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본 지 7년이군 그래. 어릴 땐 한창 많이 봤는데 말이야.


물론 우리 둘은 가는 길이 달랐으니 결국 한 길에서 만나기는 어려웠겠지.


그것을 생각하면 우린 사실 한 길을 걸은 것이나 다름없었겠지.




한 노인이 천천히 산을 오른다. 노회한 정치인의 눈은 마치 잿더미 같다. 한때 강렬하게 불타올랐지만 천천히 사그라들어 온기 있는 모닥불이 되고, 늘그막에는 불씨만 남은 잿더미가 된 모습이다.




정치를 참 오래도 했어.


36년 동안이나 정치를 했는데, 그동안 정말 별별 사람을 다 봤네.


뭐, 사실 만나 본 인간군상이야 내가 그대에게 비할 바가 있겠느냐마는, 어쨌거나 일반적인 사람들이 만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만났지.


그런데 이제 정치를 끝내고 밖에 나오니, 그게 다 허탈하더군.


천 길 담장으로 백 겹을 두른 구중궁궐에서 혀를 칼 삼아 싸우고, 심지어 거치적거리는 자는 베고, 또 종종 내가 거치적거리는지 나를 베려는 자에게 크게 당하기도 하면서, 나름 필사적으로 싸운다고 싸웠는데.


막상 나와 보니 그곳은 참으로 좁은 곳이더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입으로 나라를 논하고 마음으로 국민을 위했는데, 막상 나와 보니 나는 나라를 논한 것이 아니라 정권을 논한 것이었고,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내 동지들만을 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어.


평생을 정치인으로 살았는데, 그게 다 부질없었다는 생각이 드니 내 평생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노인이 한숨을 쉬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그 무언가에게 속삭이듯이 말한다.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것 뿐인데, 나는 평생 부질없는 짓만 하다가 이렇게 살아서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지내는데, 그대는 평생 몸을 부서지게 부딪히다가 이렇게 죽어서 어두운 지하세계에 묻혀 있구만.


내가 자네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최전방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자네는 지금 이 순간 내 옆에 살아 숨쉬고 있을까?




그 앞에는 무덤이 있다.




내 평생 정치만 해 왔는데, 그게 이제까지 평생 해 온 일의 전부인데, 그게 옳았는지 아닌지 이제는 모르겠어. 내가 옳다고 믿으면서 싸워왔던 기치가 옳았던 건지 모르겠어.


자네는 달랐겠지. 자네가 하는 일이 옳다는 신념이 있었을 것이야.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이겠지.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던지지 않았는가. 이 죄인은 이렇게 살아서, 자네 같은 군인들이 남겨준 것 위에 영광을 누리고 있네.


그래, 평생 정치만 한 내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밭을 쟁기질할 줄 모르네. 베틀에서 직물을 뽑아내지도 못하고, 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지도 못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정치밖에 없는데.


해서 이제 나는 나의 마지막 정치를 해볼까 하네. 정권과 동지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말일세. 정치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 내 36년간 정치하면서 그 정도는 알았네.


그래서 내 그대를 떠올리면서 나의 마지막 정치를 행했네.




노인이 천천히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그리고 그 책을 무덤 위에 올려놓는다.




자네가 한 일에 비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초라하고도 작군그래. 기껏해야 종이 위에 내 기억을 적어넣는 것 뿐이었네. 그마저도 자네가 종이 위에 적어넣은 매일의 기억에 비하면 한참 초라한 것이지.


나라를 전란으로 몰아넣었는데, 어떻게 정치인으로서 당당할 수 있겠는가.




노인의 잿더미 같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흐른다.




조선을 지켜줘서 고맙네, 여해.




무덤 위에 놓인 책의 표지에는 [징비록]이라는 글자가 일필휘지로 내리그은 액자로 적혀 있다. 그리고 묘지의 앞에 있는 비석에는 [만고대충신 여해 이순신]이라고 적혀 있다. 류성룡이 그 비석을 만진다.




정치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늘 혼자뿐이라고 했네. 그래서 나는 항상 내가 외롭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제서야 그동안 내가 외롭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네. 그때 나는 진짜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네.


그래서 징비록을 집필하는 내내, 외로웠는데... 자네가 죽었음을 매 순간 실감하면서 매 순간 더 외로웠는데. 그래서 이 책을 다 쓰고 나면 이제 외롭지 않을까 했는데...




비석에서 류성룡의 손이 미끄러진다.




오늘, 더,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