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판서 어른신과 최 대감 그리고 박 대감에게 전해주게


구름이 달을 품어 스산한 어둠만이 감도는 시간에 주인이 자신을 불러 편지를 맡긴다.

필시 여느 때와 같이 비밀스러운 편지 일터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으나 언급한 인물들이 조정에 반(反) 하는 세력의 주요 인물들이란 것은 저잣거리 아낙네들조차 알고 있을 것이다.


세 통의 편지를 품 안에 접어 넣고 방을 벗어나 날쌔게 마당을 내달렸다.

한달음에 대문 앞까지 뛰어왔지만, 경첩에 쇠기름을 먹인지 한참 되었기에 필시 쇠 비비는 소리가 크게 울릴 터

그 때문에 노비가 깨어나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목격자를 줄이기 위해 가볍게 몸을 날려 담장을 뛰어넘는다.


칠흑 같은 하늘을 뛰어넘어 내려온 검은 인영은 눈을 감은 채 잠시 주변 소리에 집중한다.

바람에 풀 스치는 소리. 개울가 밤잠 없는 고기가 튀어 올라 물 첨벙 대는 소리. 벌레 소리.

주변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뒤 어둠 속을 조용히 내달렸다.


현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김 판서 어른신의 기와를 몇 겹이나 쌓아 올린 궁궐 같은 저택이다.

대문을 통해 당당히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번에도 담을 넘어야만 한다.

어르신 댁의 담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아슬아슬 뛰어넘을 정도의 높이를 가진 담과 

어른 키를 훨씬 뛰어넘는 높이에다 기와를 대충 쌓아 올려놓아 밟는 순간 미끄러지기에 십상인 담이다.


외지에서 이름깨나 날렸다는 도둑놈들은 대부분 그 아슬아슬한 담장의 높이를 우습게 보고 자신의 뜀 솜씨를 뽐내듯 껑충 뛰어넘는다.

하지만 이것은 의도된 것인지라 착지와 동시에 담 아래 풀어놓은 호랑이잡이에 쓰이는 맹견에게 물어뜯기다가 포박되거나 그대로 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고을 내의 야행꾼들은 김 판서 어르신 댁을 쉬이 넘나들 생각을 않는다.

비교적 낮은 쪽 담이 그러하기에 높은 쪽 담을 통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자신 정도의 뜀 실력이 아니라면 도저히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할 일이다.


담을 뛰어넘기 위한 방법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어르신 댁이 시야에 들어온다.

멀리서보아도 한손으로 다 가릴 수조차 없는 넓이에 기왓장이 겹겹이 올려져 있는 저택의 웅장함은 몇 번을 보아도 배꼽 아래에서 전율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여느 때와 같은 풍경이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었으니 이 시각에도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는 것이었다.

수상함을 느껴 발소리를 죽인 채 담장 아래로 살금살금 다가간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등을 대고 담 너머의 어수선한 소리에 집중한다.


- 썩 돌아가라니까!


가래가 끼여 그렁그렁한 목소리에 깊은 짜증이 묻어나오는것이 김 판서 어르신인 것이 틀림없다.


- 염치는 없더라도 체면은 있는지라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죽거리는 사내의 목소리 속에서 똬리를 튼 뱀이 먹잇감에 독니를 박아넣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 채원이 네 이놈! 아까부터 누누이 말했거늘! 그딴 종이 쪼가리는 없단 말이다!


- [아직은] 이겠지요.


- 이 고얀 놈! 벼락 맞을 놈! 언제까지 아집만 늘어놓을 참이냐!


- 하하하 귀청 떨어지겠습니다 어르신. 보아하니 슬슬 편지가 도착할 시각인 겁니까? 다급하신 모양이군요.


- 닥쳐라 이놈!


- 어디보자 ... 편지를 물어올 쥐새끼가 숨어있을 만한 장소가 ... 저 담벼락 뒤.


너머에서 그 말이 들림과 동시에 담이 부서지며 굵직한 두 팔이 흩날리는 잔해물 사이를 꿰뚫고 튀어나왔다.


담을 부수고 튀어나올 것이란 예상은 하지 못하였기에 전력으로 뛰쳐나가기까지 약간의 지연이 생겨버린다.


그러한 빈틈은 튀어나온 굵은 손에 뒷덜미를 붙잡혀 담 안쪽으로 장작 던지듯이 내팽겨쳐지는 결과를 낳았다.


바닥에 뒤통수를 처박히기 전에 공중에서 몸을 뒤틀어 낙상은 피했지만


- 저만큼이나 커다란 쥐로 키우려면 쌀 한두 가마로는 부족하셨겠습니다?


즐거운듯이 큭큭거리는 사내의 목소리.

김 판서는 두 눈을 감은 채 씁쓸해진 입안에서 말을 내뱉는다.


- ... 면식 없는 밤손님이다.


- 그러셔야겠지요.


낭패다. 우선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정했다.

재빠르게 좌우를 살펴보니 완전무장된 군인들이 횃불을 든 채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한 기세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머릿수는 스물가량. 필시 사내가 데려온 병력일터.


- 쥐새끼 주제에 몸놀림은 고양이 새끼로군


무너져내린 담벼락 쪽에서 양손에 묻은 돌가루를 툭툭 털며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좌측과 중앙엔 군인 스물, 우측엔 거한 하나. 우측구석으로 빠져나갈 방향을 결정하자마자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먼지를 피우며 땅을 박차는 도중 거한의 외침이 들린다.


- 건방진 놈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어느새 왼쪽으로 뛰어 들어와 굵직한 오른손을 내질렀다.

공격이 있을 것이란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뛰어올라 내질러진 손등을 밟는다.

찰나의 순간 거한의 왼 주먹이 내질러질 준비가 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오른쪽 어깨너머로 힘껏 뛰었다.


이제 시야에 들어오는 것 중 진로에 방해될 만한 건 더는 없다.

뚫려있는 담 까지 최적의 경로를 확인하려는 찰나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날개 꺾인제비처럼 바닥에 내리 꽂힌다.


- 크헉


바닥에 부딪힘과 동시에 옆으로 굴러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에서 격통이 엄습한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내음으로 보아 상당한 내상을 입었음이 분명하다.

뛰어오른 그 짧은 순간에 정권을 내지를 자세에서 뒤돌아 후려쳤단 말인가.

힘과 기술에서 거한은 자신보다 우위에 있었다.


- 네놈 몸놀림에서 송가놈의 썩은내가 진동하는구나!


아무래도 자신의 유파까지 간파한 듯하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상황이니 한순간의 속도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왼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상체를 틀어 오른손을 몸 뒤로 숨기는 송씨유파 특유의 자세를 취한다음

왼발로 땅을 밀어내듯 살금살금 앞으로 전진한다.

유파를 알고 있다면 이것이 접근전을 위한 동작인 것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서로의 사정거리를 가늠하는 데에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세 때문에 옆구리의 통증이 늘어나지만, 그 잠시나마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일부러 취한 자세다.

가려진 오른손으로 허리춤의 암기를 꺼내 든다.

애당초 거한과 공방을 주고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손에 쥐어진 암기는 극독이 칠해진 바늘을 흩뿌리는 형식이기에 제자리에선 결코 피할수가없다.

좌우 어느 한쪽으로 피할수밖에 없을 것이니 자신은 그 반대방향으로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


거리상으로는 서로의 공격이 닿기에는 조금 부족한 정도

아마도 거한은 자신이 범위에 들어선 순간 강력한 일격을 날릴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 가장 적합한 기회. 그러한 생각과 동시에 암기를 뿌리고 다리에 힘을 모은다.

그 순간

거한이 정면으로 튀어나오면서 웃옷을 거칠게 찢어내어 흩뿌린 암기들을 후려쳐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잠시 주춤하는 사이 유성같은 거한의 주먹이 얼굴에 박혔다.

세상이 회전하는가 싶더니 땅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지며 숨이 막혀온다.


거한은 품안에 숨겨놓은 편지를 찾아내 김 판서 곁에서 웃음짓고있던 사내에게 건냈다.


- 어르신 덕분에 조정에 반하는 자들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쾌하다는듯 사내는 웃어대며 편지를 열어 그 내용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며 일년에 한바퀴 돌면서 받는사람에게..."






- 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