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서서히 들어왔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듯 푹신하고 부드러웠으나 약간 딱딱해 완전히 편하지는 않았다. 눈꺼풀도 서서히 떠졌다. 내가 여기에 왜 누워있는 지 생각해보았다. 마지막 기억은 다롄이었다. 다롄 저우수이쯔 국제공항에서 카톡을 하고 있었는데 땅이 흔들리더니 거센 충격과 함께 바닥으로 나자빠지고...
상황을 종합해보면 지진으로 공항이 무너졌고 거기서 떨어진 무언가에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가 지금 정신을 차린 것이라고 보는 게 가장 타당했다. 그러면 여기는 어디지?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마 피는 안 났겠지?
만에 하나 피가 나면 큰일이었다. 혹시라도 피가 나왔을까봐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에 덮어져있던 하얀 이불이 스르르 밑으로 흘러내렸다. 너무 벌떡 일어났는지 몸이 아파와 잠시 멈칫하며 아야야 하며 탄식을 내뱉었다.
아픈 게 어느 정도 나아지자 나는 다시 팔을 움직여 이리저리 머리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머리는 멀쩡했고 피는 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의 상처라도 있었을까 확인해보고자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몸 곳곳을 둘러보았다.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것 같아 안도했다. 내가 피가 잘 나지 않는 체질이라지만 이럴 때마다 여간 놀라고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침상에서 몸을 틀어 일어났다. 침상이 삐걱거렸다. 작은 방에는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방 안은 침상 몇 개와 의료도구가 놓인 작은 서랍장, 그리고 가방 몇 개가 다인 것 같았다. 병원의 그 흔한 링거대도 없었다. 창문은 커튼이 양쪽으로 쳐있었다. 방은 마치 버스 내부를 연상시켰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방문을 찾았다. 발견한 문 바로 앞으로 2칸 정도로 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휴대폰을 챙기고 아무 생각 없이 계단 두 칸을 내려가 바로 문을 열었다. 방문에서 문을 여니 바로 바깥이었다. 나는 뭐지 하면서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으악!"
발을 딛었으나 바닥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넘어져 고꾸라져 그대로 땅으로 다이빙했다. 다리가 아팠다. 그러나 피가 나지는 않았다.
뒤를 돌아서 내가 있었던 곳을 자세히 보았다. 버스였다. 겉모습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고속버스인 걸 보니 내부가 개조된 의료버스 같았다. 생각해보니 버스 특성상 내리는 곳이 바닥에서 많이 띄어져있긴 했다. 만약 링거대를 끌고 내렸다면 넘어져서 그대로 피가 역류했을 거라는 생각에 오싹해졌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나 생각하고 내 핸드폰이나 다시 찾아보려던 찰나 주변에 있는 또다른 고속버스의 문이 열리더니 사람이 보였다. 뭔가 격식있는 유니폼을 대충 입은 사람이 내려왔다. 나이는 대충 20대 후반쯤 되어보였다. 안에서 누구랑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웃는 얼굴로 '갔다올게'라고 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내고 있었다.
지퍼가 달린 스웨터를 입은 그 남자가 다가오면서 뭐라뭐라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듣자하니 일본어였다. 중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우긴 했는데 기초만 빼면 죄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다 알아먹지는 못했다.
아무튼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뜻 같았기에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의 옷의 왼쪽 가슴과 오른팔 부분에 Rewinder이란 글씨가 써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브랜드명은 없는 걸로 알고 있기 때문에 무슨 단체명일 것으로 추측했다. 아무래도 이 남자가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단체의 소속원인 것 같았다.
그럼 뭐하는 사람일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롄 지진 피해자 구호를 하는 구호단체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를 살려준 사람인가? 일단 아는 일본어로 최대한 질문해보았다.
"스미마셍가 와타시오... 타스케? 타스케테... 히토? 데스까?(죄송하지만 저를... 구해? 구해주신... 사람? 인가요?)"
"하이. 소우데스.(네. 맞아요.)"
일본어였지만 이번에는 아는 표현이었다. 역시 치료해주신 분이 맞았다. 그렇다면 은인이구나. 속에서부터 감사의 마음이 밀려왔다. 그와 동시에 지난번 여행 때 있었던 참혹한 사고에서의 갚을 수 없는 은혜가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은혜를 갚고 싶었다.
"이야,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뇌출혈인 거 보자마자 얼른 나노로봇 넣었는데 한 달 째 안 일어나시는 거에요. 그래서 혹시라도 효과가 잘 안 들었나 얼마나 걱정했는 지 아세요? 공항 천장에서 떨어진 거에 머리 정통으로 맞고도 피가 안 나고 안에서 고여서 그런가 되게 안 듣더라고요. 아무튼 그래도 이렇게 잘 깨어계시니까 정말 다행이지 말이에요. 깨어나실 때 제가 곁에 있어드려야 했는데 옆에 있어드리지 못했다는 게 의사로서 마음이 걸리긴 하단 말이죠."
어마어마한 양의 문장들이 일본어로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그 말들 중 하나라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외국어에 압도될 뿐이었다. 나는 단지 생명의 은인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미소짓고만 있었다. 그리고 초급 일본어로 한 마디를 꺼냈다.
"죄송하지만 제가 일본어를 잘 모릅니다."
"아 맞다 한국인이셨지. 죄송합니다. 일본어 하시길래 일본어 가능하신 줄 알고 계속 떠들었네요. 잠시만요. 다른 분들 데려올게요."

여전히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 남자가 다시 고속버스로 돌아가서 문 입구 쯤에 섰다.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불렀다. 그 부름에 2명의 여자가 따라내려왔다. 두 명 다 남자와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한 명은 후드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카디건을 입고 있었는데 단추가 짝짝이로 잠궈져있었다. 그녀의 손에 노트북이 들려있었는데 입에 마우스가 물려있었다.
가만히 서서 보고 있는 나에게로 다시 돌아와서 남자가 후드를 입은 여자에게 뭐라뭐라 말했다. 여자도 이에 뭐라뭐라 일본어로 답하는 대화가 이뤄졌다.
"통역? 내가 잘 할 수 있으려나. 혹시 실수하도 하면..."
"에이, 잘 할 수 있고 말고. 너 일본어 잘 하잖아.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네가 말이 많으니까 내가 다 커버를 못 친다고."
"음. 그거면 납득.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고. 도와주라."
"그리고 나 낯 가리는 거 알잖아."
"그래도 말은 통해야 될 거 아니야.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제발."
"알았어 알았어."
일본어라서 마지막의 '와캇타 와캇타' 빼고 하나도 못 알아먹겠지만 둘의 사이가 아주 편해보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남자가 뭐라고 말하자 후드 입은 여자가 뒤이어 말했다. 반가운 한국어였다.
"'자기소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시즈오카 히카리라고 합니다.'라고 전해달래요."
"에이 별 말씀을요. 죄송해하실 것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제가 오랫동안 신세졌던 게 오히려 더 죄송하죠."
그쪽에서 먼저 이런 말을 하니 무안했다. 그리고 나도 따라서 자기소개를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는 하현일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저는 유혜림이라고 해요. 잠시만요.'
후드 스웨터의 여자 유혜림이 짚업 스웨터의 남자 시즈오카에게 통역을 하는 듯 일본어로 다시 뭐라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시즈오카는 이번에도 또다시 장황한 말을 늘이기 시작했다. 유혜림이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살짝 무시하는 어투로 뭐라 말했다. 시즈오카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이분 말 너무 기니까 제가 대신 설명해 드릴게요."
아, 그런 상황이었구나.
"뭐부터 설명드려야 하냐... 그래. 일단 이거 먼저 설명해드릴게요. 일단 10월 8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중국 다롄에서 7.5 지진이 발생했어요. 아마 탄루단층이 원인일 거에요."
"7.5요? 아 그럼 혹시 제가 여기 있게 된 것도..."
"그런 셈이죠. 저우수이쯔 공항이 일부 무너진 것도 그것 때문이기도 하고요. 당신 하현일 씨를 본 건 저희가 공항의 생존자를 수색하고 있을 때였어요. 바닥에 깔린 채로 의식을 잃었었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아무튼 오늘이 11월 4일 수요일 아침이니까... 대충 한 달 정도 의식을 잃고 계셨네요. 솔직히 처음 발견했을 때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걱정됐어요. 저희가 나노로봇을 넣어드려서 대충 한 달로 끝난 거지 안 그랬으면 거의 죽으실 뻔 했어요."
그 말을 들으니 그들에게 더욱 더 고마워졌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나노로봇? 지금 기술력으로 그게 되던가?
"그보다도 나노로봇이라뇨?"
"아, 가장 중요한 걸 말씀 안 드렸네요. 이제서야 말해드리네요. 놀라지 말고 잘 들으세요."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잠시 긴장했다. 
"저희는 사실 평행우주에서 왔어요."
"네? 아니 그건 또 무슨..."
깜짝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평행우주인데 시간대가 다르거든요. 저희 세계가 45년 더 빨라요."
한국어인데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벙찐 표정으로 있으니 유혜림이 뒤이어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자료 보면서 합시다. 미야자키...."
유혜림이 카디건을 입은 여자에게 말했다. 이름이 미야자키로 추정되는 그 여자는 어느샌가 주차장 바닥에 누워서 이미 노트북으로 뭔가를 만지작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까는 마우스를 입에 물고 오더니 이번에는 무슨 기행인가 하면서 그녀를 보았다. 노트북에서 눈길을 떼고 유혜림을 올려다볼 때의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순수해보였다.
"시타요.(했어.)"
"이야, 소쟈 나쿠테...(아니 그게 아니라...) 마 이이.(뭐 됐어."
그리고는 제 안방마냥 편하게 누워있는 미야자키에 향한 고개를 돌려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와중에 시즈오카는 할 게 없어 심심했는지 쪼그려서 미야자키의 노트북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
"이 분이 좀 특이해서 그런데 양해 부탁드려요. 실례지만 혹시 핸드폰 좀 꺼내 보실래요?"
그 말에 나는 별 생각 없이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생명의 은인의 말이니 하자는 대로 했다.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켜니 나와야 할 잠금화면은 나오지 않고 이상한 영상 화면만이 떠있었다.
그렇다. 어느새 내 핸드폰을 해킹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