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수요일의 강남역은 다른 날처럼 사람들이 많았다. 역시 교통의 요지이자 모든 분야의 중심지였다. 왜 번화가인지 실감이 났다.
신분당선 열차의 문이 열렸다. 나는 발을 옮겨 플랫폼으로 향했다.

두리번거리며 천 슈어 단장님을 찾았다. 분명 신분당선의 개찰구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곳저곳 둘러보니 전신슈트 차림의 사람이 개찰구 쪽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눈에 띄어도 너무 띄어서 슬쩍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전신슈트가 리와인더의 슈트였기에 바로 이 사람이 단장님이다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 옷을 입고 있어도 괜찮나 생각했지만 주변을 보고 나는 바로 생각을 바로잡았다. 강남역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은 신기해하거나 한심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런 비현실적인 차림을 해도 코스프레라고 착각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긴 나였어도 관종인가 하고 지나갔을 것이었다.

슈트를 입은 사람에게 갔다. 그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는 중국어로 말했다. 나는 중국어를 할 수 없어 알아듣지 못 했다. 그래서 리와인더에서 준 통역기를 귀에 꼈다.
"잘 지냈나?"
간단한 인사말이었다.
"네, 잘 지냈습니다."
"여기는 안드로이드로부터 만큼은 그나마 안전한 곳이네. 강남역은 지하라 무작정 쏘면 무너질 거고 일평균 승차량이 전국 1위라 레볼루시아가 섣불리 공격하지는 못 할 걸세."
"그러면 다행이네요."
"그보다도 할 말이 있네. 다른 단원들에게는 비밀로 한 이야기들일세."
비밀? 그러고보니 단장님은 비밀로 해두는 게 참으로 많으신 분이었다. 이번 기회에 뭔가 새로운 걸 알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일단 레볼루시아에 대한 얘기부터 합세."
레볼루시아라면 그 안드로이드가 속한 조직이었다. 레볼루시아라는 단어가 나와 나는 엄청 중요한 정보가 나올 것이라고 짐작했다.
"레볼루시아가 어떤 조직이랬지?"
"전세계의 기존 정부를 뒤엎고 기계로 된 새로운 정부를 만들고자 하는 조직이라셨죠. 그리고 리와인더는 그걸 막기 위해 태어난 거고요."
"정확히는 컴퓨터이자 인공지능이지. 그럼 레볼루시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나?"
"모릅니다. 어떻게 만들어졌답니까?"
"북한 내전. 그게 시작이었지."
북한 내전이라면 리와인더가 온 평행세계에서 2020년 백두산 분화로 인해 김정은이 죽고 일어났던 내전이라고 했다. 분명 9군단의 리진청이 승리하고 정권을 수립했다고 했다.
"신세계결사라고 들어봤을 거네. 이쪽 세계에서 김정은 암살에 성공하고 현재 함경록을 대통령으로 세운 그 단체지."
"당연히 들어봤죠. 김정은 암살 덕분에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잖습니까?"

"우리 세계에서는 신세계결사가 그 암살에 실패했다는 건 자네도 알 걸세. 그래서 그 뒤로 내전이 났다는 것도 알 걸세. 그럼 여기서 신세계결사는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아, 그럼 신세계결사가 레볼루시아를 만든 건가요?"
"아니. 그 사이에 하나가 더 있어."
"뭔가요?"
"노보미르. 신세계결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도망가서 컴퓨터라는 것을 접하고 만든 공개적인 조직이네.
노보미르는 컴퓨터로 된 공정하고 투명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지. 러시아를 시작으로 미국, 중국, 인도, 남아공 등에 지부를 가진 전세계적인 단체일세.
신청서만 낸다면 아무나 가입 가능. 프로그래밍, 해킹 등 소프트웨어 관련자 및 법률전문가 대환영. 사실상의 비영리단체. 그게 노보미르네."
그러니까 요약하면 신세계결사가 노보미르를 세우고 그게 레볼루시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아, 그럼 레볼루시아는 엄청 규모가 큰 단체군요?"
"아니. 노보미르는 폭삭 망하고 지금의 레볼루시아는 딱 20명으로 이루어져 있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큰 일이 있었지. 어떤 사이비 종교랑 분쟁이 있었네. 그걸로 노보미르는 공중분해되었지."
"헉! 무슨 일이 있었길래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네. 이번에 위례 대지진 일어나면 그 뒤에 모두에게 말할 생각일세."
"그런가요."
살짝 실망이었다.
"다만 말해줄 수 있는 건 레볼루시아의 초기 멤버는 4명이었다는 걸세."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 이거 받게나."
단장님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QR코드가 그려진 명함이었다.
"명함이네요?"
 명함을 공손하게 받았다. 영어와 일본어가 반반 섞여있었다. 高宮 望. 2037년생의 여자였다.
"타카미야 노조미. 화이트 해커일세."
"타카미야 노조미라니,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제니퍼 킴이랑 친했네. 어쩌면 유혜림보다도 더."
그 말을 듣자 테네시 사건이 떠올랐다. 리와인더 지부 습격으로 제니퍼 킴이 사망하고 이로 인해 유혜림이 평생의 PTSD를 입었다고 했다.
"그러면 그분은..."
"걱정 안 햐도 되네. 타카미야는 유혜림처럼 계속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우직했지."
"다행이네요."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근데 이걸 제게 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혹시 내가 실패하면 거기를 찾아가게나. 설명해 줄 거야."
"실패라뇨?"
"내가 죽는 경우 말이네. 지금도 언제 공격할 지 몰라서 목숨줄이 간당간당하네. 위례 대지진까지만 버티면 되지만 보험이지."
"그런가요?"
"이 슈트도 총알은 버티겠지만 C4같은 폭탄은 버티지 못하네. 언제 어디서 죽을 지 아슬아슬하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자네에게 미리 말해줄 건 다 말했으니 가보자고."
"어디로 가요?"
"잠실새내역 쪽에 숙소 하나 잡아놨네. 거기로 가세. 그리고 말해두는데 방어시설은 확실히 해놨으니 걱정 말게나."
"아, 알겠습니다."
천 슈어 단장님이 마지막으로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하나 말해주자면 저쪽 세계의 너에게는 실례를 끼쳤네."
"네?"
"아무것도 아닐세."
천 단장님이 2호선 탑승구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렇게 우리들은 강남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 잠실새내역에서 하차해 숙박시설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리와인더 단원들이 나를 반겼다.

앞으로도 계속 안드로이드의 습격 따위 없이 계속 이런 편안한 분위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2021년 5월 18일 15시 47분, 리히터 규모 5.5 위례 대지진. 규모로만 봐서는 그리 크지 않은 지진이지만 수도인 서울과 딱 붙어있고 그 중에서도 매립지대라 지반이 연약한 잠실이 바로 옆이어서 천문학적인 피해가 발생했던 대지징이었다.
리와인더의 말에 따르면 이 지진으로 인한 토양액상화로 롯데타워가 붕괴할 정도로 큰 물질적 재산적 피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 나를 포함한 리와인더가 대외활동을 위해 구호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만 안드로이드의 습격을 대비하여 미야자키 츠바사와 유혜림은 어느 한 곳에 비밀리에 숨어있기로 했다. 미야자키 츠바사는 전투능력이 한참 낮고 유혜림은 정신적인 문제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녀들이 있는 위치는 천 슈어 단장님만이 알고 있다.
멜리사 푸르니에는 평행세계에 온 것만 해도 싫은데 죽기 싫다며 떼를 써서 결국 빠졌다.

다행인지 평소보다 유동인구가 뜸했다. 아무래도 예언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는 듯 했다. 화요일이고 번화한 시간이 아니긴 하지만 석가탄신일 전날이라 걱정이 되었는데 잘 된 일이었다.

현재 시각 15시 45분. 지진 2분 전이었다. 이제 곧이었다. 잠실종합운동장역 지상에서 지진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때 알림이 울렸다. 안드로이드 레이더에서 나오는 경보음이었다.
이는 다시말해 세번째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송두리째 바꿀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