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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서 제가 어디까지 말했었죠? 아아, 네. 그 소녀가 떠나갔다는 부분까지 했었네요. 보통 첫사랑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알지도 못하게 서서히 젖어가다 마음대로 떠나간 다음에야 아, 이게 사랑이라는 거였구나, 라고 깨닫잖아요. 그래서 누구에게나 첫사랑이라는 건 추억 속에서 잠겨있다가 이따금식 생각이 날 때쯤 꺼내보는 앨범 같은 거죠. 그런데 소년에게는 아니였나봐요. 그러니까 헤어질 때 그런 말을 했겠죠. 


예? 뭔 개소리냐고요? 아, 제가 그 말을 빼먹었나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원래 그게 이야기를 듣는 매력 아니겠어요? 때려치고 얘기나 하라고요? 거 성격도 급하시네. 여튼 소년은 헤어지기 전에 소녀에게 말했죠. 


다시 만나면 선물을 줄께.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저도 모르죠. 그 말ㅡ정말 실낱같은 사소한 거라도 다시 만날 계기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난 소년은 생각했어요. 뭘 하면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가장 큰 도시-수도 바이서스 임펠에 가는 거였어요. 소녀는 분명 행상인의 딸이었으니 수도에 가면 언젠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거죠.


문제는 그거였죠. 어떻게 해야 바이서스 임펠에 올라갈 수 있을까? 소년의 가족은 대대로 농사만 지었고, 그건 이웃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니 맨몸으로 수도에 올라가 봤자 할 수 있는게 없었죠. 행상이요? 그것도 자본이 있어야 하는거 아니겠어요?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하고 미끄러지다 지치면 소년은 소녀가 좋아하던 그 언덕 그 자리에 가 앉아보곤 했어요. 소녀가 앉아있던 자리는 여름의 푸르른 풀로 흔적 없이 덮여버렸지만요. 그런 소년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어요. 


나이든 남자는 허름한 로브에 지팡이를 집고 있었어요. 눈은 감은 상태였죠. 남자는 소년을 보곤 말했어요.


너도 무언가를 잃은 모양이구나.


소년은 그렇다고 답했죠. 남자가 물었어요. 


너는 어쩌다 그것을 잃었느냐?


소년은 짤막하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어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는 말했어요.


그렇다면 넌 그것을 잃은게 아니로구나. 네게 선물을 주도록 하마. 없어도 상관은 없을 것이나,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남자는 소년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을 이어갔어요.


수도에 도착하거든 빛의 탑으로 가 그 종이를 보여주렴. 그게 널 너의 길로 이끌어 줄께다.


소년은 남자에게 물었어요. 어째서 자신을 도와주냐고. 그러자 남자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죠. 


아직도 완전이라는 이상을 버리지 못한 늙은이의 작은 호의라고 생각하렴.


남자가 돌아서려 하자, 소년은 남자의 이름을 물었어요. 타이번 하이시커, 라고 짤막하게 답하곤 남자는 돌아서 길을 향했죠.


어쨌거나 소년은 드디어 수도에 갈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곤 도착한 수도에서 소년은 타이번이라 한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죠. 소년의 소개장을 본 빛의 탑이 말 그대로 뒤집어졌거든요. 드디어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와 무지개의 솔로쳐의 후계자가 드디어 등장했다고, 국왕까지 탑에 오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였어요. 소년, 아니 청년의 마법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었고 깨달음은 점점 강대해져 갔죠. 주위에서는 역시 대마법사의 후계자라고 치켜 세웠지만 소년은 전혀 기쁘지 않았어요. 소년의 목표는 대마법사가 아니었잖아요. 더구나 시골에서 농사나 짓던 소년은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했어요.


고향에 있었다면 이렇게 답답할 때 마다 뒷동산에 올라 쉬곤 했겠지만, 수도에는 그런 언덕이 없었죠. 소년이 선택한 건 주변에 있는 강가였어요. 저녁무렵이면 사람들이 꽤 있던 가게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아 고향의 그곳처럼 조용해지곤 했거든요. 


오늘도 소년은 강가 가까이에 있는 자그마한 언덕에 올라 강을 바라보았어요. 해가 서쪽으로 거의 넘어가 세상이 파란 물감을 흩어져 잠기고 오직 서쪽만이 달콤한 분홍빛을 띄고 있었을 그때, 그곳에 소년은 서 있었죠.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소년은 그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어요. 


거의 사라진 해가 내어 던지는 파편을 받아 밝게 빛나는 그 가을이 소년의 눈 앞에 있었거든요.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을 하더니 맑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어요.


내 선물은? 다시 만나면 준다며. 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만나면 꼭 이 말을 해야지, 라고 정해놓고 매일 밤 되뇌이던 노력이 무색하게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만 흘렸어요. 그녀는 주저앉은 그를 꼭 안아주었죠. 그녀의 품에서는 가을의 편안한 향이 났어요. 눈물을 그친 그는 그녀에게 말했죠.


내 마법의 가을을 너에게 줄께.


다시 찾아온 마법의 가을이 제 주인을 찾아가는 날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