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로 떠날 채비를 했다. 바텐더는 짐을 싸는 나를 그저 잠자코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짐을 다 챙기고는 그동안 고마웠다고 바텐더에게 말했다. 바텐더는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은 모양이네요.」

  「네, 굉장히 오래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죠. 지금이 그 때인 모양이에요.」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무슨 말이에요?」

  「예수가 자기 앞에 다가올 시련을 알고 나서 자기 아버지에게 한 말이죠. 해야 할 일이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게 해달라고.」

  「돌려 말하지 마요. 지금은 머리가 돌아가질 않아서 이해를 못하겠어요.」

  「남편이 빗속에서 벌거벗고 한참동안 울부짖다가 온 적이 있었다고 했죠?」

  「그랬었죠. 그게 왜요?」

  「그 때의 예수랑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자기가 견뎌야 할 운명 앞에 놓여 졌을 때의 그런 심정.」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결국 모든 건 진행되기 마련이고요.」

바텐더는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나에게 말했다.

  「남편한테 갈 거죠?」

  「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는 법은 알아요?」

  「아니요. 그래도 찾아야 해요.」

  「내가 데려다 줄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바텐더는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문이 열리면서 옷을 갈아입은 바텐더가 나타났다. 바텐더는 하얀색 연미복에, 토끼 머리띠를 쓰고, 회중시계를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방에서 나왔다.

  「어서 가요. 빨리 빨리. 오늘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바텐더는 서울로 가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이 쪽 방향이 아니지 않나요, 라고 묻자 바텐더는 고개를 저었다.

  「남편은 거기에 없어요. 남편이 있는 곳은 이쪽이죠.」

   바텐더는 묵묵히 차를 몰았다. 차는 산 능선을 따라서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깊이 들어가자 도로 옆으로 흐르는 강이 나타났다. 자동차는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점점 더 가속도를 붙이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도로였지만, 달빛이 밝아서 라이트를 켜지 않아도 앞이 환하게 보일 정도였다. 별들은 달빛에 가려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칠흑처럼 검었고, 하늘에는 오로지 달 뿐이었다. 한참을 올라가다보니, 둥그런 호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호수 한 가운데에는 물에 비친 보름달이 하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하게 달빛을 내뿜었다.

  「당신이 오기 전부터 당신이 올 걸 알았다고 했던 거, 기억해요?」바텐더는 나에게 말했다.

  「내가 놀라니까 농담이라고 말했던 것까지 기억해요.」

  「그 때는 미안했어요. 사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었는데.」바텐더는 서글픈 미소를 조용히 얼굴 위로 떠올렸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서 지금까지 이 곳에 있었어요.」그렇게 말하곤 바텐더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보름달은 예로부터 광기의 상징이었어요. 광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요.」

   바텐더는 그렇게 말하곤 핸들을 오른쪽으로 확 꺾었다. 차는 가드레일을 뚫고, 붕 날아서 호수를 향해 추락해갔다. 바텐더는 그 와중에도 덤덤히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녕, 나의 앨리스.」

   차는 어느새 수면에 거의 다 닿아갔다. 눈앞에는 수면에 비친 보름달이 바로 가까이에 와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런 소리도, 어딘가에 부딪치는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어딘가에, 조용한 객석에 홀로 앉아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주변은 온통 새까맸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대 조명 밑에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물속에서 위를 보았을 때처럼 천장을 찰랑거렸고, 그 위에는 보름달이 아주 가까이다가와 둥실 떠 있었다. 나는 올렸던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눈앞에 사슬에 팔과 다리가 묶여있는 채로 공중에 매달려있는 남편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남편의 앞에는 동물의 탈을 쓴 세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네 명 모두 옷은 입고 있지 않았다. 동물의 탈을 쓴 사람들은 각자 닭, 말, 사자의 탈을 쓰고 있었다. 그 탈은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탈 같이 보이지 않았다. 윤기 있고, 생동감 넘쳐보였다. 신체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들은 두 팔을 하늘로 올리고, 고개를 하늘로 높이 치켜 올리며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소리는 모든 방향에서 쩌렁쩌렁 울려퍼지며 들려왔다.

  「드디어 운명은 여기까지 도달했도다!」 닭이 말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 때를 불러왔도다!」 말이 말했다.

  「의지의 흐름은 여기에서 멈추노라!」 사자가 말했다.

  「결국 여기로 오게 되었구나.」 남편은 나를 보며 말했다.

  「여기는 어디야?」

  「나도 몰라. 하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고, 지금은 우리를 위해 준비된 곳이지.」

  「그래, 이유야 어찌되었든 나는 네 앞에 있고, 너는 내 앞에 있지.」

   하늘에 있는 보름달이 입을 벌리듯 갈라졌고, 그 틈에서는 잘 다듬어진 단도가 나와 서서히 아래로, 동일한 속도로 떨어져내렸다.그리고 내 앞에서 멈춰서는, 그대로 떠 있었다.

  「잡아라.」 닭이 말했다.

  「이제 이 자의 운명은 너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말이 말했다.

  「너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 사자가 말했다.

  「이게 정해진 결말이야?」 나는 물었다.

  「응.」 남편은 체념한 듯 말했다.

  「이걸로 만족해?」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다른 결말은 생각할 수 없어.」

  「이걸 내가 피한다면 어떻게 되는데?」

  「나는 알 수 없어. 네가 볼 수 있었던 건 여기까지야. 너가 그 칼을 쥐고, 내 앞에 서 있는 것까지야.」

  「운명은 이 자에게서 떠나갔다!」 닭이 말했다.

  「시간은 이 자에게서 의미를 앗아갔다!」 말이 말했다.

  「의지는 이 자를 더 이상 이끌지 않을 것이다!」 사자가 말했다.

  「너가 살아가는 건 항상 이런 식이었구나.」

  「이런 식 뿐이었지. 좋고 나쁘고도 없어. 비교할 수 있는 다른 게 없었으니까.」

  「나는 너랑 살고 싶어.」

  「나도 그래.」

  「그렇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겠지.」

  「이 자는 흔들리다가 끝내 뿌리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닭이 말했다.

  「이 자는 노쇠해 갈 것이며, 무력해질 것이다.」 말이 말했다.

  「그리고 어떠한 광명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깊어지는 어둠만이 기다릴 것이다.」 사자가 말했다.

  「그래도 피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언가 있기야 하겠지.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방황이야. 제자리걸음이야.」

  「그런 건 어떻게 생각해?」

  「두려워, 무서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잖아.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 둘이서 만들어가자.」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건 상처뿐이야. 어태 그랬잖아.」

  「꼭 그렇지만은 않아.」 나는 거기에 힘을 주어 말했다.

  「다행이네.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어.」

  「나는 너에게 나를 던진 걸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일 뿐일까?」

  「알 수 없어. 이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의 내가 아니게 될 테니까. 평범의 바다가 내 앞에 있어. 깊고 어두워. 늪같이 끈적해.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다들 신기하지. 저렇게 무서운 곳에 어떻게 있는 걸까? 거기에서 무엇으로 살아가는 걸까?」

  「거기에도 나름의 무언가가 있으니까.」

  「너는 그걸 찾았니?」

  「아니. 나는 이미 너의 빛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

  「그럼 너도 알겠구나. 그 광명에서 멀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응. 너무나.」

  「선택은 너의 몫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선택하라.」 닭이 말했다.

  「선택하라.」 말이 말했다.

  「선택하라.」 사자가 말했다.

  「나는 그저 따라가기만 했을 뿐이야.」

  「선택하라!」 닭이 말했다.

  「선택하라!」 말이 말했다.

  「선택하라!」 사자가 말했다.

  「나는 이제 불빛을 잃어버린 반딧불이일 뿐이야.」

   나는 내 눈 앞에 놓인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앞으로 걸어가, 닭을 찌르고, 말을 찌르고, 사자를 찔렀다. 찌른 부위에서는 물거품이 솟아나왔고, 그들은 힘 빠진 풍선 인형처럼 늘어진 채로 수면 위로 올라갔다. 그들의 몸뚱이는 수면에서 둥실거렸다. 나는 남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남편을 끌어안았다.

  「나와 살아가려고?」

  「아니, 그건 너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 그런 건 나도 원하지 않아.」

  「그러면 왜 나를 찌르지 않는 거지?」

  「너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거였어. 나는 그저 너를 기다리기만 하고, 받아들이기만 했을 뿐이었어. 그리고 이제야 너를 이해의 영역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그러니까,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이 시간을 느끼고 싶었어. 몸 속에 기억해두고 싶었어. 이렇게 있게 해줘.」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내 주변에 흐르는 느낌이 내 몸을 온전히 통과하도록 두었다. 많은 것이 의식 위로 흘러갔고, 나는 가능한 많은 것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곧 있으면 이곳은 닫혀. 너가 나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지금 뿐이야.」

   나는 눈을 떴다. 너무도,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나는 남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남편의 눈은 내가 남편에게 이끌렸었던 그 야망이 담긴 눈이었다. 그 눈은 이제 자기에게 찾아올 마지막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직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보아왔던, 자신의 마지막이 진행되는 모습을.

  「너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말했다.

  「너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남편은 말했다.

   나는 남편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다. 남편의 심장에서 물거품이 솟구치듯 뿜어져 나왔고, 그 물거품은 내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나는 팔을 들어 뿜어져 나오는 물거품을 막았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내 몸은 튕겨져 나가, 어딘가로 흘러갔다. 점점 더 빠르게,그리고,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남편의 집 안이었다. 집 안은 내가 집을 나왔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고, 그 위로는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내가 집을 나선 후로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바닥에는 네 명의 시체가 이곳저곳에 드러누워 있었다. 동물 탈을 쓰고 있었던 이들은 여전히 그 탈을 쓰고 있는 채였다. 그들은 입을 벌리고, 공허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그들이 쓰고 있는 탈을 위로 잡아 당겨보았다. 탈은 그들의 몸에 꼭 달라붙어있어, 마치 신체의 일부 인 것처럼 보였다. 가슴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피는 어딘가에 전부 털어내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단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로 다가갔다. 남편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무거운 짐을 벗어던졌을 때의 그런 속 시원한 표정을 지은 채 죽어있었다. 나는 생명이 빠져나간 남편의 눈동자를 조용히 들여다보다가, 손으로 두 눈을 감겨주었다. 이제야 멈추었구나,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집 안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안방에서 선물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선물 상자는 결혼사진 앞에 놓여 있었다. 유일하게 집에 원래 있던 것 중에서 부서지지 않은 것이었다. 선물 상자 위에는 새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난 채로, 덩그러니 올려져있었다. 나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주소가 적혀있는 종이가 매달려 있는 열쇠 꾸러미와, 피해자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담겨있는USB, 피해자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는 데 사용되었던 노트, 혈흔 자국이 남아있는 일곱 개의 수술용 메스,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라고 봉투 위에 적혀있는 편지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읽기 시작했다.

 

  나의 아내에게.

 

   이걸 너가 읽고 있을 때에는, 나는 너에게 말을 건넬 수 없게 되어있겠지. 때문에 여기까지 와준 너에게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해줄 수가 없어. 그래서 글을 남겨, 이게 가장 나다운 방식이겠지. 나는 항상 무언가에게(신이라고 해도 좋고, 커다란 흐름이라고 해도 좋아)이끌림을 받으면서 살아왔어. 그저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무언가 보장되어있는 그런 삶이었지. 나는 그것을 따라감으로 인해 항상 뛰어남을 유지해왔어. 나는 그게 너무 좋았어. 쳐다보는 것도 실례가 되는 것처럼 나를 보는 사람들의 겁먹은 시선, 어딜 가나 나를 존중해주고, 내 말이라면 반드시 지켜야하는 법률마냥 생각하는 이들. 내 즐거움은 거기에서부터 왔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것뿐인 사람이 되었지.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면서 거기서 오는 즐거움은 점차 무료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래도 나는 그 뛰어남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어. 방황해하며 무서워하는 것보다는, 무료하더라도 정해져 있는 길을 가는 게 나아보였으니까.

   내가 지금까지의 과정 속에서 흔들렸던 적은 두 번이야. 첫 번째는 외과의사가 되어야 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너가 나를 죽이게 되는 미래가 뚜렷이 정해졌을 때였어. 첫 번째는 시간이 지나면서 버틸 수 있을 만한 것이 되었고, 더 지나고 나서는 필요했었던 것이었구나 하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었어. 하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어. 그게 정해졌을 때, 뚜렷이 정해졌을 때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 나를 위해서 삶의 방향을 나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준 너에게 주어지기에는, 너무 가혹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한 번도 너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너는 나에게 유일한 것이었어. 오직 너만이 나에게 싫다, 라는 말을 해주었지. 내 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나와 같은 높이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나에 대해 생각을 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어. 그런 너를 볼 때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다니는 것이 아닌,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었어. 그런 너에게, 내가 그런 결말을 안겨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리고 그것이 싫은 것보다 아마도 몇 배쯤은,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방황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 두려웠어. 나는 그만큼 이기적이고, 내가 우선이었고, 그만큼 겁쟁이었지.

   나는 조금 변수를 만들어보려고 했어. 나를 너가 미워하는 것으로 만들고, 내가 일으킬 폭풍에서 너를 떨어뜨리고 싶었어. 그게 그 때에 겁쟁이인 내가 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변하지 않을 것이라면, 너가 그저 나를 미워하게, 단순하게 생각했으면 했어.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너를 위한 게 아니었던 것 같아. 나를 위한 것이었지. 그렇게 내 마음을 편한 것으로 만들고, 거기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을 뿐이야. 나를 괴롭게 만드는 너를 그렇게 구석으로 몰아넣고, 나에게 주어진,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이 순간 속에 있기 위해서 말이야.

   나는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 기다려왔던 만큼 만족스러웠고,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할만한 것을 내놓을 수 있게 되어서 기뻐.사람들은 내가 내놓은 것을 보면서 많은 이야기를 할 거고, 그 결론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른 것이 되겠지. 내가 살아왔던 길은 그들의 해석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거름이 될 거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야. 기억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야. 하지만 한 가지가 계속 의문으로 남아 나를 불편하게 해. 과연 너에게 나는 무엇으로 남게 될까? 어떤 질문들을 안겨줬고, 너는 거기에서 어떤 해답들을 얻어내었을까? 나는 결국 확인할 수 없겠지.

   나는 더 이상 이 일에 손을 댈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 결말은 오지 않았어.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게 던진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내가 누구인지는 아직 알지 못해. 이대로라면 나는 그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잊혀 지게 되겠지. 그리고 너에게 약속했던 것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 너가 알고 있듯이 나에게는 저주가 걸려 있고, 그 저주는 아직까지 유효해. 재료들은 남겨두었어.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제 온전히 네 몫으로 넘어가게 되었네. 나와 함께 하느라 고생 많았어. 이제는 거기에 방점을 찍을 시간이야.

  ​사랑해.

 

20XX년 XX월 XX일

너의 남편이.

 

 

   이제야 비로소 납득할만한 결말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그대로 집어 들고는 부엌으로 가서, 가스렌지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주저하지 않고 가스렌지의 불을 가장 강한 것으로 올렸다. 편지는 타들어가면서 회색의 잿더미가 되었고, 후, 바람을 불어넣자 곳곳으로 흩어졌다. 남편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알려질 필요는 없다. 남편은 살아있을 때처럼,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전형이 되어야 했다. 나를 위해 살 것은 나만 알고 있으면 되었다. 나는 상자에 담겨져 있던 것들을 남편의 시체 옆에 일렬로 놓아두었다. 잠긴 현관문을 열어두고, 남편의 가슴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아들었다. 칼은 시퍼렇게 바짝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그 칼로 내 검지의 첫 마디를 슥, 하고 그었다. 피가 한 방울, 한 방울 밑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그 흘러내리는 피를 잉크 삼아, 남편의 몸 위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적어나갔다. 나는 그것을 다 적고 나서 남편의 몸에서 조금 떨어져 내가 적은 것을 보고는, 이 정도면 남편도 만족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리곤 바닥에 누워있는 사자탈을 쓴 사람을 베란다 측으로 옮겨, 창문 너머로 내다 던졌다. 육체가 깨져 나가는 파열음이 아파트 단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하면 누군가는 여기를 발견해 줄 것이다. 나는 남편의 가슴에 있는 상처에 손목을 포개어놓고, 그 위로 할 수 있는 힘껏, 칼을 내리찍었다. 칼은 원래부터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부드럽게 내 손목을 꿰뚫었다. 끊어진 동맥에서는 피가 빠르게 새어나가, 남편의 가슴에 있는 패어진 상처로 스며들어갔다. 의식은 서서히 점멸해갔다.이렇게 나는 남편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XX일보

제 2면

아트 킬러,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사망한 채 발견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명 ‘아트 킬러’가 자택에서 자신의 아내와 함께 사체로 발견되었다. ‘아트 킬러’의 정체는 정 모 씨(34)로서, 외과 계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장래가 촉망받던 유능한 의사였다. 그가 어떻게 이번 사건의 주모자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경찰 측에서는 그가 남긴 유품을 토대로 수사 과정 중에 있음을 밝혔다. 자택에서는 신원 미상의 두 남성이 사체로 함께 발견되었는데, 아파트 단지 내에서 추락한 한 명의 남성과 복장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장소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내 윤 모 씨(34)는 남편의 가슴의 손을 올리고 자신의 동맥을 절단한 채 발견되었다. 정 모 씨의 몸 위에서는 윤 모 씨의 혈액으로 쓰인 메시지가 발견되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둘로 태어나서 살았고,

죽어서야 비로소 하나가 되네.

우리는 결코 떨어지지 않을 거야.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절대로,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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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것도 끝~

이제 하나 정도만 더 올리면 이제 올릴 것도 없네요.

나중에 더 잘 써진 것들로 돌아오겠습니다 (- -) (_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