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그렇습니까."


 "뭘 그렇습니까?!"


 나의 문법 따위 개나 줘 버린듯한 대답에 캐롤라인은 콧방귀로 짧게 답하고서는 손에 든 흉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뒤로 던져 버렸다. 리돌은 아직도 식은땀을 흘리는 내 모습을 보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민재는 그녀가 오도된 사실을 알기에 너무 부지런했다. 나하와 놀면 미래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넌 좀 있다 얘기하자."


 잠시 동안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많은 일이 발생하였다. 캐롤라인은 나를 좀 더 확실하게 끝장내버리고 싶었는지, 나를 지나쳐 부엌에서 무언가를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왔다. 언제 부터인가 계속 집안에 놓여 있는 버려진 후라이팬을. 그제서야 리돌은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눈치챘고, 캐롤라인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재차 물어보았다. 상황 참작이 모두 된 것은 그 잠시 이후였고, 다행히 내 머리통과 후라이팬이 도킹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다.


 "뭐, 오늘 일은 혹시라도 민재 씨가 리돌 양을 해코지한다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시뮬레이션 정도로 생각해 두시면 되겠습니다." 


 "어떤 시뮬레이션이 목숨이 왔다갔다 해요?"


 "물론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신다면, 리돌 양을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도 생기지는 않으시겠지요."


 "사람 말을 아예 안 듣고 계시는구만."


 이제는 이 반응이 아예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다. 왜 이 불한당 패거리는 사람 말은 전혀 듣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해 대기 바쁜 것인가. 나는 도대체 무슨 잘못일까. 


 "민재 씨, 원래 공무원 준비 하고 계시지 않았나요? 이런 계약서가 왜 필요한 거죠?"


 어느새 캐롤라인은 내 책상 위에 있는 기업 자료들을 손에 들고 훑어보고 있었다. 후루룩 종이들을 넘기는 표정에는 의아함이 묻어 있었다.


 "알 바 없잖아요."


 깜짝 놀랐다. 느닷없이 내 입에서 나오는 퉁명스러운 말에. 이제는 그냥 나도 정상적인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지금 무언가를 친절하게 설명하기에는 내 마음은 너무나도 너덜너덜하다. 그냥 저 아줌마가 빨리 내 방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캐롤라인은 나의 무시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말을 흘리고서는 보던 자료들을 책상 위에 두었다. 그러고서는 식탁 위에 두었던 봉지에서 돈을 꺼내어 자신의 가방 안에 넣어 두고서는, 다시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자, 민재 씨가 말씀하신 대로, 금액은 원래대로 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을 잠시 멈추었다. 무언가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다지 개의치는 않는다는 듯이. 뭔데? 사람 뻔히 보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아닙니다."


 사람 감질나게 하네. 나는 짜증이 배어 있는 말투로 되물었다.


 "그리고, 뭐요?"


 다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캐롤라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굳이 다시 물어보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의 민재 씨에게는 별로 의미 있을 만한 말이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운을 띄운 캐롤라인은 다시 책상 위에 둔 계약서를 한번 흘끗 다시 쳐다보았다.


 "한 번에 두 개의 별똥별에 소원을 빌 수는 없는 법이죠. 한국에서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다고 하던가요."


 "네?"


 "그냥 이렇게만 이야기해도 아마 알아 들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민재 씨는 자신만의 계획을 갖고 행동하시는 분이라 믿기에, 굳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아, 네..."


 "결과가 잘 나오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만."


 

 캐롤라인이 떠나자마자, 천장 사이 틈새로 모습을 감추었던 나비는 사뿐히 침대로 내려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리돌의 품에 안겨 고르릉거리기 시작하였고, 리돌은 조건반사적으로 나비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주군이시여, 저 인간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모릅니다. 캐롤라인은 이미 부드럽게 떠났습니다."


 "저건 부드럽게 떠난 게 아니라 쇠망치로 한 대 때린 것 같은 모양새입니다만."


 나비는 이상하다는 말투로 리돌에게 말을 건넸다. 머리를 식탁에 박고 움직이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고서는 그렇게 말한 듯 싶다. 나비의 비꼬는 듯한 논평에도, 나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다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방금 나비 녀석이 말한 것처럼, 무엇엔가 얻어맞은 듯한건 확실하다. 다만 그 말이 날카로웠을 뿐이다. 캐롤라인이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을 하였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스스로 선택했고, 거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했다고 믿은 것은, 나 혼자뿐이 아니었을까? 

 민아 씨가 한 말이 생각났다. 이 곳에 있는 사람 모두, 시험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물 먹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무리 집중해도 모자랄 시기에, 그냥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기랄.

 갑자기 마음 속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1분1초가 중요하다고 그렇게 나 자신에게 이야기했건만, 결국 그 말을 저버린 것은 내가 아닐까? 

 나는 지금 정확한 선택을 한 것일까?


 "민재?"


 "응? 으,으응."


 어깨를 잡고 흔드는 기척에 정신이 돌아왔다.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리돌이 옆에 오는 것조차 신경을 쓰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리돌을 돌아 보았다. 리돌은 얼굴에 걱정을 가득 담고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았습니까, 민재?"


 "알지는 못했고... 아니, 알긴 알았지. 음."


 "무슨 뜻이냐, 인간. 주군이 알아들으실 수 있게 이야기를 해라."


 "네 주군이 이미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하는데, 내가 왜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야 되냐."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리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리돌은 깜짝 놀란듯이 목을 움츠렸지만, 딱히 나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리고, 그 품 안에 있는 나비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이쪽은 좀 반응이 격했다. 마구 내 손을 물려고 하였으니.


 "크앗! 이 몸은 네놈에게 머리를 허락한 적이 없노라!" 


 그래, 지금 이렇게 혼자 고민해 보아야 무엇하겠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다행히 이 한가한 녀석들 덕분에 기분전환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혼자 있었다면 몇 시간이고 계속 꿀꿀한 기분으로 방 안에 처박혀 있어야 했겠지. 참으로 간만에, 아니, 처음으로? 이 녀석들에게 고마운 감정이 든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손길이 닿은 하얀머리 외계인과 말하는 고양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별 것 없이 흘러간다. 그래, 별 건 없다. 하지만 너무도 빨리 흘러간다. 1분, 1시간, 1일, 1주일. 분명히 1일은 24시간이고 1주일은 그 24시간의 일곱 묶음일텐데, 모두 그냥 하나로 뭉뚱그린 것마냥 딱 1주일이 흘러갈 뿐이다.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아인슈타인 양반이 이야기했었지만, 이건 좀 너무한 것 같다. 마치 1분이 흘러가듯 1주일은 사라져 버린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아니, 무언가 했지만 결론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그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결과를 확인받으러 왔기 때문이다. 


 "...not have all the experience ... seeking for this position. how do you manage..."


 내 앞에는 지금, 두 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다. 한국인 하나, 외국인 하나. 그리고 다른 지원자는 보이지 않았다. 무역회사다 보니 영어 면접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원어민이 직접 면접을 진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도 잠시, 간단한 인사 후에 첫 질문부터 영어로 날아왔다. 코 큰 면접관의 말이 중간 중간 잘린 듯이 들린다. 짧은 시간 사이에 가장 부족한 부분이 기업용 영어라고 생각되었기에, 그 부분만 죽어라 판 결과였다. 단어는 외웠지만 단시간에 회화까지 완성을 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해 봤자, 어차피 변명이다. 이것이, 바꿀 수 없는 지금 나의 모습이다. 


 "Well... I, dont have experience, but I can..."


 대답도 이빨 빠진 듯이 나온다. 제대로 듣지를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어찌어찌 대답을 마무리 짓고 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그 모습을 본 한국인 면접관이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민재 씨? 괜찮으십니까?"


 "아, 아, 예."


 "왜 그렇게 한숨을 쉬고 그러세요. 저희 회사가 맘에 들지 않으시면 말로 하세요."


 실무자로 보이는 한국인 면접관은 그래도 유들유들한 사람이었다. 면접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농담에 나도 굳은 얼굴을 억지로 풀어 보였다.


 "아닙니다, 맘에 들지 않긴요."


 "그럼, 계속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네."


 "네, 알겠습니다. Robert?"


 "Ok, Minjae. pretend I`m a buyer, and explain about..."

 




 살풋 구겨진 정장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음료수 캔을 손에 들고 편의점 앞 노상에 앉아 있다. 편의점 차양 아래에는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건만, 그는 도로에 있는 보도블럭에 걸터 앉아 있다.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는 마치 거울 같았다. 눈빛이 맑았다는 뜻이 아니라 움직임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플라스틱 모형 같은 가로수 줄기에. 그리고 그 앞을 지나가는 차들, 지나가는 행인들만이 그의 눈동자에 비칠 뿐이었다. 대낮 취객 같은 모양새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 역시 그에게 시선을 주려 하였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느 움직임 없는 가로수를 초점 없이 바라보는 나 자신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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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다녀오느라 하루 늦었네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