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냉장고 표류기(https://www.youtube.com/watch?v=d_C14GQIs2Q)
지금 이 원숭이는 고민이 많다. 고민의 이유야 많을 수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분명 뒤숭숭한 꿈을 꾸고 일어나보니 영문도 모른 채 물에 잠긴 세상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냉장고 위에 표류되었기 때문이랴. 원숭이는 아직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여 눈을 다시 감고 잠을 청했다. 다시 눈을 뜨면 분명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아늑한 우리집이 펼쳐져 있을 터, 얼른 이 뒤숭숭한 꿈에서 깨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털 없는 원숭이들이 가져다주는 조찬을 즐기고 싶은 마음만 들 뿐이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뒤척이기를 몇 번, 슬슬 깨었다 싶어 눈을 떠보니 이게 웬걸, 사방은 여전히 물밖에 보이지 않았으며 자신은 집이 아닌 거대한 냉장고 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원숭이는 당황해 우왕좌왕하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눈을 씻고 보이면 뭔가 다를까하여 물속에 고개를 박으니, 원숭이는 기묘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물속에 고개를 박고 눈을 떠보니 물속에는 복잡한 미로와 같은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거대한 검은색 거미줄로 촘촘하게 옭아매진 대지 위로 정갈한 모양의 길고 짧은 돌덩이들이 여기저기 들쭉날쭉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형형색색의 넓직한 쇳덩어리들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 그러한 풍경이 한치의 끊임도 없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었다. 원숭이는 이 광경을 알고 있었다. 이 모습은 필히 원숭이가 지겹도록 봐오던 보이지 않는 벽 너머의 세상이였음이 분명했다. 원숭이는 나고 자라기를 보이지 않는 벽 속의 세상에서 자랐기 때문에 벽 너머의 세상을 보기만 해봤을 뿐 나가본 적은 고사하고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본 적은 한번도 없었으나, 그저 보기만 해도 이곳이 그 벽 밖의 세상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원숭이는 도대체 무슨 연유로 세상이 물에 잠겼고, 이 거대한 냉장고는 도대체 무슨 원리로 물 위에 자연스럽게 떠 있는 것이며, 왜 자신이 느닷없이 그런 냉장고 위에 표류되었는지 도통 알 방도가 없었다. 원숭이는 자신이 느닷없이 처한 상황을 머리로 쉽사리 따라올 수 없었다.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 필히 자신의 아늑한 집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조찬을 즐기고 나무 위에 걸터누워 여유를 만끽하고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 이러한 낮선 환경에 아무런 전조 없이 처하게 되었단 말인가? 원숭이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1초간 원숭이는 현실을 부정하기에 급급했다. 2초가 되자 원숭이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이 상황과 냉장고, 세상에 분개하여 길길이 날뛰어댔다. 3초가 되자 원숭이는 잘만 하면 이 지독한 꿈에서 깨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고뇌하였고. 4초가 되자 원숭이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껴 애수에 빠졌다. 끝내 5초가 되자 원숭이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된 거지,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원숭이는 스스로조차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모든걸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스스로조차 초연한 태도에 감명받아 원숭이는 냉장고에 드러누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자 하였다. 비록 이미 두 번이나 잠들었다 깨어났기 때문에 몸이 쉽사리 잠들리가 만무하나, 원숭이의 몸조차 원숭이의 태연한 태도에 감명받았는지 원숭이의 휴식에 순응하여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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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 편해질 수 없는 자
얼마나 지났을까, 원숭이는 눈을 뜨고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만일 방금 그것이 꿈이었다면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기할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사방은 여전히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이 귀찮게 돌아감을 알게 된 원숭이는 냉장고에 드러누웠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원숭이는 이내 주변에 솟아있는 높은 돌덩이의 지붕이나 끝자락 등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원숭이는 이를 이상하게 여겨 물속에 고개를 박고 살펴보니, 물속 세상이 천천히 뒤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세상은 생각보다 견고하다. 원숭이는 이미 일전에 조망권을 위해 나무를 움직이려고 전속력으로 나무뿌리에 달려들었다가 눈두덩이를 두어번 다치면서 그 사실을 배웠기 때문에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라는 가능성은 자연스레 배제되었다. 하여 원숭이가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냉장고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떠다니며 움직인다니! 냉장고가! 그것도 원숭이를 태우고! 원숭이는 기존에 알던 지식들과 모순되는 상황에서 난항을 겪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것도 잠시, 원숭이는 자신이 고수하던 ‘초연한 낭만 원숭이’의 이미지가 실추된 것을 느끼고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아 점잔을 뺐다. 하지만 여전히, 원숭이는 이 냉장고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도당체 이 거대한 냉장고가 무슨 낙엽이라도 되는 양 이리 안정적으로 떠다니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다시, 원숭이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슬슬 똑같은 고민을 계속 하는것도 지겹고, 이러한 상황의 원인을 따지는 행위 자체가 부질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냉장고는 뜨기 때문에 뜬다. 그 외의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후로 억겁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원숭이가 권태에 허우적대고 있을 무렵, 냉장고가 턱하고 어딘가에 부딪혀 멈춰섰다. 원숭이는 뭔가 싶어 확인해보니, 높이 솟은 웬 언덕같은 것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흰색의 고운 돌로 이루어진 –세상이 물에 잠기기 전까지만 해도 높은 산이었던-암초였다. 원숭이는 호기심이 동해 냉장고에서 나와 암초를 거슬러 올라가보았다. 암초의 정상에는 빈 술병들과 습기찬 이불, 빛바랜 ‘졸업장’이라고 쓰인 종이 한 장과, 털 없는 수컷 원숭이가 있었으니, 그 털 없는 원숭이는 무언가를 깎는데에 굉장히 열중이었다. 오죽 열중하고 있었으면 원숭이가 그의 술병을 가지고 놀며 방을 어지르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남자는 곡선 끌을 찾기 위해 허리를 돌려서야 원숭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뭐야, 원숭이? 여기엔 어떻게 온거지..?”
남자는 잠시 당황하나 싶더니 이내 관심을 끄고 곡선 끌을 찾아 조각에 열중하였다. 원숭이는 남자가 무얼 만드나 싶어 가까이 가보니, 웬 거치형 조타기의 모양을 한 무엇가를 깎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잘 만들었지, 응? 이제 이것만 완성하면 난 이 신물 나는 군도를 빠져나갈 수 있어, 내 암초를 몰고 이 군도 바깥으로, 날 인정해주고 받아주는 다른 군도로 떠날거야.”
원숭이는 남자가 뭐라고 조잘대는 건지 도통 알 방도가 없었다. 목소리가 격양되어 있는걸로 봐선, 뭔가에 화가 난 듯한데, 밥을 굶은 걸까? 원숭이도 마침 조찬을 먹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자의 마음에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이고 친척들이고 가족들이고 다 밉다, 누구라고 이런 대학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누구라고 수도(首島)권에 있는 대학 나오기 싫어서 안 나온 줄 아냐고..! 비수도권 대학을 나온게 그렇게 죄지은 일인가? 다들 내가 대학을 어디로 갔는지만 알면 시선이 짜게 식어, 대학 좀 못 갔다고 사람을 머저리 취급하고 차별해댄다고, 내가 공부를 안 한 것도 아냐! 열과 성을 바친 결과가 이것인 걸 어떡하나? 심지어 난 내 분야에서 나름...!”
그러곤,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표정이 훅 죽고 말았다.
“...나름 잘한단 말야...”
그 순간 남자는 굉장히 수척하고 나이 든 몰골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맘이 상한 어린아이인 양 보였다.
“...떠날거야, 대학 하나 못 나오면 사람도 아니고 변변찮은 직업도 못 가지는 이런 부조리한 군도를 떠나 학벌이 아닌 순수한 ‘나’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곳으로 내 암초를 몰고 항해할 거야...”
이내 남자는 다시 조타기를 깎는데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불쌍한 남자, 암초는 키가 있다고 하여 항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도 모른 채... 원숭이는 이 털 없는 원숭이가 밥을 먹지 못하여 분개하고 있는 것에 안쓰러움을 표했다. 하지만 남자가 무어라 말하지 않자 다시금 권태가 찾아온 원숭이는 그 몰래 몇가지 물건을 챙기곤 유유히 자신의 냉장고로 돌아갔다. 원숭이가 재밌게 갖고 놀았던 빈 술병과 ‘나혼자 끝내는 한국어 첫걸음’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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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모 아니면 도의 세상
원숭이는 또다시 오랜 시간 표류하여야 했다. 물론, 표류하는 내내 빈 술병을 두드리거나 책을 읽으며 공부하여 전처럼 쉽사리 권태에 빠져들진 않았다. 이 ‘한국어’라는 기묘한 그림들은 배우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일 터, 권태는 고사하고 심심한 느낌마저 들지 않았다. 이러한 시간만이 계속될 수 있다면, 표류또한 나쁘지 않으리라...(https://www.youtube.com/watch?v=RHvowD67QZ8) 라고 생각하던 찰나, 원숭이에게 찾아온 적적한 평화는 엄청난 물살을 견디지 못하고 휩쓸려 빠르게 전진하게 된 냉장고의 급가속으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원숭이는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냉장고의 모서리를 붙잡고 속도에 밀려 휭 날라가 버리는 것을 견뎌야만 했다. 실눈을 뜨고 간신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원숭이와 냉장고는 웬 거대한 급류에 휩쓸려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가로로 깔린 폭포의 모습과도 같아, 마치 정갈한 흐름의 눈보라를 타고 가는 눈떼를 보는것만도 같았다. 그러한 광경에 감동하기도 잠시, 원숭이는 주변에 초록 해마를 탄 여러 털 없는 원숭이들을 보게 되었다. 다들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해마를 타고 안경모양의 고글을 쓴 채 앞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원숭이는 이를 의아하게 여겨 바로 옆에 있는 한 원숭이에게 물었다.
“너. 가다. 어디?”
원숭이는 자신이 방금 배운 한국어를 사용해 털 없는 원숭이에게 말을 거는데 성공했음에 큰 희열을 느꼈다. 해마를 타고 가던 여인은 뭔가가 말을 건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서 이를 무시하였다. 원숭이는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너. 가다. 어디?”
여인은 화가 나 언성을 높여 한소리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자신에게 말을 건 주체가 원숭이임을 알고 크게 놀랐다.
“뭐야, 원숭이가 여기 왜 있는거야..?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원숭아, 다른 데 가서 놀아라, 나는 지금 말할 여유가 없어.”
원숭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 가다. 어디?”
“아잇 진짜 열받게 왜 이래, 당연한 걸 물어, 수도(首島)로 간다. 지금 여기서 달리고 있는 기수들은 전부 수도로 가는거야.”
원숭이는 비록 여자가 하는 말의 반절밖에 못 알아들었지만, 한가지 ‘수도’라는 말은 귀에 익었기에 금방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수도, 왜 이렇게 여기 사람들은 수도를 좋아할까?
“간다. 왜?”
여자는 기가 찬다는 듯이 웃더니 이내 비아냥대듯이 말했다.
“그야 수도에서 살다 보면 ‘초록 종이 천국’으로 갈 수 있으니깐. 초록 종이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사는게 편해질 거라고.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에 좋은 남편...부, 명예, 권력, 모든 걸 얻을 수 있으니깐 가는거야, 여기 달리는 기수들은 모두 그래서 수도로 향하는 거야. 사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도 이미 수도지. 하지만 아직 부족해, 더 깊은 수도로 가야만 해. 더 깊이 가야 ‘초록 종이 천국으로 갈 수 있어.”
원숭이는 ’초록 종이‘가 부, 명애, 궐력..? 여하튼 뭔가를 갖는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까지는 이해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집착할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좋아보이긴 하는데, 그냥 자기한테 있는 것들로 만족해도 괜찮지 않나?
“그렇게. 중요. 초록 종이?”
여자는 이내 얼굴이 잠시 굳는가 싶더니 고개를 내렸다.
“...’초록 종이‘가 없으면 할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초록 종이‘가 없으면, 먹고 살기 버겁고, 별다른 사회 활동도 못할뿐더러 살 수 있는 곳조차 없게 되어버려. 그러니 한시라도 더 빨리 달려서 ’초록 종이‘를 많이 가져야 해, 그래서 초록 종이 천국으로 가는거야. 오직 그걸 위해 학창 시절 내내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이렇게 달리고 있는 거라고.”
여자는 그리 말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어느 길로 쑥 빠져 사라졌다. 갑작스런 헤어짐에 원숭이는 당황했지만, 이내 저가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앞을 보니 가파른 절벽이 자리잡고 있어 해마를 탄 기수들이 모조리 왁왁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원숭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으려 해보았으나, 폭포는 이미 코앞까지 닥친 뒤였다. 세상이 까마득해지더니, 그대로 슉, 하고...
사람들은 당시에 폭포에서 웬 원숭이 꽥꽥대는 소리가 사방천지에 들렸다고 회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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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늙은 왕자(https://www.youtube.com/watch?v=17PqoC-ImfM)
길고도 긴 추락 끝에 기절했던 원숭이가 정신을 차렸다. 원숭이는 일어나자마자 그 모든게 꿈이였는지부터 확인해보았다-진짜 진짜 이 모든게 꿈이였다면 친구들에게 질릴때까지 자랑 할 셈이었다.-아쉽게도 꿈은 아니었나 보다. 이내 원숭이는 자신의 책과 술병이 잘 있는지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을 대충 살폈다, 크게 다친게 없음을 확인한 원숭이는 이내 주변을 살펴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어느덧 어두워진 밤하늘이 원숭이를 반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어딘가에서 조그마한 가로등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으로 가보니 또 다른 암초가 있었는데-굉장히 작았다-, 그곳에는 오래된 가로등 한 대와 그 밑에 늘어져 앉아있는 우수에 찬 표정의 털 없는 중년 원숭이가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그 중년에게서는 술병에서 나던 것과 비슷한 독한 냄새가 났다. 중년은 원숭이를 발견하곤 살짝 웃어보였다.
“원숭이라...하하, ’초록 지폐 지옥‘에 원숭이도-딸꾹!- 들어올 수 있었나...꼬마야, 여긴 어떻게 들어온거니?”
“모른다. 떨어졌다.”
“떨어-딸꾹!-졌다고? 하하... 하늘에서 내려온 원숭이라, 내가 취해서-딸꾹!- 헛꿈을 다 꾸나보지.”
남자는 두어번 실실 웃더니 이내 허한 표정으로 가라앉혔다.
“여기. 초록 종이 천국?”
“천국? 하하하! 그래, 새로 들어온 애들은 다 그렇게 말하곤 하지. 그래, 여기가 초록 종이 천국이다. 주변에 초록 종이가 보이나?”
원숭이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초록 종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참 신기하단 말야, 헤헤...-딸꾹!-이봐, 내 얘기 한번만 들어주게. 있지, 난 정말 하늘에 맹세코 죽어라 살아왔어. 십대 시절동안 미친 듯이 달려서 좋은 대학을 나와, 이십대부터 미친 듯이 일해 경험을 이십년 동안 쌓아 기술과 신임을 얻고 결국 좋은 회사에 들어와서 치이고 치여 수년만에 높은 직급을-딸꾹!- 받았지. 좋은 직장, 좋은 연봉, 좋은 집, 좋은 차, 전부 얻어냈어. 모두가 부러워하고 갖고싶어할만한 부를 손에 얻었다네. 하지만, 이봐! 난 어디에 있나? 난 나를 대가로 부를 얻었다네, 그-딸꾹!- 수십년간의 맹목적인 질주는 나에게 성공을 줬을지언정 정작 그 성공을 누릴 나를 지워버렸어. 내가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꿈꾸는 것, 이젠-딸꾹!- 모조리 잃어버리고 말았지. 난 속 빈 강정이 되어버린거야. 이게 정녕 내가 꿈꾸던 나의 모습인가? 이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네. 혹자는 나더러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몰라, 아무도 모른다네, 내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몰라. 초록 종이는 족쇄라네 친구, 천천히 너를 뒤덮어서 너를 먹어 치워버리고 끝내 껍데기만 남기겠지. 사람들은 이 족쇄에 미쳐 젊음을 태우고 있어. 불쌍한 청년들, 하지만 우리가-딸꾹!- 달리 뭘 해줄 수 있겠나. 실제로 초록 종이는 중요한걸. 하지만 친구, 그렇다고 해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게. 나는 단 한번도 내가 한 짓을 후회한 적이 없어, 다만 내가 하지 않았던 것들을 후회한다네. -딸꾹!-초록 종이에 눈이 멀어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중년은 그러곤 술을 한 병 더 마시기 시작했다.
“이제 가주게, 혼자 있고 싶어지는군.”
원숭이는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이내 자신의 냉장고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암초에서 떨어져 다시 표류하기 시작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멀어져갈수록 알 수 없는 여운만이 남아 원숭이를 불편하게 했다. 원숭이는 빈 술병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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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IKw9AeKKGntmUktvnvAFe6Hj_MmNOuJp)
낮의 그늘은 어느덧 더욱 짙어져 깊은 새벽이 되었다. 지금 이 원숭이는 고민이 많다. 고민의 이유야 많을 수 있지만, 지금으로써는 분명 살아가는 것에 대한 깊은 사색에 빠졌기 때문이랴. 원숭이는 도무지 털 없는 원숭이들의 삶이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털 없는 원숭이들은 가지지 못한 자조차, 가진 자조차 무엇 하나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모두 저마다의 고뇌와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고립된 섬 위에서 저들은 얼마나 초라해지는가? 분명 그들의 고민, 그들의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원숭이의 마음만 계속 복잡해지고 심란해졌다. 원숭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조차, 그의 가치조차 다시 비춰보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는 과연 가치를 지닌 원숭이인가? 그의 가치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마치 모두 그의 학벌과 재산의 양으로만 결정되어야 하는것만 같아 막연한 공포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그들에 대한 동정이 엄습하고 자신에 대한 연민이 들기 시작했다. 원숭이가 이러한 우수에 빠져 우울해하던 무렵, 냉장고가 다시금 어딘가에 부딪혀 멈춰섰다. 원숭이는 더 이상 털 없는 원숭이들을 보기 싫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자신마저 피폐해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건가?”
그러나 이번엔, 먼저 다가온 쪽은 털 없는 원숭이 쪽이었다. 원숭이는 고개를 들어 냉장고가 부딪힌 쪽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튀어나와 있는 긴 장대에 걸린 새장, 그리고 그 속의 털 없는 원숭이가 보였다. 그는 머리는 산발에, 오랫동안 갇혀있었는지 몸도 굉장히 야위어 있었다.
“너. 갇히다. 왜?”
사내가 킬킬 웃으며 인상 좋은 얼굴을 했다.
“난 갇혀있지 않아, 이 넓은 우주를 여행하고 있지. 너 또한 그렇다.”
원숭이는 사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주를 여행해? 당장 새장에 갇혀있는 저 사내는 고사하고 원숭이조차 우주가 아닌 물 위를, 여행도 아니고 표류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를 여행하다 잠쉬 쉬고 있는거라도 된단 말인가 싶었다.
“말. 안된다. 너. 갇혔다.”
“글쎄 갇힌 게 아니래도, 나는 지금 우주를 부유하는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이 우주를 유랑하고 있다. 너 또한 그렇고, 모두가 그렇지, 하지만 사람들은 이 대단한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아.”
“너. 초록 종이. 많다?”
“아니, 빈털터리인데”
“너. 학벌. 좋다?”
“난 초등학교도 안 나와봤어.”
굉장히 독보적으로 불쌍한 인간이었다. 학벌, 부, 뭐 하나 제대로 가진게 없어보이는 사내, 원숭이는 그에 대한 동정이 들기 시작했다.
“너. 불쌍하다. 힘들다.”
사내는 잠깐 멍한 표정으로 원숭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크게 웃기 시작했다.
“하하, 사람들한테서 이상한 걸 배워왔구나. 아니, 난 힘들지 않다. 불행하지도 않아. 불쌍한 이는 더욱이 아니다. 부와 학벌, 성공 등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바뀌는 게 아니지. 사람이 목매달 것들도 절대 아니다.”
“사실. 아니다. 사람들. 힘들다.”
“힘들지, 물론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초록 종이를 벌기 힘들고, 초록 종이를 벌기 힘들면 자기 자신 하나 챙기기조차 버거워지지. 하여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원하고, 더 좋은 학벌을 원한다. 자신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물론, 당연한거지. 하지만 사람들은 비단 그것만이 행복을 위한 길이 아님을 잊어버린 것 같아. 대학 좀 못 나오면 어떤가? 상심은 클 수 있으나 애초에 대학은 학문을 전문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곳이다. 학문에 뜻이 있는게 아니라면 대학이 아닌 지신의 관심이나 취미와 관련된, 자신이 잘 알고 잘하는 것에 전념하여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돈이 무조건 많을 필요도 없다. 몬이 없으면 그건 일상의 위기이기 때문에 걱정될 수 있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포기하지 않고 타개하고자 하면, 살아갈 만큼이 돈은 생기지 않겠나? 생의 의지, 그 견고한 마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안다면 좀 더 만족 할 수 있을 것이고, 만족할 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겠나? 또, 애초에 주제부터가 그렇다. 꼭 돈과 학벌이 행복이 아니다. 우리에겐 가족이 있고, 누이가 있고, 친구가 있다. 가족과의 유대가 있다면, 가정 내의 조화와 이해, 친함이 있다면 행복할 수 있지 않겠나. 모든 것은 수용과 만족의 문제다. 만일 만족한다면 행복할 수 있다. 수용한다면 고통이 없다. 뿐만 아니다, 행복은 여러 방식으로 에기치 못할 때에 번개처럼 찾아온다. 돈과 학벌만이 행복과 가치, 생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며,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원숭이가 여태 보아온 군도의 털 없는 원숭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원숭이는 자기 자신이 그러했음을 알게 되었다. 털 없는 원숭이들을 만나기 전의 원숭이가 그러하였다. 하지만 원숭이는 그가 여태 보아왔던 털 없는 원숭이들의 생각과 태도를 보며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기존에 취하고 있던 만족의 자세를 그 스스로 저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원숭이는 저자가 여태 한 말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아닌, 인간에게 감화되어 회의에 젓ᄋᅠᆻ던 원숭이인 자신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으리라.
“나 또한 너처럼 원숭이였다. 모든 사람들은 원숭이다. 하지만 원숭이는 사람을 만나면 변해, 생각이 많아져 원숭이가 아니게 된다. 난 이미 원숭이가 아니게 된 거, 사람에 대해 더 고민했다. 결론은, 사람은 좀 원숭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원숭이는 현명하다. 그걸 사람이 되서야 난 알았지. 그러니, 난 너를 위해 이 말을 전하기를, 너 자신을 받아들여라, 만족해라. 그러면 부와 학벌은 모를지언정 적어도 너를 잃지는 못할 것이야.”
사내가 기분 나쁘게 미소 지었다. 원숭이는 듣다 지쳐 잠에 들고 말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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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새장 속 인간(https://www.youtube.com/watch?v=I_ipwtDaEYw)
원숭이가 잠들었을 때, 원숭이는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마치 여태 일어난 모든 일이 모조리 꿈이었고, 사실 자기는 여태 자신이 살던 보이지 않는 벽 속에서 자고 있었다는 내용의 꿈이었다. 분명 여태 꿈꿔왔을 일이 꿈으로 나오니, 이상하게도 여간 뒤숭숭한 것이 아니었다. 원숭이는 일어나자마자 새장을 보았다. 저 멀리 수평선 위에서 떠오르는 동토의 여명만이 새장 속을 채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 사내야말로 꿈이 아니었을까. 원숭이는 고민에 잠겼다. 그는 어제-꿈이었든, 아니든- 사내로부터 원숭이의 가치와 행복에 관한 담론을 나누었고, 원숭이는 지금에 있어선 당장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함을 깨달았다. 세상은 물로 가득 찼고, 원숭이는 냉장고 위에 표류되어있는 신세였으니까. 원숭이는 자신이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영영 못 보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이제야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오는 행복에 대해 배웠건만, 사는 것에 대해 배웠건만, 막상 그것을 행하기 위한 조건이 성립될 수 없음을 깨닫고 원숭이는 순간 절망했다. 그에겐 부도, 학벌도, 가족도, 친구도, 이젠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원숭이에게는 아직 원숭이가 있었다. 이 지구 속에 살아가는 원숭이가, 그 자신이, 그의 생의 의지가 그에게 아직 존재했다. 하여, 원숭이는 가진 것이 자신 하나뿐인 것을 깨닫고, 안도하며, 새장 속으로 들어갔다. 원숭이가 내리자 냉장고는 유유히 저 여명의 발원지로 태양을 찾아 떠나갔다. 이제 원숭이는 그가 유일하게 가진 세상의 모든 것, 자신을 가지고 물로 뒤덮힌 세상이 아닌 우주를 유영할 것이다. 가끔 냉장고를 타고 온 길 잃은 원숭이가 찾아오면 그에게 필요한 그를 주리라. 그날이 올 때까지, 원숭이는 새장 속에 갇힌 자유를 느끼며, 영원토록 이 우주를 유영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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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수행평가용인데 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어려워서 한번 올려봄.
막판에는 거의 졸ㄹ면서 써서 내용 구성이나 말하는 내용이 어떤지도 잘 모므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