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즈마 소드 채널
이 일은 비트립이 셰라탄 병단모집기관에서 병단을 신청한 다음날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카스트로는 비트립이 가져온 단원 명단을 유의깊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비트립이 나가고 몇분 후, 카스트로의 귀에 문을 여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카스트로. 오늘 내가 말이지, 건국인 공동묘지에 가가지고..."
술에 잔뜩 취한 채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막시투스타였다.
"그래서, 오늘은 또 뭔데? 또 비트립이야?"
"아, 맞아맞아. 잘 아네. 그래서 말이지, 내가 걔 주려고 크림빵 사왔는데 얘가 통 안보이네."
"비트립이라면 아까 나갔는데?"
"아, 그래? 야, 나 나가본다."
"어, 잘가라. 오늘은 만나서 제발 이상한 말좀 하지 말고.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렇지..."
"아이, 알았다니까 그러네. 그럼, 이만!"
그렇게 사랑을 찾아 떠나는 막시투스타였다.

소란스러운 시간이 지나자, 카스트로는 다시 단원 명단을 바라보았다. 루티온 레나이스, 산체 레보, 코스타 린톤. 모두 그렇게 실력있는 가문도 아닌 평범한 가문이었다.

왜 하필 이렇게 짰는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집어치우고, 카스트로는 그들의 이름을 에스페란토식 로마자로 적기 시작했다. 에스페란토식 로마자는 고대어 중 하나인데, 카스트로가 왕보다도 더 존경하는 대예언가 예리우스 하네온이 그의 묘비에 새겨달라고 한 글자이다. 그것 때문에 카스트로는 그 글자들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사람들의 이름을 에스페란토식 로마자로 쓰는 것이 카스트로의 취미가 되었다.

Vitrip Pon Hainrihi, Sance Revo, Lution Renais, Kosta Rinton. 비트립의 병단의 단원 이름들을 모두 에스페란토식 로마자로 쓰고 난 뒤, 카스트로는 책꽂이에서 <예리우스 예언집 300>을 꺼내들었다. 이 책은 예리우스가 자신의 모든 예언들을 묶어 만든 원고에 카스트로가 그의 유언을 마지막 페이지에 첨가해서 배포한 예언집이다.
'유언까지 합치니 딱 300개가 되어 놀랐던 일이 생각나네. 역시 예리우스 님은 이름처럼 예리하시단 말이지.'

카스트로는 <예리우스 예언집 300>을 펼쳐 220번 예언을 바라보았다. '혁명과 부흥이 교차하고...'라는, 슬레이어 탑 앞에도 있는 유명한 예언이다. 

그 후, 카스트로는 284번 예언과 298번 예언을 바라보았다. 298번은 예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마왕이 찾아왔을 때 준 예언이고, 284번은 220번 예언의 후속작이자 확장판이다. 내용은 이렇다.

가문의 시초가 상전의 반대인 지도자 아래
혁명과 부흥이 교차하여 만나고
배급과 맹폭격이 11개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쳐졌을 때
불의가 타도되기 시작하고 정의가 세워지리라

대충 훑어보면 220번 예언과는 다르게 아주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220번, 284번, 298번 예언, 그리고 하나 더 있다는 예언들으로 이루어진 총 4가지 예언들이 마왕을 무찌를 사람들에 대한 예언이다.

카스트로는 예언집을 덮고 책상 한 쪽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그 옆에 낯선 서적이 한 권 놓여있었다. 자세히 보니 막시투스타가 가지고 다니던 영어사전이었다. 카스트로는 술에 얼마나 취했길래 영어사전을 두고다니는 건가 생각했다.

영어사전은 예리우스가 막시투스타를 포함한 자신의 가족과 친척에게 나누어준 유품인데, 왜 하필이면 영어사전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모두 추측만 할 뿐이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카스트로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막시투스타가 두고 간 영어사전을 펼치게 되었다. 뭐하지 싶어 혁명과 부흥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려 했으나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단어들이 수천개가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예리우스 님께서 남겨주신 유품이라면 무언가 의미가 있겠지'라는 마음을 먹었더니 영어사전을 뒤지는 일이 예리우스를 영접하는 일처럼 느꺼져 지루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영광스러웠다.

그러나 그 단어들을 찾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스트로는 H까지 찾아보다가 포기하고 영어사전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비트립의 명단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뭔가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이들의 이름을 조합해보면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단원들의 이름을 조합해보았다. Revokosta, Rintonlution, Kostasance. 모두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래서 이 단어만 찾아보고 포기하려는 순간, 예리우스의 뜻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Revolution 혁명

산체 레보의 성씨와 루티온 레나이스의 이름을 조합하니 '혁명'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래서 반대로도 조합해보았다.

Renaissance 부흥

루티온 레나이스의 성씨와 산체 레보의 이름을 조합하니 '부흥'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카스트로는 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카스트는 시간을 내어서 다른 단어들도 찾아보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배급과 맹폭격이 11개로 합쳐졌다가 다시 합쳐진다는 것은 두 개의 단어 'Ration'과 'Stonk'로 이름을 조합하면 'Kosta Rinton'이 나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상전의 반대'라는 단어는 그냥 일상 언어인 '하인'을 뜻하는 말로, 비트립의 성씨인 하인리히의 앞부분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카스트로는 예리우스의 예언을 해독했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로 영어사전을 들고 막시투스타를 만나기 위해 막시무스단의 초소로 찾아들어갔으나, 거기에는 막시무스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그에게 내가 예언을 어떻게 해독했는지 알려주었다.

막시무스가 말했다.
"헐, 그러면 예리우스 묘비에 있는 것들까지 실현이 된거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묘비에 에스페란토식 로마자랑 그 밑에 220이랑 284 써있었잖아. 그게 에스페란토식 로마자가 사용되는 부분이라는 거지!"
"헐, 대박, 우와... 예리우스 님은 대체 어디까지 내다본 걸까요?"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보니 내 동생이 자랑스럽네."
막시무스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아, 그리고 말이다, 이거는 너랑 나만 알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다."
"왜요? 이러면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생각해봐. 예언에 나오는 영웅들의 정체가 밝혀지면 악마국에서 반드시 죽이려 들거야. 너도 네 친구를 죽이기는 싫겠지?"
"그러면, 비트립의 단원들이랑 막시투스타 정도에게는 말해도 되겠죠?"
"안돼. 만약 단원들이 알았다가는 그들의 마음에 빈틈이 생겨서 위험해질지도 몰라. 자칫하면 거만해지거나 방심할 수 있다고. 그리고, 막시투스타가 알면 술 먹고 바로 비트립에게 가서 얘기할텐데, 그러면 큰일이잖아. 지금 생각해보니 비트립이 고대어에 약하다는 게 어찌보면 행운이구나."
"아... 알겠어요. 조용히 할게요."
"그래라. 네가 워낙 직설적이라 걱정이 되긴 하다만."
"에이, 이거는 잘 지킬게요."

그 후로, 카스트로는 지금까지 막시무스와 한 약속대로 예언에 대해 입밖으로 전혀 내지 않고있다. 그래도 비트립의 병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대신 에릭이 협상론을 주장했을 때 예언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반대했고, 협상론이 받아들여지자 고심 끝에 비트립의 병단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물론, 예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으나, 큼지막한 금전적 지원을 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