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있을, 그 무언가가 결핍된 삶이 썩 유쾌하다고만 할 순 없겠지. 그래도 행복했던 기억이 그늘진 삶의 굴곡을 비추어 주기에 내가 지나온 삶을 반추하면서 살며시 웃을 수 있었던거 같다.

언제나 도망치는 삶을 살았다. 어디서든지

집이든, 학교든, 공부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든

도망치는 거야 말로 가장 훌륭한 삶의 방법이라 생각했으니까

더이상 도망칠 수 없는 곳으로 몰릴꺼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적 없었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생각이 오늘날, 궁지에 몰린 내가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 돌파구를 찾아 죽음이란 것에 기대보려고 한다.

지금 이 선택을 생각해보노라면, 결국은 마지막까지 도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결국, 남들은 고달픈 삶 앞에서, 두 다리로 서서 버티는 쪽을 선택하니까

나는, 그들과 다르게 결국은 삶이란 공포 속에서 또 다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금 살아보겠노라 항상 명심하고 맹세하지만 지금은 이 감정의 파노라마가 더이상 날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떨땐 너무 행복해서 미칠꺼 같고 어떨땐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슴이 찢어져서 뇌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주어서, 내가 살기를 바란다는 것 조차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래서, 나 스스로가 그 사람들에게 있어선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좌절감과 고통을 지울 수는 없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제 각각 본성에 선함을 가지고 있고, 나 또한 그러겠지만 나는 그 본성에 잠식되어 누군가를 너무나도 사랑했음으로 인해 이토록 비참하고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타인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게 보일 수 있겠다만, 나 스스로의 감정과 생각이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처량하게 만든다.

한심하고, 보잘것 없이 누군가를 책임질 수 도 없는 그런 비참한 사람

부모님이, 이런 자기 파괴적이고 죽음으로 달려가기만을 바라는 아들이 얼마나 멍청하고 가엾게 느껴질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사실 일 곱살때부터, 나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들은 너무 쉽게 현실에 타협하고, 서로에게 공감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그런 반동으로, 나만큼은 감정에 솔직하고 누군가에게 충분히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랬다.

준비되지 않은 솔직함과 헌신은, 신뢰의 부재를 낳았고

신뢰의 부재는 사랑의 떠나감을 의미했다.

갈 데 잃은 헌신은 공허함만이 남아서 내 맘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다.

더이상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신뢰와 믿음이 담기지 않게 되었고

내 행동 하나 하나조차 아무런 의미없는 그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그 사람도 결국엔 다른 사람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됬고,
그 생각이 든 나, 자신을 용서할 수 가없다.

그 사람의 빈 자리, 그 사람과의 관계를 다른 대상에게서 갈구하는 내 행동 자체도 역겹고 또 역겨울뿐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죽기를 결심했다. 예전에 내렸던 결심을 지금까지 미루는데에

내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정성이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랑과 고마움을 전한다.

내가 떠나고 없을때에도, 내가 잊혀져 그들이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될때에도

그들이 언제나 사랑으로 충만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들을 위해

건배, 건배, 건배

너희의 삶에 건배

갑수씨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20층 옥상에 올라서서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도심을 바라봤다.

휘황찬란하게 어둠이 내려 앉은 도심을 밝히는 네온사인 무리의 밝음은, 현대의 찬란함을 보여주었고

그 거리를 홀로 다니는 사람들의 쓸쓸함을 비추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겠노라 했을때, 방조죄로 자신을 엮지 말라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수씨는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대지를 향해 날아올랐다.

한 마리 새가 되어, 숨겨진 날개를 펼치고 어두운 대기를 갈랐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