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 비트립 폰 하인리히?! 그렇다는 건 설마..."
"그래. 빌리우스 군대의 공격으로 사망한 슬레이어 왕국의 대 학자 베르너 폰 하인리히의 딸이다."
 
앞에 앉은 여자가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그에 반해 나는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아 자꾸 말을 더듬었다. 그걸 보고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너도 플라즈마 커터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뭐 이런 걸 갖고 놀라냐. 나는 그때 빨리 진정됐는데."
"그거는 이거랑 다르잖아요! 그리고 이 짝퉁 검이 플라즈마 커터라는 건 저도 몰랐다고요!"
"미안, 미안."
 
그 뒤로도 대화가 계속 오갔으나 내가 흥분상태에 있어 대화가 평탄히 진행되지는 않았다. 내 속의 놀람상태가 겨우 진정된 후, 그 비트립이라는 여자가 말했다.
 
"이제야 진정됐냐?"
"네.."
"자, 여기 갑자기 끌려왔으니 뭐가 뭔지도 모르겠지? 지금부터 하나씩 질문해봐라. 아, 나를 부를 때는 그냥 비트립 단장님 아니면 비트립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비트립 씨라고 불러도 되고."
 
갑자기 끌려왔다는 말을 듣고 다시 억울함이 몰려왔으나 여기가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일단 질문부터 하기로 했다. 일단 모르는 것부터 질문해보자.
 
"악마라는 건 어떤 종족이죠?"
비트립 단장님이 잠시 생각하더니 어지럽게 널브러진 책상에서 종이와 펜을 가져오며 말했다.
"악마 종족은 일단 대악마가 다른 악마들을 다스리고 있는 하나의 국가야. 대악마는 왕, 다른 악마들은 국민들이라고 보면 편해. 그리고 기본적으로 평등사회고, 평균 수명은 68세. 그리고 교육체계가..."
비트립 단장님이 종이에 동그라미와 선을 계속 만들었다.
"악마가 제 역할을 하려면 일단 우리나라의 학교같은 교육시스템을 거쳐야해. 먼저, 악마들은 7살에 기초학교에 가. 거기서 모든 악마들이 알아야 할 것들, 그러니까 자연지리, 기본 요리법, 기본 응급처치, 기본 공격술같은 걸 배워. 그러다가 12살이 되면 기초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적성을 찾아 원하는 학교로 가지."
비트립 단장님이 종이에 글자들을 계속 끄적였다.
"의사가 되고 싶으면 의료학교, 교사가 되고 싶으면 교육학교, 그 외에도 식당과 여관 운영, 건물 건설 등이 있어."
비트립 단장님이 마지막으로 종이에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행동학교야. 여기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악한 악마를 양성하는 곳이지. 그래서 여기에 애들이 가장 많이 들어가."
 
비트립 단장님이 설명을 막힘없이 늘어놓았다. 복잡해서 머리에 잘 안 들어왔다.
 
"... 그래서 우리가 공격해야 하는 악마는 이곳 출신들이란 소리다."
"그.. 복잡한데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냥 하나 써줄게. 너 조금만 더 들으면 기절할 것 같으니까."
 
마음속으로 약간 뜨끔했다. 그래도 뭐, 잘 된 거겠지.
 
"그러면 다음 질문. 그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가나요?"
"거기에 들어가는 방법은 딱 하나야. 그래서 그곳을 입구라고 부르지. 공주가 납치되기 전에는 친선협약을 맺어서 그쪽을 통해 관광도 갔었어.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입구시장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보통 크림시장이라고 불러. 거기서 파는 크림빵이 아주 맛있거든. 크림빵이 여러 맛이 있었는데 나는 밤 맛이 맛있더라. 아, 또 먹고싶다."
 
뭔가 핵심에서 벗어난 게 느껴졌다. 비트립 단장님도 그걸 자각하고는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이건 설명하기 복잡하니까 그냥 너한테 지도 줄게. 그거 보면서 가면 되니까."
 
비트립 단장님이 책이 어지럽게 꽂혀있는 책장에서 팜플렛을 꺼냈다. 자세히 보니 관광지도였다.
 
"이거 참고하면 될거야. 아, 나는 많으니까 걱정하지 마. 크림빵 먹으러 많이도 갔거든."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나저나 크림빵 되게 좋아하시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만약 제가 이 병단에 들어오면, 저는 이제 뭘 하면 되나요?"
 
비트립 단장님이 미안한 듯이 약간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게.. 일단은 팀원을 좀 구해야 돼. 지금 너랑 나 포함해서 3명밖에 없으니까."
 
예상은 했지만 딱하다. 역시 마이너 병단이다. 돌아갈까.
 
"그러니까 지금 너라도 영입해야 돼. 팀원이 많이 모자라거든. 그 플라즈마 커터도 무상으로 수리해줄테니까 좀 들어와주라."
 
 
결국 플라즈마 커터를 수리해준다는 말에 혹해서 들어가게 되었다. 덤으로 이 검 모양의 고철덩어리, 그러니까 플라즈마 커터에 대한 설명도 듣게 되었다. 플라즈마 커터는 처음에 나왔을 때는 공업용 절단기였는데, 나중에는 이 검의 형태로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플라즈마 커터는 견고한 무쇠덩어리도 아주 잘 자른단다. 그리 정밀하진 않지만.
 
"자, 그러면 이름 좀 알러줘. 명단에 넣어야지."
"이름은 루티온이고 성은 레나이스. 합쳐서 루티온 레나이스에요. 가운데 이름은 없고요."
"루티온 레나이스... 됐다!"
비트립 단장님이 오른손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받아들였다. 드디어 정식으로 병단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면 내일 오후 2시에 슬레이어 탑에서 정모다!"
 
*
 
슬레이어 탑. 우리 슬레이어 왕국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자 가장 높은 탑으로, 나무와 풀들이 잘 조성되어있는 중앙광장의 한가운데에 있어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 및 휴가지 2위를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 탑 안에는 별 건 없고 꼭대기층 전망대와 벽을 따라 둥글게 나있는 계단 하나와 바깥에서 볼 수 있는 큰 시계 하나가 끝이다.
 
슬레이어 탑 근처에는 공주를 납치한 대악마를 타도하고자 기념비를 세워놨는데, 지금은 죽었지만 당시에 가장 유명했다는 예언자의 예언이 새겨져있다.
 
혁명과 부흥이 교차하여 만나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자들이 나타나면
불의가 타도되기 시작하고 정의가 세워지리라
 
이런 예언을 대악마를 무찌르겠답시고 새겨놨는데 나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사실 애초에 믿지를 않는다. 예언은 대부분 두루뭉술하고 사건이 발생하면 끼워맞추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예를 들자면, 저 혁명이 기술적 혁명이든 정치적 혁명이든 과학적 혁명이든 뭐든 간에 끼워맞추면 되는 거다. 그리고 부흥도 문화적 부흥이든 경제적 부흥이든 끼워맞추면 되는 거니까.
 
불쌍하게도 저것 때문에 왕실에서 직접 경제와 문화 등을 살리겠답시고 애쓰고 있다. 출판, 음악, 천문학, 은행 시스템도 덕분에 좋아졌긴 했지만 불의는 아직 타도되지 않았으니까 이제 뭘 끼워맞추려나.
 
그나저나 오늘 정모한다면서 대체 언제 오는거야. 슬레이어 탑을 보니까 벌써 15분이나 지났는데, 빨리 좀 와라. 그나저나 왜 등 뒤가 싸해지냐...
 
"루티온!!"
"크헑..."
누군가가 내 뒤에서 전속력으로 달려와 어깨위로 아주 세차게 백허그를 시전했다. 충격이 커서 하마타면 넘어질 뻔 했다. 이 사람은 이게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는거냐. 그나저나 이 목소리에 나랑 비슷한 정도의 키라면 설마...
 
"아, 미안. 깜짝 놀랐지? 얘가 너 놀래켜주고 싶대서."
"아, 그건 그렇고 얘는 뭐에요?"
"우리 단원이 너랑 나 포함해서 3명밖에 없다 그랬지? 얘가 그 나머지 한 명이다. 인사해라. 네 첫번째 파트너, '산체 루보'다. 너처럼 가운데 이름은 없고 15살이다. 여자지만 잘 부탁한다?"
 
내 예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내 베스트 프렌드이자 여자 사람 친구, '산체 루보'다. 얘가 첫번째 멤버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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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이 나온 뒤이지만 하나 추가하는데 '산체 루보'의 본명은 '산체 레보'입니다. '루보'는 산체 레보가 이 이름이 예쁘다며 자신을 루보라고 불러달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단장님이 산체 루보라고 부른겁니다. 같은 이유로 루티온도 루보라고 불러줍니다.
 
소설을 쓰기 전에 설정한 거였는데 퇴고할 때 뭔가 이상하더니만 이게 빠져있었네요. (이 설명글 쓸때도 자꾸 헷갈리네요. 그래서 자꾸 수정하다가 조회수가 껑충 뛰어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