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쌓인 눈을 발로 밟는 게 좋아."

"그래? 난 너를 밟는 게 좋은데."

 

그랬다. 그는 마땅히 그녀를 밟고 싶었다. 그것은 그녀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 사이도 아니었지만 연인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그와 그녀는 그런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모르는.

 

"날 밟으면 아플 거 같은데."

"너야 당연히 아프겠지. 하지만 난 시원할 거야."

"아니, 네가 아플 거라고."

 

그리고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한번에 쫙 펴보였다.

 

"난 고슴도치처럼 등에 가시가 나거든."

 

그는 흥흥, 하면서 그녀와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뭐 이딴 개소리를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었다. 사람이 고슴도치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대화가 되는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예를 들면 상대를 짓밟아 죽여버리고 싶다던지. 흠. 그래. 확실히 정상적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고슴도치면 나는 눈밭을 헤엄치는 고추고래야."

"고추고래는 뭐야? 고추처럼 빨개?"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픽픽 거렸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머리속으로 그녀를 수십번 짓밟는 상상을 했다. 그녀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가시를 세우겠지. 흠? 가시? 어쨌든 그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고추고래는 고추가 큰 고래야. 고추만으로도 바다 위를 헤엄치는 배를 뭉개버리거든."

"그거 멋있네. 그럼 뭐 고추상어도 있어? 막 죠스처럼."

 

그녀는 바나나를 잡는 손 모양새를 하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그는 문득 이 여자와 동화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눈을 너무 많이 밟아서 그런가. 산장은 왜 이리 안 나와? 아니, 여기가 산은 맞는 건가? 그는 말했다.

 

"고추상어는 없을껄. 애초에 고래가 크기가 더 크니까 고추도 더 크겠지."

"그건 모르는 소리야. 그렇게 따지면 사람보다 큰 동물은 다 사람보다 고추가 커야겠네?"

"그럼 너는 알아? 고추 크기를 아냐고."

 

그녀는 벙어리 장갑을 낀 손으로 눈덩이를 만들어 허공에 던졌다. 뭐야. 저러면 눈을 맞은 나무가 아파하잖아. 하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아직 그녀가 말하지 않았다. 매너있는 남자로군. 역시 나야.

 

"글쎄. 하지만 네 고추 크기는 알아."

"나도 네 가슴 크기는 알아."

"그것 참 대단한걸."

 

그와 그녀는 거기에서 더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눈바람이 더 거세졌기 때문이었다. 눈을 정면으로 맞는 얼굴 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차라리 눈 대신 식칼이 날아다니는 게 더 낫겠군. 그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고슴도치처럼 굴러가면 더 힘들까?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더 생각하지 않을 것만 같아서.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 흠. 그건 그만이 알겠지.

 

"그나저나, 산장은 언제 나오는거야?"

"나도 몰라. 네가 모르니 나도 모르지."

"그게 말이 돼? 내가 몰라도 넌 알 수도 있는 거지."

"그건 그렇지만, 난 네가 가는 대로 따라갈 뿐이야. 애초에 난 이 산이 처음이라고."

"나도 마찬가지야. 애초에 여행을 아는 곳으로 가는 놈이 어딨냐?"

"이건 여행이 아니라 혹한기 훈련이 아닐까?"

 

그는 따끔하게 자란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녀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서 연기가 나오는데?"

"그럼 산장이지. 얼른 가야겠는걸."

 

그리고 그는 뛰었다. 남은 체력을 다 소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녀도 같이 뛰었다. 그녀는 대책 없이 뛰면서도 그를 앞지르지 못했다. 그렇게 숨이 거칠어질 때 즈음 도착한 산장 문을 그가 두드렸다. 한 남자가 문을 열었다.

 

"누구쇼?"

"여행자인데, 좀 들어갑시다."

"흠. 혼자 온 모양이군."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어떤 여성과 같이 왔습니다."

"그럴리가. 발자국은 하나인데."

 

하지만 그는 끝까지 우겼다. 거 참 웃기는 청년이로군. 남자는 그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소리요. 내 산 입구부터 여기까지 여자랑 같이 왔는데. 당신 눈에서는 이 여자가 안 보인다는 말이요?"

 

그리고 그는 겉옷 안에 손을 넣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내가 잘못 생각했네. 여자와 같이 왔구만. 요즘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눈이 좀 침침해."

"알겠으면 이제 비켜주시오. 눈 때문에 앞마저 보이지 않을 지경이구만."

 

남자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눈보라 속에 서있는 그처럼 겉옷 안에 손을 넣었다.

 

"기다려보시오. 바로 들어가면 너무 더워서 몸이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으니 이걸 먼저 품 속에 넣고 가시오."

"뭔데 말입니까?"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품 속에 있는 총으로 그를 쐈다. 탕. 으악. 아프다. 그는 가슴팍에 총알을 맞고 눈밭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 역시 쓰러졌다. 엥? 총알 하나로 두 명이 쓰러지다니. 이거 완전 더블킬이잖아? 그는 껄껄 거리며 소리쳤다.

 

"자네는 참 총을 잘 쏘는군!"

"너 때문에 나도 맞았잖아!"

 

그녀는 소리쳤지만 그는 소리치지 않았다. 역시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군. 그나저나 총알이 좀 아플텐데. 남자는 콜트 1911을 품 속에 간직하듯 넣고는 말 한마디와 함께 산장 문을 닫아버렸다.

 

"여긴 남자 전용이오. 혼성 산장은 더 위로 올라가외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가슴팍에 흐르는 피를 빨며 말했다.

 

"맞구만! 맞아! 여긴 남성 전용이구만! 덕분에 따뜻하게 갑니다!"

 

그리고 그는 눈밭에 쓰러졌다. 그녀도 옆에 같이 쓰러졌다. 하지만 발자국은 하나였고 그녀도 살아있었다. 근데 이것도 살아있다고 봐야하나? 흠. 살아있는 거겠지. 아마도. 뭐 살아있다면야, 목숨만 붙어있어도 귀중한 삶일 텐데. 그래도 그는 피를 빨며 조금씩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추고래가 되는 상상을 하며 피 빨기를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