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에흠. 어흠. 방금 전의 추태는 잊어주게냐."


…잊어주게나.


그렇게 머릿속으로 전해오는 청하의 모습은 방금 전과는 다르게 볼이 많이, 아주 많이 빨갛게 물들었다.


추태를 잊으라고 해도 참으로 잊기 힘든 모습이어서 잊기 힘들 것 같았다.


이리저리 방방 뛰면서 날뛰는 것과 동시에 가슴도 날뛰는 모습이란 참…. 보면서도 아프지는 않을 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움직이고 있는 걸 보면 용의 몸이라는 건 생각보다 단단하다고 해야할 지, 튼튼한 모양이다.


나약한 사람의 몸과는 다르게.


사람이 저렇게 뛰었다면 순식간에 가슴의 인대라던가 신치에 이로 말할 수 없는 고통들이 닥쳐왔을 텐데.


아무튼, 청하는 자기 볼이 붉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있는 지 두 손으로 뺨을 비비적거리며 어떻게든 가라앉히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가 원하던 책을 찾기는 커녕 그 전에 집에 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청하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튼, 제가 말씀드렸던 책들이 모여있는 곳이 있습니까?"


"있기는 하다네. 용의 생이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경우가 많으니 각자의 경험과 지식들을 적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혹시, 제가 읽을 수 없는 것들입니까?"


"그렇느니라.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 옛 언어들과 용들의 언어로 적혀있는 경우라 내가 직접 읽어주거나 현대의 말에 맞추어 번역하지 않으면 못 읽겠군."


그리 말하면서도 청하는 나의 눈치를 보듯이 흘깃거렸다.


"물, 물론. 원한다면 내가 직접 이 입으로 읽어줄 수 있느니라."


…원한다면.


그렇게 전해오는 청하의 모습은 어딘가 부끄러운 지 고개를 돌리고 양 검지손가락을 마주 갖다댔다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다.


"현대의 언어로 적힌 용의 역사는 없습니까?"


"있느니라. 다만, 그게 정확한 역사인지는 모르겠구나. 아무래도 이종족들의 시선으로 적힌 역사이다보니 어딘가 왜곡된 부분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


음. 그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용의 역사라고 한다면 역시 용인 청하에게서 직접 들어보는 게 나을려나.


그렇지만, 묘하게 부끄러운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청하를 보고 있자니 물어보기도 영 시원치않았다. 물어본다면 아마도 대답이야 해주겠지만.


그럼, 그것 말고도 궁금한 것들이 몇 개 더 있었으니 그거나 물어보는 게 좋겠다.


"청하…와 카페 사장님은 서로 다른 부분들이 있던데도 용이라고 불립니까? 아니면, 카페 사장님은 다른 호칭으로 불립니까?"


"음… 내 자세히 말해줄 수는 있지만, 인간의 시간이란 짧은 편이니 짧게 말해주겠네. 내 머리에 보이는 뿔이 보이느냐?"


청하는 자기 머리위에 툭 튀어나온, 동양의 용의 뿔처럼 생긴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예."


"우리처럼 이런 뿔들을 가진 것들을 용이라고 부르는 편이라네. 그리고, 거기 장사 못하는 녀석의 뿔처럼 생긴 녀석들은 대부분 드래곤이라 하지."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과 드래곤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쓰는 마법, 또는 주문이 다르다는 것이지."


"마법과 주문…입니까?"


마법이라고 하면 크게 떠오르는 특징들이 몇 개 있었지만, 주문이라고 하니 매체에서나 보던 그런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아닐 수도 있었으니 그런 편견들을 지워버리고, 무언가를 하려는 듯이 검지 손가락을 치켜세운 청하를 본다.


"그렇다네. 마법이라 하면 흔히 마력, 그러니까 그 자들이 말하기를 마나는 자기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고, 주술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흐름을 이용하느니라."


치켜세운 손가락을 빙빙 돌리자 돌아가는 손가락을 따라 어떤 흐름같은 것이 따라 돌아간다.


돌아가는 흐름을 멍하니 쳐다보자 청하는 그런 내 모습에 피식 하고 웃었다.


"뭐어… 이렇게 말하는 나도 마법에 대해서는 자세히는 모르네. 아무래도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고, 서로 어렸을 적에 배우는 것이 다르기에 그렇겠지."


"그렇습니까. 생각보다 친하신 것으로 보이기에 같이 자란 걸로 보였습니다."


"같이 자라기야 했지. 용은 용의 방식대로 기르고, 드래곤은 드래곤의 방식으로 길렀을 뿐이지."


빙빙 돌아가던 손가락이 멈추자 흐름도 멈추더니 공기에 녹듯이 사라지며 도서관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 도서관은 그런 주술로 만들어진 공간이면서도 마법도 포함된 곳이라네. 그렇다보니 이런, 마나가 없는 종족의 눈에 보일 정도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지."


원한다면, 직접 어떻게 사용하는 지에 대해서도 체험할 수도 있고.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른…가? 잘 모르겠다.


주술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청하의 제안은 생각보다 매력적이었다.


사람은 불가능한 일에 대해 체험해볼 기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썩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어째서일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여기서만 가능한 것이지 밖에 나가면 할 수 없는 것이니 말 그대로 잠깐의 체험일 뿐이었다.


한번이라도 해본다면 미련이 생기겠지만, 한번도 하지 않는다면 후회만 남을 뿐이지 미련이 남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이 들어 청하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체험해 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가? 꽤 의외의 답변이로군."


"예. 한번이라도 경험해본다면 분명, 다음번에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그것이 나중에는 미련이 될 지도 모르기에."


"주술은 인간인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한번도 하지 않는다면 후회는 할 지 언정, 미련은 없지않겠습니까."


"…참 아쉽군. 체험해본다면 그걸 이유로 제자로 삼을 예정이었느니라."


"말뿐이라도 감사합니다."


"허황된 말이 아니다. 용이나 드래곤에게 있어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거나 지식을 가르쳐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지식을 알려주는 방식이 책이 아닌 스스로가 알려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가르치는 대상을 제자로 인정하다는 의미니라."


"…예?"


"이래서 용의 역사나 책을 알려줄 생각이 없었는데… 참 아쉬워."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 청하의 모습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진다.


아까 보여줬던 모습과는 다른, 청하의 작은 몸 뒤로 용처럼 생긴 무언가가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기운같은 것이라고 해야할 지, 도서관에 오고 나서야 보게된 무언가.


아까까지는 보지 못했던 그것이 나를 내려다본다.


"인간은… 정말이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움직여서 참으로 흥미롭군. 흥미로워. 그래서 더 마음에 들고, 품에 안고 싶어지는 법이지."


청하는 여전히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리저리 마음대로 흔들리고 있는 꼬리를 내버려둔채로 나를 쳐다봤다.


나를 바라보는 청하의 눈동자는 바다의 색깔이 아닌, 파란색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밝아 그 눈동자안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색의 심해의 색이 아닌, 수평선 너머의 바다와 비슷한 파란색.


"내 눈을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지는 말게나."


"위험합니까?"


"아니. 내가 반할 것 같으니."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내 눈을 피하는 청하의 모습을 보며 여기의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 단순히 보는 것 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머리를 쓰다듬는다던가 껴안는다던가 하는 행동들이 아무렇지 않을 정도라면, 과거에는 대체 어떤 취급을 받으며 살았을지.


허탈하다고 해야할 지, 아니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고 해야할 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도서관에 초대해준 사람의 면전에서 한숨을 내쉬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만.


"…머리를."


"예?"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안 되겠느냐?"


"…예?"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안 되겠느냐 고 물어봤느니라."


"아니, 그게… 허, 참."


편의점에서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나보다 오래 살았을 것이 분명한 청하, 용의 머리를 쓰다듬게 생겼다.


기대감을 잔뜩 품고있는 지 허리 뒤의 꼬리가 아까 흔들렸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잔상이 보일 정도로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게다가 머리의 뿔도 색깔이 변하는 속도가 심상치가 않았다.


밝은 파란색이었다가 짙디 짙어 심해의 색처럼 바뀌었다가, 바뀌는 색이 파란색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통일성이 없었다.


"…머리만 쓰다듬어주면 됩니까?"


"이왕이면,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목부분까지 쓰다듬어줬으면 좋겠느니라."


"예. …예."


이게 진짜로 현실이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지만, 뭐라 말할 것도 없이 현실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푸른색 일색인 용으로 생각되는 존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쓰다듬어야하는 상황이 더할나위 없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지각시켰다.


편의점에서 부엉이인지 올빼미인지 모를 알바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것은 쉬웠던 편에 속했다.


아니, 하다못해서 껴안아달라고 요청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하는 것인가.


"그, 그리고."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껴안아줬으면 하는구나."


"……예."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껴안아달라는 요청까지 받아버렸다.


혼란스러운 뇌와는 다르게 신체는 한숨을 내뱉으려는 것에 어떻게든 꾸역꾸역 속으로 집어삼키고, 청하의 키에 맞춰 무릎을 꿇고 정수리로 천천히 손을 뻗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청하는 두 눈을 꾹 감고는 허리 뒤의 꼬리도 흔드는 것을 멈췄다.


정수리에 손이 닿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잠깐,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목까지 쓰다듬었다.


"…좋구나.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니라."


"그렇습니까…."


나도 모르게 말이 늘어졌지만 청하는 별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쓰다듬어주게나."


"알겠습니다…."


이제는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냥, 쓰다듬어달라고 했으니 쓰다듬어줘야지.


다시 정수리로 손을 옮기고 목까지 한번 쓸어내리듯이 쓰다듬는다.


손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그렇게 좋은 느낌은 아닐텐데도 만족했다는 표정을 짓는 청하의 표정과, 허리 뒤로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선 꼬리가 보였다.


"후, 후후후…. 그 녀석은 이것도 못 해봤겠군. 내가 이 인간의 처음을 받아가겠다!"


"…그, 듣기 좀 거북합니다."


"앗! 미, 미안하느니라! 사과할테니 원하는 것이라도 있느냐? 그래, 용의 역사를 원했으니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하느냐?!"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흥분해서는 내게 달려들려하는 청하에게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 제지했지만, 청하는 내 몸에 딱 달라붙어서는 냄새라도 맡듯이 킁킁거린다.


씻고 와서 냄새를 맡아봤자 별 냄새는 안 날텐데.


아니, 나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몸에서 뭔가 다른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세상이었으니 냄새가 나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몸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청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 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몸에서 다른 종족의 냄새가 나는구나. 우리보다 먼저 껴안은 녀석이 있다니."


"예? 씻었으니 냄새가 날 리가 없을텐데…."


거기까지 말했을 뿐인데도 나를 쳐다보는 청하의 눈동자가 밝은 파란색에서 짙디 짙은 심해의 색으로 물들어간다.


어디까지 짙어지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짙어지는 눈동자의 색을 보고 있으려니 등 뒤로 오싹함이 느껴졌다.


"누구느냐, 너의 몸을 껴안은 녀석은."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집착하는 청하의 모습이 참, 정말로 위험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이렇게나, 사람에게 집착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여기서 어떤 말을 꺼내야 청하가 금방 넘어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해봤지만, 딱히 좋은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당장이라도 나를 쓰러뜨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몸을 기대오는 청하를 보다가, 저 멀리서 아까 카운터에서 봤던 직원…이었는 지 알바생이었는 지 모를 종족이 달려온다.


"사장님!"


"무슨 일이느냐."


"손님이 당황하고 계시잖아요, 사장님!"


"…아."


청하는 그제서야 내 얼굴과 모습을 보고는 당황하며 내 몸에서 떨어져 세 걸음 뒤로 떨어졌다.


"미, 미안하군. 인간과 관련된 일에는 나도 모르게 반응해버리는 편이라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제 몸에서 냄새가 납니까?"


옷에서 냄새가 나는 건지 킁킁거리며 맡아봤지만, 옷장 냄새와 평소에 쓰던 샴푸의 냄새만 풀풀 났다.


"아니, 아닐세. 냄새가 나지는 않았네. 내가 실수했느니라."


그리 말하는 청하는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실수했다는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있었기에.


"어휴. 그러니까, 저에게 맡겨달라니까요, 사장님."


"어허. 내가 데려온 손님아니느냐. 어딜!"


"도서관에 관련된 일은 제가 다 처리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중요한 일들은 내가 하고 있느니라! 가령, 봉인된 마도서라던가!"


"…아, 그렇지."


청하와 직원이 투닥거리며 떠들던 것도, 직원이 품에 안아든 책을 꺼내자 끝이 났다.


"그 봉인된 마도서 관련으로 말인데요, 사장님."


"뭐가 문제느니라?"


"그게… 해제하는 조건에 사람이 포함되어 있어서요."


"…혹시, 용이나 드래곤이 제작한 마도서느냐?"


"사장님이 알려주신 언어로 해독이 되는 걸 보면 아마도…."


그렇게 직원이 말하자 청하는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는 한숨만 푹 내쉬었다.


"…이 변태같은 동족들은 또 어떤 마도서를 만들고 간 건지 모르겠군."


그 변태같은 종족에 청하도 포함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작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까 내 몸을 쓰러뜨릴듯이 기대는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