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헉, 크읏! (휙휙)”



나 이민. 어쩌다 이세계에서 마왕을 무찌르고, 신세계로 떨어지게 되면서 얻은 래버력 0의 용사라는 처참한 칭호를 갖고 이러저런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여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신세계라는 듣도보지 못한 세계에 떨어져서 요근래 정신없던 나날들을 거쳐, 점차 이 생활에 적응해가는 나 자신에게 새삼 놀란다. 모든게 말그대로 새롭기만 하다. 비록 이 새로움들이 온갖 시련들로 비롯한 거였지만서도, 그 마지막에서 본 새로운 인연과 경험이 날 고취시킨다. 반대로 그 경험들을 겪고나서 남은 의문 찌꺼기들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특히, 최근에 있었던 나간들의 이변의 수수께끼도 어딘가 석연치 못한 구석에 자리잡아 있다. 흠····. 어찌됐든 간에, 현재로선 딱히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매일매일을 언제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에 감수하기 위해, 내 나름의 노력을 다하는 수—



“으악! 제발 그것 좀 그만둘 수 없어! 제발, 아악!!”



······어찌됐든 오늘도 평화로운 모험의 연장선을 조금씩 이어나가 본다. 이번에도 별일 없겠지. 아···· 마?



“거기 유령씨. 좀 더 용사처럼 수행에 성실히 임해줬으면 좋겠는데? (웃음)”



피슝 피슝



- “으앗! 도대체가 딴 수행법도 분명 존재할텐데, 왜 자꾸 영탄인지 연탄인지, 알 수 없는 구체들만 고수하는데! 굳이 나까지 끌어들이는 이유를, 욱! 【LV.15/용사의 수호령】


- (아까부터 혜움이 시끄럽게 굴어서 집중할 수가 없다, 끙;) 【LV.0/용사】


- 분명 말했고, 아까 한번 자빠지고 나서 깨우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웃음) 【LV.43/무녀】


- “알고 있으면 난 좀 내버려 둬! 내 역할은 말이지, 힉! (휙) 헉헉, 말하다 죽을뻔 했다아;”


- 그렇기에 더더욱 빠져선 안되지. 왜냐 바로 그 역할 때문이야, 유령씨. 명색이 「용사의 수호령」이면서, 여태껏 훈수둔 것밖에 한 게 없잖아. 용사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원하려면, 적어도 구원할 정도의 힘은 있어야 되지 않겠어?


- “뜨앗! 끄앗! 흥아아앗! (?)”


- 그래서 유령과 유일하게 래버력을 올려주게 도와줄 수 있는 무녀인 내가, 대신 해주고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러므로 이 영탄(靈彈), 즉 영혼에게만 데미지를 주는 이 특수 탄환으로, 주변 환경에 지장없이 오로지 수행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영혼없는 애꿎은 나무들 쓰러뜨릴 일 없이, 후후.

그러니 또 맞고 물에 뜬 시체마냥 둥둥 떠다니지나 말라고? (웃음)


- “설명충처럼 그딴 친환경적인 기술이랍시고 나불대지 말고, 날 그만 저세상으로 보내지나 말라고! 으악!!”


- (애초에 저세상이란 개념과는 동떨어져 있지 않나, 혜움··)


- “그리고 그 말도 틀려! 나는 위기에 빠지고 나서 구해주는 수호령이 아닌, 위기에 빠지기 전에 바른 길로 인도하는 조언형 수호령이야! 알려면 똑바로 알아! 그리고 유령이라 부르지 말랬지! 너, 내 이름 알잖아! (왁왁)”


-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헉헉····.


- 입만 산 걸 보니 별로 힘들지 않단 거겠지? 좋아, 그럼 강도를 약간 높혀볼까? 수행 전에 말한 대로, 용사가 쓰러지면 벌칙이 있어. 기대하라고♥ 아아, 벌써부터 내가 다 떨리네~


- (흠칫)


- “임마, 너 즐기고 있지!!”


- 자자, 좀 더 큰 기술 들어갑니다. 각오하라고, 용사♥ (웃음)



수행을 어느정도 정진해왔다. 언젠가는 닥쳐올 위험을 대처하기 위해서. 다만 수행이라 해봤자 제나가 날려대는 영탄 수십탄들을 연속해서 피하는 단순 대련에 불과했지만, 막상 장시간 지속되면 처음에 딱딱 대치하던 신체는 후에 갈수록 간신히 마지못해 피해다니는 무뎌진 나 자신과 보게된다. 제나가 이리도 수행을 거들어주는 이유는, (절대)신의 계시를 받아 수련을 도와주는 거뿐이라 늘 강조한다. 용사이기도 하고, 덧붙여서 어차피 래버력 0인 까닭으로 공격력, 방어력, 속력 같은 개체치가 올라갈 일이 전무하기에 적의 속공을 빠르게 인지할 정도의 민첩성만 기르면 된다는 계시가, 현재까지도 이어져 왔다. 이런다고 대폭적인 향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의문도 들었지만, 한다고 나쁠 것도 없으리라.

즉, 적의 LV차로 얻는 힘이니 회피만 잘하라는 건데, 하필 곁에 있던 혜움도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전장에서 싸운 적은 없지만 유령이라 아무런 피격 판정도 없는 줄 알았건만, 영적 능력자(제나 같은)에게는 먹히는 모양······ 됐고, 모든 괜찮으니 시끄럽게만 안해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후.



- (수련 때는 아스라이 모드, 은가비조차 안된다고 했으니 별수 없네···)


- 자, 받아라! 대—!


- “안되겠다, 이민! 우리 저너머로 단숨에 뛰어서 회피하자! 셋 셀테니 뛰어!”


- (번쩍) 머뭐? 뛰라고?


- “간다! 하나 둘 셋!”



그때였다. 몸과 생각은 날아오는 탄환을 피해야한다는 본능과 잠시 딴 곳에 붕 떠있던 마음은 갑자기 치고들어오는 혜움의 한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멋대로 움직여 무의식적으로 어딘가로 향해 점프했다. 동시에 매서운 소리와 함께 거대한 구체 하나가 박찬 자리를 스치고 곧장 숲 안으로 자취를 감춘다. 왠일로 미처 인지하지 못한 걸 혜움 덕분에 무사히 회생하였음을 자각하던 찰나,



- 너희들, 이제 그만하고 슬슬 떠나게 준비를···· (부스럭)


- (!)



콰당!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착지하려고 했던 곳에 하필이면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낸 리내와 타이밍 좋지않게 날아오는 나와 세차게 부딪혀 양쪽 다 그만 고꾸라지고 만다. 으으으···. 약간 정신이 혼미했지만, 뒤에 다가올 후안이 두려웠던 걸까. 그 반동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나는 현재, 리내를 깔고 팔로 겨우 땅을 지지한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음을 인지했다. 서로의 몸이 얽힌 채로. 그것도 아주 가까이서.



- ····.


- ····야.


- ····어.


- 이제 그만···· 떨어지지? 【LV.20/마법사】


- 떨어져···? 앗! 미, 미안; 바로 일어날게;;!!


- ····.


- 미안해, 잠깐 정신이 나갔나봐; 그보다도 괜찮아? 어디 다친데는 없어? (뻘뻘)


- ····.


- 혹시 일어나기 힘들어서 그래; 손잡아 줄까? 정말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러다 리내에게 또 혼나겠)


- ······바보.


- 어어? 방금 뭐라고 했—


- (빠직) 이 바보야! 갑자기 뛰어들면 어쩌자는 거야!! 다친 걸 떠나 놀라서 기절할 뻔했잖아! 그리고 바로 일어나지 않고 얼굴은 왜 빤히 쳐다보는데! 으으, 변태용사///!!


- 으아, 진심으로 사죄할게; 부디 용서해줘!


- 됐어! 최악이야, 흥! (휙)


- 리, 리내야; (쉽게 안 풀리겠는데;;)


- “야야, 용사···.”


- 혜움, 전투는 못해도 이럴 때만이라도 수호령답게 뭐라도 조언을····ㅠ


- “둘이 꽁냥대는 건 보기좋은데, 그전에 수호령 답게 조언 하나 하는데 말이지. 앞을 좀 봐;”


- 앞? 앞이라니, 이 상황에 뭔 앞···· (!)


- 제, 제나, 넌 또 뭘하려는 거야!?


- 언제 어느때나 들이닥칠 위기는 극복하라. 빈틈이야. 각오하라고 했지, 용사? (히죽)



그오오



- 설마, 그 떠있는 구체, 이쪽으로 던지려는 건 아니지····? (오싹)


- 어머나, 여태껏 여러 고난들을 극복해낸, 심지어 마왕도 혼자서 무찌르신 용사님께서 고작 이런 거에 위축되는 거야?


- 고작이라니···· 그거 너무 크다고 생각되지 않아;


- 아무렴 어때. 이것도 다 수행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편해. 뒷수습은 알아서 할 게. 벌칙도 겸해서♥


-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쳐, 이민! 리내!!”


- 수행도 실전처럼, 받아라! 대영탄(大靈彈)!



“으아아악—!!!”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분명한 건, 이 외마디의 비명이 우리들 사이에서 들려온 게 아니라는 것과, 제나가 들고있던 단창으로 우릴 향해 구체를 던지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땅에 반사적으로 짚고있던 손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또 반사적으로, 그 비명소리에 심상치 않은 전개를 직감했다.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고정한 곳에 불어오는 스산스러운 바람을 맞은 채로 어떠한 징조를····


(또다시 평온한 일상은 이제 끝났구나 하는 예감을 말이다)









제 29화. 교차점 (1)










우리는 서둘러서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틀어서 곧장 달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가 어리둥절 했지만, 왠지 혼자 멀쩡히 서있던 무녀 제나의 입가에서 아차하는 의성어가 나왔을 땐 보통 일은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다. 제나는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아까 전에 빗나간 아이에 누군가 얻어걸린 걸까?(웃음)” 말을 덧붙이면서 단창 끝에 떠있던 구체가 차차 사그라들더니, 이내 태연한 몸짓으로 우리와 마주봤다. 직역하면 아까 전 내가 혜움 덕에 간신히 피했던 첫번째 탄환이 누군가 명중했을지 모른다는 거다. 숲으로 사라졌던 그 거대한 게······ 부디, 아니기만을 빈다. 그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숲길을 계속해서 나아간다. 그러고 한참있다 걱정섞인 억양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속사포처럼 쏟아대는 리내의 말에 뇌리에 깊숙이 꽂혀 들어왔다.



- 누군가 맞았을 거란 그 탄환 말이야! 설마 생사에까지 지장이 있는 건 아니겠지!?


- (!)


- 글쎄, 어떨까? (웃음)


- 어떨까라니, 너! 만일 네가 말했던 게 사실이면 보통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고! 더나아가 민간인이 정통으로 맞기라도 했으면····!


- 리내 말이 맞아. 이번 건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아. 이건 잘못한 거야. 그러니 그런 태도는 옳지 못해.


- 그래도 용사 네가 피하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안 그래?


- 어? 그, 그런가. 하긴, 내가 피하는 바람에 날아간 걸테니까····.


- “잠깐! 그게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우리 마음 약한 용사한테 뭐라고 꼬드기는 건데, 너!”


- 음~ 용사에게 피하라고 지시하신 유령 씨께서 하실 말은 아니지 않나?


- “그, 그런 (!) 임마, 나까지 꼬드기지 말라고! (순간 모르게 넘어갈 뻔했네;)”


- 반응들이 귀엽네, 우후후. 모두들 그렇게 걱정하지마. 생사에까지 미칠 정도로 대단한 기술은 아니니까. 적어도 영혼만 타격을 입으니, 육신에서 혼령이 살짝 튀어나온 정도로만 그칠걸? 후훗.


- “그런 걸 아무렇지 않듯이 말하지 말라고!! (빠직)”



아마, 제나의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외설적인 웃음기만을 머금은 저 태연한 포커페이스가 새삼 당연한 사실들까지 쉽사리 왜곡시켜 버리는 이능을 불러일으킬 때는 당해낼 자가 없을 것이다. 얼렁뚱땅 넘어갈 발언들을 일일이 수정해가는 혜움의 긴 연설이 끝날 무렵, 어느덧 푸르른 잎사귀들로 가려져 있던 숲의 출구가 서서히 보이기에 이른다. 그렇게 바쁘게 전진하는 발이 숲바깥 선상에 놓일 때, 더이상 나무로 울창했던 숲길은 온데간데없고, 몇몇 돌맹이들만이 나뒹구는 지평선 위로 나아가게 된다. 얼마나 멀리 날아갔기에 단말마에 이르게 한 것인지. 그 거리가 실감이 되지 않다, 속으로 되뇌일 적에



“으악! 뭐, 뭐야, 이번엔!!”



단 몇 보 만에 들려온 외마디의 탄성은 순식간에 모두를 식겁하게 만드니, 곧이어 얕은 사색에 잠기느라 약간 떨구었던 고개를 즉시 반사적으로 들어 소리난 쪽으로 희번뜩 눈을 돌려본다. 그리고 불과 몇 분 사이에 정황이 차르르 빠르게 훑어지나가니 도저히 어쩌할 도리가 없었다. 이땐 정말이지, 심란했다.



- 너희들이 그랬다는 말이야? 정말로??


- 봐봐. 내가 별일 없댔지, 용사?


-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 그 말들이 사실이라면······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게.


- 다시 한번, 구해줘서 정말로 고마워! (꾸벅)



즉각적으로 떠오른 빈말이지만, 다 쓰러져가는 사상자가 마지막으로 온힘을 짜내 토해낸 종성이었다면 이 편이 상황 파악이 훨씬 수월했을지 모른다고 속으로 되물으며, 안도의 한숨까지 푹 내셔본다. 현장에서 직접 경청하면서도 아직도 이해력이 더뎌서 애를 먹었지만, 뜬금없이 진행되어가는 대화를 풀어내려가면서 현장의 흐름을 찬찬히 되짚어가며 차분히 정리를 해본다. 요는 대충 이러하였다.



- 후유, 그나저나 간 떨어질 뻔했거든. 순간 생명의 은인들을 몰라뵈곤 다짜고짜 소리쳐서, 미안하네. (꾸벅)


- 저, 그러니까, 당신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위험에 놓여있었다는 거고, 그것도.


- 대낮에 몬스터들에게 쫓기고 있었다고? 거짓말이 아니고?


- 왜들 그래. 구해준 당사자도 미처 모르던 우발적인 경우라고들 하니 그건 그렇다쳐도, 맞다니까 그러네! 다시 설명해줘? 며칠을 거쳐 다른 마을에서 물자를 조달해서 다시 본거지로 귀환하던 찰나에! 왠 몬스터들이 때거지로 달려들기에 냅다 도망치다가 하필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쫓아오던 놈들에게 포위되어 있었거든.


- 그런데 우연히도 어디선가 날아들은 커다란 무언가에 부딪혀 대폭발을 일으키더니 몬스터들을 단번에 승천시키고, 알고보니 그 출처가 멋모르고 던져 헐레벌떡 온 우리였다··· 는 거지?


- “이봐! 은근슬쩍 ‘우리’로 책임 전과하지마!”


- 듣고보면 그것도 얼추 맞지만, 흠, 약간 아쉬운 95% 가치 정도에 대변이랄까. 남은 5%는 끝부분에 ‘곤란한 상인을 구한 것도 인연이니, 이왕 몸상태 살필 겸 오늘 새로 들여놓을 신상품도 둘러볼까?’라는 식의 센스를 덧붙였다면 최고의 가치를 호가했을 텐데, 하하.


- 호, 그런 건가?


- “뭐가 그런 건가야! 저자식, 사실 우리하고 아무 관련없는 놈 아니냐? 안 그러면 어찌 저리도 태연할 수 있는 건데!”


- 위험했다면서 팔자 좋게 농담으로 승화시키는···· 능청꾼 사기 판매업자 씨? (웃음)


- 사기 판매업자라니! 이거 첫 대면의 틈새 광고를 그런 식으로 받아넘기면 은인이라도 내 프라이드가 용납지 못한다고. 살다살다 단 한번도 사기를 친 적은 없습니다. 그야 상인은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나름 대중에서도 신임을 받거든. 이래뵈도 좌우지간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정당한 거래를 주고받는 넉살 좋은 소시민이니, 함부로 판단하는 건, 아니되올시다! 응응!


- ······확실한 건 평범한 소시민은 아닌 것 같네. 다행인, 걸까?


- (엄, 뭔지 몰라도 이사람 제대로네···· 오래 대하긴 여간 힘들겠어;)


- 그러니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긴 하니,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물론 부담스런 구매 권유나 상품 시사는 일단락하고, 사례금은 현재 대량 구입을 마다하지 않고 온 터라 금전은 빠듯하고····.


- (이이상 대면하면 왠지 피곤해질 것 같으니 슬슬···) 괜찮아요! 사례는 무슨. 저희 때문에 다치시지 않으셨다는 건 만으로도—


- 응? 아니. 어마어마한 사례 같은 건 이쪽 사정상 여의치 못해서 생략하고, 보아하니 당신들은 모험가 일행 같으니까, 좋아.



“다음 예정지까지 편안히 모셔다 드리리!”


“······네?”



그러더니 쓰러진 말이 끌고있던 꽤나 큼지막한 마차 안으로 곧장 들어가서는 덜컹거리는 소음이 연달아 들려오더니 치료제라도 찾은 것인지 말을 일으켜 세우곤 신속히 조치를 취한다. 몇 분 있다가 말이 다시금 발을 구르며 금방 기운을 되찾자 ‘상인’이라 자처한 그 남자는 우릴 보곤 타시죠하는 의연한 몸짓을 재차 시전했다.

이윽고 우리를 끝내 태운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서 들었던 것처럼, 대량의 물품이 꽉 들어차인 짐칸에 겨우 3인이 비집고 들어가 중소 물품들을 등받이 삼아 기대어 앉았다. 솔직히 제나의 소름돋을 만큼 태연하게 저지른 실수 문제를 해결하러 온 건데, 어쩌다가 이리 됐는지 고사하고, 좀 전에 혜움이 다그친대로 영 이상하리만큼 낙천적인 그에 대한 찜찜함과 극소의 불신으로 쉽사리 동작하지 않았건만. 방금 전 조치를 취하던 그를 초연하게 바라보던 발단의 원초, 제나가 사람 좋다는 갖은 구실을 들어가며, 어차피 다음 여정지로 가던 참인데 잘됐다며 히죽이는 눈매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래,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내 덕에 운좋게 횡재 받네. 거봐, 별일 없댔지? 하는 양 과시하는 눈초리가 영 부담스럽기만 하다; 결과적으로, 리내와 혜움의 동의 의사를 밝혀 이끝내 떠밀려 탑승했다만, 왜이리 불안한 걸까. 이 갑작스런 상황에 적응이 들 댄 걸까.


(이러한 전개로 간다는 건, 적어도 고요했던 평화는 이제 없단 걸 의미하는 걸테니···)


창을 내지 않은 숨이 탁 막힐 듯한 외딴 천막 안에서, 나를 기준으로 오른편에 탁트인 방향에 말을 타지 않고 좌석에 등지고 앉아 고삐로 말을 끌고있던 빼빼마른 그 남자는 이제야 뒤늦게 자신을 자칭 도매상 ‘너울’이라고 냉큼 소개하면서, 잇달아 우리도 각자 자신의 신상을 서슴없이 밝히며 도착할 때까지 적당한 담소를 나눴다. 자신이 이 일을 한지 꽤 돼서 여러모로 베테랑이라는 둥, 실은 그보다 더한 모진 사태도 여러번 겪어서 익숙해졌을 뿐더러, 그런 게 적성에 맞다는 뜻일 거라며 어떤 돌발 상황이라도 상인 포지션을 잃지 않을 거라는 둥, 전반적으로 자기 신념과 처지를 적절히 배치한 인생관을 듣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고개를 굳이 돌리지 않고 듣고있던 그의 이야기 속에서 느닷없이 부자연스러운 문장 하나가 삽입됐을 땐, 우리의 이목은 다시금 그가 있는 쪽으로 쏠렸다. 정정하자면, 그가 보고있던 풍경 쪽으로.



“옳거니! 드디어 보이는 구만.”



그 말이 들리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왔던 풍경은 평소와 다를바없는 규모는 작고 아담한 축에 속하는 반면에 언제나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던 마을을 상상했던 것과 달리, 색다른 광경을 몸소 자아내며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어떤 표정이었는지 보질 않아 알 수 없었지만 나만큼은,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 걸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첨탑형 지붕들과 그런 높이를 무시하고 건물 본체를 빈틈없이 막아서서 가리는 장대하고도, 육안으로 보기에도 두껍다는 표현보다 ‘거대하다’는 수식어가 실감나는 하얗게 칠해져 있는 거대한 장벽.  이색적인 진풍경은, 감회가 새로웠다.

하늘도 꿰뚫을 법한 목적지로 향해가던 마차 주변을 슬쩍 얼굴을 내밀고 둘러보니, 여태 현재 상황에 무관심 했음을 대변하듯 이미 우리는 얼마전부터 좁은 길목이 아닌, 큰 거리에 들어서 있었음을 깨닫게 됐다. 마침내 말발굽 소리가 잦아듦에 따라 느려져가던 마차는 어느 한 지점에서 우뚝 서있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천천히 비좁은 데에서 엉덩이를 들어 내리려던 그 순간, 등지고 앉아있던 너울은 상체를 반쯤 틀고 얼굴을 들이밀더니 아직 내리지 말라는 제지하는 어투로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며 신호를 보낸다. 순간 어리둥절해진 우리들은 저 앞에서 북적북적 대는 인기척을 뒤로 하고 이어서 너울을 바라봤다.



- 안돼 안돼. 지금 내리시면 안된다고. 곤란하거든.


- 예? 내리면 안된다니? 이젠 혼자 걸어가도 되는데···.


- 이런, 표정들을 보아하니 이곳에 온 전적이 아예 없는 거야? 그럼 너희들, 굉장히 운이 좋은 건데? 그렇지 않으면 거의 1%의 희소가치마저 묵살됐을 거거든.


- 운이 좋다니? 그게 무슨 의미야? 온적이 없는 거랑은 또 무슨 소리고?


- 흐응~ 혹시 저곳에 출입하고 어떤 밀접한 관련이라도 있는 걸까나. 전적을 언급하신 걸 보면? (웃음)


- 맞아. 특히나 이 도시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게 통제시킨 구역이거든. 나오지 말란 것도 대충 그런 뜻에서 한 얘기였고.


- “설마했더니, 저 높게 쌓인 장벽이 변방에 보완을 의미하는 거였구만. 역시나.”


- 통제라니. 왜 통제를 시키는 거죠? 거쳐온 다른 장소들은 괜찮았는데? (의아)


- 이 지역에만 오랫동안 밟아왔다면 납득이 가는 반응들이야. 알겠어. 토박이시라면 설명이 필요할 테니, 잘 들어. 여긴···.



“『국경 도시』거든.”



국경 도시. 너울은 손을 허공에 이리저리 휘저어가며 최대한 간략히 설명했다.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이곳, 국경 도시는 말그대로 나라와 나라 사이를 횡단하는 도시로써 수많은 주민들이 이 안에서 윤택한 삶을 꾸려나가는 일반적인 거주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가 동시에, 국경 지대를 견주고 있는 만큼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기에 이에 관한 통행을 관리하는 이른바 ‘출입국 심사’의 기능도 같이 병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아무나 들여보내주지 않으므로 무작정 온다해도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탈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입장할 자격을 얻기 위해 까다로운 수속 절차를 거쳐도 정해진 기간에 최소한 몇년은 있어야 발을 들일수 있다는 구설을 반쯤 주워섬길때, 뇌리에는 난공불락의 요새의 냉엄한 인상으로 박혔지만 양국의 횡단과 국경 수비 같은 주요 지대가 마땅히 가져야 할 권한이기도 할테고, 특히 이주, 이민 같은 문제는 내가 원래 살던 현세(*1화 - 인류절반사태 참조)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졌던 부분이기에,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리라.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끝물로 드는 생각은 이 세계에도 각 지역마다 국가가 존재하는구나 하는 새삼 당연하면서도 어딘지 어색함 감도 물씬 든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면 좋지. 일순간 밀려오는 걱정에 몸을 서릴 때, 너울은 난처한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어갔다.



- 워낙 입경 심사가 삼엄해서 이 도시에 연줄이 있다면 내가 여기 거주민이라 단체로 들어가는 게 편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전혀 온 적이 없다하면, 으음, 그건 그거대로 난감하네.


- 그럼 어떡해! 우리보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라는 거야? 애초에 당신이 끌고와서,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니 돌아갈 수 조차 없다고!


- (탑승만 안했어도 이런 일도 없을 텐데 말이지; 하지만 리내 말대로 현재는 돌아갈 수 없는 노릇이니···) 정말 어떻게서도 들어갈 방법이 없는 건가요?


- 움,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것도······ 같거든?


- 다행이다. 방법이 있다면 이제 실행만 하면 되겠네. 어떤 방법인데?


- 그러게. 여지껏 난처하듯 굴면서 문득 떠오르신 그 묘책이 뭘지 궁금한 걸.


- 어, 그게···· 그렇게들 응하면 저···· 진짜 미안하지만····.


- ?


- ······플레이 좀 부탁해도 될까?


- 네? 뭐라고요?


- ····플레이 좀.


- “뭐라고 웅얼대는 거야, 쟤?”


- 목소리 좀만 크게 내봐, 못 알아듣겠거든?


- 그러니까, 그, 그····.


- 뜸들이지 말고 또박또박 말하라고! (빠직)


- 「노예 플레이」 좀 부탁드립니다!


- 어머나♥



······네? 그리고 뒤이어서 빠르게 붙인 부연설명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신임을 잃는 것보다도 리내에게 목숨을 잃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 법한 연출에서 간신히 넘겨 무사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노예···· 플레이라니, 무슨?



-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러울 만큼, 오해를 살 일이 없었으면 좋겠거든. 방금 그쪽 아가씨에게 호되게 당할 뻔했지만, 하하;


- 뜻과 의도는 알았는데, 굳이 그런 방법을 써야할 이유가···.


- 현재로선 마땅한 방법이 이거 하나 밖에 없을 뿐더러, 그나마 제일 문안한 방안이거든. 노예 제도 자체가 다른 국가들은 이미 폐지된지 오래지만, 유일무이하게 아직까지도 노예 개념이 남아있는 지역이 여기지. 무, 물론 난 노예는 상품으로 절대 취급 안 하지만, 간혹 일을 하다보면 거래품으로 오기도 하거든. 즉슨, 상품으로 치고 같이 들어가는 거야. 때마침 받아놓고 안 쓰고 묵혀둔 구속용품이 상비되어 있는 터라. 아하하.


- 그, 그건 좀 아니잖아!! 그, 그래. 검사 같은 거 한댔지! 그럼 들킬 가능성도 있다고!


- 아, 그건 걱정마. 노예는 따로 지정된 표식 같은 게 없어서 구별할 수 없거든. 지역 분위기 상 먹혀드는 부분도 있고, 성품들은 인정했고, LV나 상태만 양호하다면···.


- “어이! 그딴 걸 아무렇지 않는 양 지껄이지 마!”


- [참고로 안 보임] ······앗! 이거 또 곤란하게 됐네.


- 또 뭔데. 이상한 소릴 지껄이는 거면···.


- 그게 아니라; 아무리 속이는 거라도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어야 하는데, 두 분은 괜찮은데, 거기····.


- 후후, 내 래버력 때문에 그런 거구나. 【LV.43】


- 어, 노예라곤 해도 상류층이 아니면 그정도의 LV수치는 납득시키기 어렵거든. 제아무리 전투 용병이라도 2-30정도로 그치는 게 보통인데, 끙.


- 우훔, 그런 거라면 괜찮아. 내게 마침 딱 맞아떨어지는 좋은 수가 있거든? 그러니, 구속할 때는 살살해줘~♥


- ····에///?



그리하여 그의 탐탁지 않은 거북한 제안을 할 수 없이 받아들이고, 마침내 준비를 마친 우리는 저 앞으로 득실거리는 인파를 마차로 천천히 헤쳐나가면서 새하얗게 둘러싼 벽이 뚫린 입구마저 막아서고 있는 육중한 철제 게이트 앞에 우뚝 섰다. 철제 게이트의 좌우를 전체 크기로 포괄해서 말하면 아주 약간 틈을 벌려 통로를 확보하여 그 사이로 들어가 입경 절차를 받는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정면의 통로는 이미 십여명의 무장한 기사들로 철저히 출입을 제한되어 있었고,

특이하게도 심사를 거치는 방향이 옆측으로 꺾어야 비로소 어마무시한 규격을 재치있게 활용한 게이트 옆면 『국경 감식소』라는 입간판이 보인단 걸 알 수 있었다. 심사 절차는 거의 다 너울 혼자서 처리했다. 다음 최종 관문임을 암시하는 정면에 크게 떠있는 마법진을 소수가 스스럼 없이 통과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나중에 그에게 듣기로는 LV수치, 상태를 감식하는 구간이었고 그가 감식관에게 막 소유 물품(노예)으로 등록해놓은 직후라 조마조마했었지만, 무사통과해서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제나가 무슨 술수를 쓰긴 했는지, 여차 제나의 LV를 확인해보니 26? 무심코 모두의 수치도 봤는데, 너울을 제외한 나머지가 어째선지 LV.26으로 동일했다. 본인이 그러길 『식신』이라는 일종의 주술이라던데, 흠. (아무튼 난 해당 안된다며 못 박아뒀지만)

아무튼 차례차례로 수순을 밟은 끝에 드디어 답답했던 감식소에 빠져나와 게이트에 설치된 간이 출구로 도시 안에 무사히 들어설 수 있었다.



•••



마을, 아니 처음 들어서는 대도시의 거리는 상당히 특색있는 풍경이었다. 한산한 길목으로 우리를 태운 마차는 양옆으로 무섭게 세워져있는 신식 건물들 사이로 끼고 마차 바퀴는 돌아갔다. 북적거리는 이 도시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빽빽한 인구 밀도를 보여주는 듯 했다. 시내로 적절히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띄엄띄엄 보이는 시민들의 활기를 본보기 삼아, 끝없이 이어지는 삐뚤삐뚤하게 늘어선 제각기 다른 색조 양식과 이전에 게이트 바깥에서 본 첨탑형 지붕을 얹은 올곧게 세워진 거탑, 그리고 광장 부지로 들어서며 펼쳐지는 사방팔방 걸쭉하게 뽑아대는 행인의 발성에 어우러진 정겨운 상점가까지, 천막을 겨우 부여잡고 빼놓은 얼굴에 후회없이 눈을 호강시켜 주었다. 잊을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드르륵.

질릴래야 질릴 수 없던 마을의 경치를 뒤로하고 너울이 운영하는 상점의 미닫이 문을 열고 조심히 안으로 들어가자, 가지각색의 도구와 상품들만이 낮은 선반 위로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빼곡히 즐비한 물품들을 바라보면서 해방된 발을 기념삼아 걸어간다.

예전에 들렸던 마을 상점에서도 볼 법한 눈에 익은 도구들을 시작으로, 어디다 쓸지 궁금한 잡동사니 전반, 초창기 리내가 지니고 다니던 회복 병 및 치료 도구들, 뿐만 아니라 전에 이세계에서도 봤던 간식거리들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어라, 이건? 더 놀라운 건 현세, 그러니까 내가 살던 세계에도 있던 불량식품들까지 같이 놓여있었다! 아, 현세와 이세계가 결합된 세계라고 했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닌가. 아니, 어디서부터 놀랄 일이 아닌 건지····. 옆에 있던 제나와, 특히 리내의 눈이 반짝거린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상품이라도 있는 걸까? 하나 정확한 건, 리내는 한참을 아까 그 간식 선반에서 눈을 때지 못했다. 옛날부터 군것질 같은 걸 좋아하기는 했는데···· 아무튼 지금은 입장이 입장이니 우선 들어가고 나서 마저 둘러보도록 하자. (근데 모두가 말 걸기 무섭게 보고있어서 나 먼저 들어가야 겠다)

덜컥. 바깥 문과 달리 여닫이 문으로 된 문고리를 가볍게 돌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업 용도로 각종 물건들로 이질감과 동질감으로 혼잡해보였던 데와는 다르게, 그 안은 지극히 평범한 가정 집의 형태였다. 장사와 소시민의 삶이 베어진 주거지를 겸하는 저 너머에서, 왠지 모를 맛좋은 향기가 풍겨져왔다. 부엌에서 누가 요리라도 하나? 여기서부터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 가지런히 벗어놓으려 아래 쪽을 살펴보자, 꽤나 요란한 인기척이 앞편에서 느껴져 왔다. 역시 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무심히 신발을 벗는 것보다 일어서서 인사를 해볼까. 먼저 들어갔다 나온 너울이 귀띔 해줬을지도 모르겠지만.



“안녕하세요. 잠시동안 여기서 신세 좀 지겠습····?”



ㅇ? 뭐지? 굽혔던 등을 펴고 공손히 인사를 건네려고 했는데, 오다말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뻣뻣이 서있는 한 남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짧은 단발로 몸에 앞치마를 둘러맨 걸 보니, 아까 부엌에서 요리하던 것도 저 아이일까? 기특하네. 그나저나 보아하니 상당히 굳은 기색인데, 왜 저러는 거지, 저···· 아! 알겠다.



덜컥



- 뭐야~ 용사님도 아직 안 들어가셨어? 내 가게를 둘러보는 건 상관없지만, 아이쇼핑 문제는 보통 손님 입장일 때만이고, 일단 대접 당할 분께서 그러고 서계시면 모시는 입장에선 불편하거든. 자, 빨리빨리들 들어가자고.


- 이, 이····! (화들짝)


- 응? 어라, 슬이하고 인사 나누고 계셨구나. 이거 도중에 실례를 범한 건가?


- (슬? 저 아이 이름인가)


- 뭐야, 거기 누구있어? (슬쩍)


- 어머, 귀여운 꼬마네, 안··· 어라?


- 아아, 방문객이 찾아온다는 얘기를 안해줬으니 놀랄만도 했겠어. 


- (그걸 미리 얘기 안하면 어쩌자는 거야! 순간 불법침입한 꼴이 됐잖아····!)


- 먼저들 인사해. 이 아이는 슬이라고, 나와 동거하는···· 응? 왜 그래 슬? 느닷없이 모르는 외부인이 온다는 걸 말 안해줘서 겁먹은 거야? 괜찮아. 이사람들, 아주 좋은 분들이니 안심해도 돼! 또 내 덕에 여기 들어올수 있어서 은근 들떠있는 느낌이니까, 에헴!


- (반은 등 떠밀려서 온 거지만 뭔가 기세등등··· 아니 그보다도 이사람····)


- ····.


- 그보다 말이야, 많이 보고싶었지~ 오늘은 말이야 거래도 성공적으로 좀 일찍 끝내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도중에 몬스터를 만나는 바람에 처참히 무산 아니, 목숨이 좌지우지한 상황이었거든? 이때! 딱 이분들이 나타나서 구해주는 덕분에 구사일생····



“있다아아—!!!”



눈치가 없는 것일까. 아님 종종 빠트려대는 사람인가.

어떻게 저 아이의 표정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든다는 것도, 참다못해 날아드는 작은 머리박치기에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단 걸 겨우 눈치챌 정도면 보통 둔한 게 아닐수 없다. 그야 당연하다. 우리 모습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던 거였다. 수갑으로, 꽁꽁, 채워져 있었던 상태. 분명 불과 몇분 전에 이렇게 말하고도 갔었다. ‘아무리 찾아도 수갑 열쇠 하나 말곤 못 찾겠으니 되는대로 풀 수 있는 데만 풀어주고 나머지도 빨리 찾아보도록 노력하겠다.’ 그렇다. 우리는 완전히 풀린 상태가 아니었다. 발목만 간신히 풀어서 걸을수 있는, 즉 애석하게도 손목의 수갑만은 단단히 쇠사슬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 과연 모르는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데, 자세히보니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보고···· 무슨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어린애가; 이후 너울은 ‘슬’이라는 남자 아이에게 대통 혼나는 연출이 반복 됐고,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던 우리의 손목도 곧 해방됐다. (한바탕 대소동이 일고 갔다;) 그러나 저러나 아까부터 저 두사람····.



- 있다? 없다? 있다! (흥분)


- 알겠어, 알겠다니까; 다신 안 그래. 믿어주라. 이래뵈도 청렴한 사업가인 거 잘 알잖····


- 없다! 있다, 있다!! (버럭)


- 으아아, 알겠습니다, 시정할게요! (뻘뻘)


- (???)



····무슨 암호문이라도 써서 다룰 만큼 중요한 대화라도 하는 건가? 싶었다. 처음 몇마디에는 그렇게 큰 의의를 두지 않았는데, 계속 이어지다 보니 그 이례적인 광경에 신경이 쓰였다. 좀처럼 보기 드문 열띤 대화 현장이 어느정도 식어가고 응어리만 남은 입을 삐죽 내민 슬은 처음에 나온 부엌 쪽으로 다시 모습을 감춘 후, 의문을 생각하는 통에 그렇게 혼나고도 우릴 향해 만면에 미소로 바라보던 너울은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던 양 자연스레 궁금증을 풀어줬다.



- ····예? 실어증이요?! (깜짝)


- 그래. 근데 저 크게 문제 삼을 건 아니지만, 목소리를 약간 낮춰주면 안될까?


- 네? 앗!


- 하여간! 용사 너는 얼빠진 부분에서 꼭 매를 부르더라. 눈치도 없어? 애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 미안; 일부러 소리내서 얘기하려던 건;;


- 알고있어. 남들이 듣기에도 결코 평범한 건 아니니까 말이야.


-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아님, 더는 우리가 관여할 사항은 아니려나?


- 아니, 그렇게 말 안해도 슬이하고 나는 이 도시로 상주하면서 만나게 된 동거인일 뿐이라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몰라. 본인도 그점이 꺼렸는지 동거한지 꽤 됐지만, 한번도 거론된 적도 없고.


- 그렇군요···· 그래도 저, 실어증이라는 건 말을 아예 못하는 병이 아닌가요? 아, 그러려던 게 아니라;


-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응응. 처음에 슬이도 아무 말도 못했거든. 그런데 어찌저찌 돕고 살다보니까, 자연스레 말을 하게 되더라고.


- “거참, 특이한 관계구만. 그런데 고작 몇마디 말로, 알아듣는 쟤도 특이한 걸.”


- 그렇네. 슬이의 말 뜻을 바로바로 캐치하는 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 있겠어. (웃음)


- 그 말투 말이지? 아직 말을 완벽히 틔운 게 아니라서 있다, 없다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걸 자신도 자각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해. 왠만한 의사정돈 100%는 아니고, 90%정도 가치를 끌어낼수 있···


- 있다. 있다! (불쑥)


- (깜짝) 어, 언제 왔어. 슬이야, 깜짝 놀랐잖아; 어어, 밥이 다 댄 모양이네. 자, 어서들 식사하러 가자고.



아마 그는 같이 산 세월만큼 소년에 대한 애정도 깊다는 걸 느낄수 있었다. 이때, 마침 부엌에 있던 슬이가 본인 이야기라도 듣고 찾아온 것인지, 곧장 우리 앞에서서 해맑은 미소로 마주보고 작은 입을 땠고, 우리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 둘과 대화를 재개한다.



- 식사라, 설마 슬이가 다 요리한 거야?


- 이, 있다///


- 이런, 슬이가 칭찬들어서 부끄러운 모양인데~ 응, 나도 요리는 좀 하지만 슬이의 요리는 워낙 빼어나서 비교조차 안되거든, 하하!


- (!) 없다! 없다!


- 아야야, 왜그래. 그렇게 겸손할 필요없잖···· 아야야야, 알겠어. 항복, 항복!


- 우우우···· (부끄)


- 아아, 슬이는 부끄럼쟁이구나, 후후. 놀려먹기 좋은데? (히죽)


- 어, 없다!


- “넌 기특한 애를 놀리면 좋냐? 하여간 별종이야.”


- 우훗, 그래도 서로서로 대면하면서 친분을 쌓는 거 아니겠어? 반면 유령씨는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맛있는 밥도 못 먹잖아. 아까워서 어째~


- “시꺼! 굳이 말 안해도 가슴에 맺힌 나름에 한이거든! 고작 말 걸 수 있는 놈이 저녀석이라니, 으흑!”


- 유감♥


- “으악!!”


- 있나···? (움찔)


- 아, 내 주변에 유···· 아니 수호령이 있어서 서로 대화하는 거야, 무녀거든.


- 아아, 어쩐지 자꾸 허공에다 대고 얘기하길래 뭔가 했네. 응응, 무녀였구나. 어쩐지.


- 네. (그래도 제나의 악취미는 도로 넣어줬으면;) 그나저나 슬이 참 대단하네요. 제 어릴 적도 저렇게 가사 일하는 건 힘들텐데. 같은 남자로서 존경스럽네요.



보다보니까 실제로 옛날 시절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저렇게 어렸을 땐 부모님하고 조금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유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외롭지 않았으니까, 저 애처럼. 환경이 여의치 않아도 언제나 가족이 있었다. 소꿉친구 리내도 항상 곁에서 함께 있어줬다. 그러고보니 리내도 상점가의 딸이었지. 그래서 계속 슬이를 앳된 눈으로 바라본 걸까. 그런가, 약간의 목표라 할지 의지라 할지 알 수 없는 감정 하나가 맴돌았다. 마왕을 처치하고, 여행을 계속하는 여기까지 도달하게 된 당위성을······ 보고싶다. 나의 가족과 이웃들이. 리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만, 리내는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지만···) 그래도 시련을 극복한 건 이세계의 존속을 기리기 위함 임을 깊이 새기지만, 아무래도 진심은···· 이러다 울컥할 것 같다. 진정하자. 지금은 정세가 바뀌었고, 다르지만 가족은 분명 이 신세계에 살아있다. 갑자기 진지해진 것 같네; 짧은 시간이라도 여러 생각을 할 동안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건···· 어?



- 저, 왜들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 방금··· 뭐라고 했어, 용사?


- 어어? 그, 내 어릴 적도 저렇게 가사일 하는 건 힘들다고···.


- 아니, 그 다음 말.


- 그리고 같은 남자로서 존경스럽다고····


- 풉!


- 야야, 용사 너 정말···· 하아.


- ??? 에? 내가 혹시 말실수라도···?


- 저, 저 미안한데, 그 말 취소하는게 좋아. 그, 그 풉! 그게 아무래도 착각하고 있는 것 같거, 푸붑!


- 예? 착각이라니?


- 아직도 모른다 말이야, 풉! 잘 들어. 스, 슬이는 귀여운 소년이 아니라 예쁜 소녀라고.


- ····


- 여자라고, 여자.


- ···예?



“정말이예요?!”



아, 망했다. 여기서는 자연스럽게 수긍했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가식이 아닌 금시초문이었기에 당황한 기색을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발산한 건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보다 한시 바삐 수습해야 한다. 방금 한 말에 집안이 웃음소리로 멈추지 않는 와중, 이 중에 웃지못하는 사람은 나말고, 실망한 눈초리로 경멸하며 쳐다보는 리내와 또 등을 돌린 채 한참을 경직한 슬····



- 저, 저;


- 푸하하하! 아, 아니 그흐으, 그럴수도 있지ㅋㅋ 나도 얼핏 슬이를 볼 때면 든든한 가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니까ㅋㅋㅋ 이해해, 이해해~


- 그, 그래도 제가··· (뻘뻘)


- 답답하네! 당장 슬이한테 사과해! 잘못했다고!


- 알겠어; 저기 슬;;


- “근데 보자마자 한치에 망설임도 없이 남자라고 하는게 이민답다 해야할지, 용사답다 해야할짘ㅋㅋㅋ”


- 그런게 아니라니까;;


- 이거, 내가 장난치기도 전에 바로 실행에 옮기다니 보기보다 용사, 선수네? (히죽)


- 정말 그런게;;


- 당장 사과 안하고 뭐하는 거야! 맞고 싶어? (빠직)


- 아, 아니 알겠어; 저;


- 다음번에 오해없도록 머리 좀 길러야 겠다. 100% 가치의 여성성을 어필하려면ㅋㅋㅋ


- 아니, 아니; (!)


- ····다.


- 저, 슬이야; 그게 아니고;;



“있다아아아아—!!!”



이후로 나는 너울이 말한 슬이의 마지막 외침이 자신은 남자가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부정하려다가 흥분한 나머지 실수로 내지른 것이라 내게만 조용히 귓속말로 전해주었다. 그 자신은 여자에게만 있는 ㄱ— 됐다. 더이상 생각했다가 내 죄가 얼마나 중죄였는지, 또 모두가 못 알아들은 것에 이토록 감사히 여겨야 했는지 자각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 일로 슬이가 왠지 거리를 두는 것 같다. 진짜 과거의 날, 묻어버리고 싶다! 일단 반성하자······.



•••



“그러니까 내 말은—“


“알겠어, 알겠다니까.”


몇 시간 후, 대충대충 혜움의 대사를 받아넘기며 처음 맞는 대도시의 거리를 으레 위풍당당, 아니 어슬렁어슬렁, 재잘재잘거리는 혜움의 따가운 입담을 곁에서 들어가며 길을 나서고 있었다. 한 손에는 손수 그려준 약도와 또 한 손에는 장바구니와 그 속에 담긴 메모지를 들고서 나홀로 길을 나선다. 이래저래 이 편이 훨씬 편하긴 하지만, 이 상황이 오기까지 참으로 긴 사건 하나가 끼어있었다. 하하. 어디 창피해서 말도 못하겠다ㅠㅠ 이리하여 심부름을 떠나게 된 우리 둘. (실상은 한 명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렇게 한가롭고도 다채로운 사거리를 걷고 있던 중이었다. 시끄럽지는 않으면서 세련된 구조물과 양식들로 시선을 사로잡는 이곳. 시장거리. 본 상점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아 도시에 익숙치 않은 나라도 부담없이 자유로이 시장 이곳저곳을 관광할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 옆에 떠다니던 혜움은 별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이윽고 점차 시내의 물결에 휩쓸려 가장 난리법석을 치기에 이른다. (하긴 둘러보고 싶다고도 했으니) 이때 한가지 알아둬야 할 격문마저 잊은 채로 나돌아다닌 게 잘못이었을까, 아님 생소한 나머지 일생일대 처음 겪는 광경에 너무 취해있던 걸까. 그러나 결국은 내가 내뱉은 말을 바로 주워섬겨야 했고, 이 계기가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 될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명심하자.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거듭 되새기기로. 꼭.

하지만 사건은 이미 일어난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거기, 비켜 비켜 비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