구나.

그런데 ……

 

"그런데……. 빨갱이 공학자 녀석들, 이 회수캡슐 정말 선실로 운반 할 수 있게 만든거 맞아?"

"너 지구 보며 멍 때릴 때 관제탑이 말하던데, 회수캡슐의 면적이 도킹포드와 5cm 작다나. 아슬아슬하게 들어간데"

"그럼 다행이고, 빨갱이 공학자 녀석들 효율성 하나만큼은 변태적이단 말이야."

"변태적인건 인정하지 미르의 수명은 넘긴지 벌써 몇 달이 되가는데, 그의 두 배인 10년은 더 사용하겠다니 할 말 다 했지"

 

 

그렇게 보급을 운반하며 실컷 떠들던 중 아니꼬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전해줄까?"

"아 괜찮습니다. 관제소 아저씨, 그나저나 이렇게 말하는걸 보면 또 뭐 할 말이 있는거겠죠?"

"갑자기 왜 존댓말이냐 평소처럼 하자"

"예예"

"하아.. 그래.. 뭐 미르에 TV나 라디오 있어 너희도 대강 지상의 상황을 알긴하지?"

"저는 보긴 보지만 그런 분야는 아르체바스키가 더 잘 알걸요"

"나? 가끔 보긴 하는데 애초에 지구궤도를 선회해서 전파가 잘 안 잡히지 전파 잡는데 노력할 바에 책 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나도 안본지 한 달 가까이 되가"

"그런가? 여기서 그 정치적 변혁이 진행되는 동안 상부에서 너희의 견해를 알고 싶어하던데"

"그런건 설령 알고있다고 해도 당연히 말을 안하죠, 함부로 입 털었다가 시베리아로 갈지도 모르는데"

"하긴 나라도 그렇겠지"

 

 

관제소 마이크 넘어 연필로 무언가를 적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아저씨 성격상 우리를 해코지 할 사람은 아니라, 딱히 두렵진 않았다.

연필로 적는 소리가 끊길 때 쯤 아르체바스키가 반 농담 말투로 관제소에게 물었다.

 

"그 정치적 변혁 하니까 생각났는데 매뉴얼에 보면 우주정거장 승무원은 전쟁이 발생하면 바로 지상으로 귀환하라고 되어있던데, 우리 안내려갑니까? 여기도 슬슬 지겨워지는데"

"거기에 쿠데타가 발생하면 내려가라고 하든?"

"그런 말은 없는데요"

"그럼 계속 있어야지"

 

 

아르체바스키는 짧게 어이가 없단 웃음을 내면서 하던 일을 마저 진행했다.

 

 

"할 말 다 했나요?"

"뭐 하나 더 있긴 하지 몇 주 뒤에 소유즈 하나가 발사될거야"

 

나와 아르체바스키는 동시에 같은 어조로 말했다.

 

""정말?!""

"아 아니 끝까지 들어봐, 소유즈가 발사하는건 맞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너네들은 계속 남아있을꺼야"

 

 

순간 몸이 굳었다. 후에 돌이켜보니 몸이 굳었다기 보다는 머리 회전이 멈춰 몸도 같이 멈춰버렸다는게 맞는 더 맞는 말인 것 같다.

도대체 기껏 유인우주선이 왔는데 내려가질 못한다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정이었을까 지금도 궁금해진다.

 

 

"그럼 우린 도대체 언제쯤에야 내려가는 건데"

"혹시 새롭게 오는 승무원은 있나?"

"승무원도 없어 그냥 프로그래스 보급선 한 대 올라온다고 생각해"

""어이가 없네""

"곧 미르는 북극해를 지나 북캐나다 영공으로 진입한다, 통신은 여기까지. 후에 들려오는 소식이 있으면 다시 알려줄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프로그레스에 달린 창문을 통해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지평선에는 서유럽과 영국의 도시들이 불빛을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지금쯤 그들의 시간으로는 일을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시간이겠지

서서히 멀어져가는 서유럽을 보고 있으니 고독함이 커지는 기분이 들어 이내 창문에 블라인드를 쳤다.

 

 

"가족들이 보고싶냐?"

"안보고싶은 가족이 어디 있겠어"

"하긴"

 

 

회수캡슐을 선내로 욺기는 작업을 마무리 하고 책을 피자 라디오에서는 미국음악이 흘러나왔다.

10월의 하늘을 표현한 음악이라나 4분짜리 짧은 음악이었지만 내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음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