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거울 속의 나를 한동안 관찰하다가, 몸에 쌀쌀한 기운이 도는 것을 느껴서 옷걸이에 걸려진 속옷들과 옷을 입었다.


물론, 한달이라는 시간동안 어느정도 적응은 했다지만 여전히 가슴을 보정… 받쳐주는?


어쨌든, 검은색의 아무런 무늬도 없는 밋밋한 브라를 입을 때 등 뒤의 후크를 거는 손동작이 어색해서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여자들은 이런 걸 어떻게 잘 거는 건지.


뭔가 어떻게 잘 거는 요령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일때도 적당히 살아왔으니 여자가 되었다고 한들 적당히 살아간다는 방식은 달리지지 않았다.


…정말로 불편하면 그때 가서 찾아봐야지.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욕실 밖으로 나가면서 스위치를 눌러 전등을 껐다.


그리고 바닥에 던져놓은 옷가지들과 속옷들을 챙겨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베란다 창문 뒤쪽으로 세탁물을 모아놓은 바구니를 살펴보니 절반정도 차있었기에 오늘은 안 돌려도 되겠다 여겨 옷가지들만 집어넣고 거실로 돌아왔다.


여자의 몸이 되면서 가장 불편한 게 생겼다면, 남자였을 때와는 다르게 머리를 꼭 말려야한다는 사실이었다.


짧은 머리였을 때에는 자연적으로 말려도 머리를 만졌을 때 느낌도 그렇고 그렇게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었는데, 긴 머리카락이다보니 머리카락의 촉감도 그렇고 엉킨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 엉킨 머리카락때문에 꽤 아픈 적도 있었고. 그것말고도 물을 머금은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무거웠다는 것도.


지금도 수건으로 물기를 거의 뺀 상태인데도 아직까지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슬쩍, 지나온 바닥을 살펴봤지만 물이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머리를 말려야한다는 건 확실했기에 이제는 보지도 않는 TV아래의 서랍에서 연분홍색의 드라이기를 꺼내 멀티탭에 꽂았다.


드라이기의 버튼을 온풍으로 올리고 남은 손으로 향하니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머리카락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좋아하지는 않아서 남자였을 때에는 그냥 찬바람으로 말렸었지만, 이게 머리카락이 길다보니 꽤 춥게 느껴져서 최근 들어서는 따뜻한 바람으로 말렸다.


위이이잉─ 하는 소리를 들으며 축축한 머리카락에 드라이기를 갖다댔다.


앞머리부터 시작해서 정수리로, 그 다음은 뒤통수로 넘어가다가 등 뒤로 넘어가는 긴 머리카락은 앞으로 넘겨서 남은 손으로 여기저기 만지작거리며 말렸다.


이게 짧은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긴 머리카락도 나름대로 만지는 느낌이 좋았다. 나름대로 안까지 잘 말려보려는 생각이기도 했고.


머리카락을 말리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기에 오늘은 밖에 나가서 뭘 하면서 시간이라도 보내야하는 걸까 생각을 해본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려면 카페에 앉아서 커피라도 하나 시키고 지나가는 종족들을 관찰하는 것도 괜찮다.


여태까지 본 종족들만 수두룩한데 가끔 가다 내가 못 봤던 종족들도 지나가기도 하고, 다들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듯이 머리카락이라던가 특징적인 부분들을 살펴보는 것도 꽤 즐겁다.


물론, 카페 사장님이 갈 때마다 매번 알바로 일 할 생각 없냐고 물어보는 건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그걸 감수할 만한 맛은 있었으니까.


"맛만 없었더라면 안 갔을 텐데, 참…."


맛이 뭐라고 가고 싶지 않은 곳도 가게 만드는 건지.


카페가 가기 싫다면 PC방도 나름대로 좋은 장소가 될 수 있다.


요즘에는 1인석도 존재하기에 거기에 앉아서 게임이라도 하던가 아니면 먹을 것이라도 시키면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장소다.


…문제라면, 거기서 게임을 할 바에 집에서 게임을 하는 게 더 낫지만.


이게 게임의 성능이 높아지면서 나름대로 사양을 맞추려고 노력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집에 있는 컴퓨터가 더 좋은 사양인 데다가 용량이 큰 게임은 없던가 아니면 깔 수도 없게 바뀌어 있어서 간다면 밥이라도 대충 먹으려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점심이랑 저녁을 대충 때우려고 가는 것도 괜찮나.


생각을 좀 길게 했던 모양인지 머리카락이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해서 드라이기의 전원을 끄고, 멀티탭에서 뽑았다.


드라이기를 반으로 접고, 선을 드라이기에 둘둘 감아서 서랍에 도로 집어 넣었다.


물기가 거의 말라서 가볍게… 아니, 그래도 길이가 길이다보니 조금 무겁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아까보다는 가벼운 머리카락의 상태에 만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만이었다.


진짜로 남자였을 때처럼 잘라버릴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머리카락에서 무게가 느껴진다는 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여자들은 이런 머리카락을 어떻게 버티면서 살았던 걸까. 오히려 익숙해져서 그렇게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던건가.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비비 꼬듯이 돌리다가 휙 풀어버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고 겉에 입을 외투를 찾았다.


아침에도 그렇게 춥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니 조금 얇은 외투를 입고 나가도 문제 없겠지.


팔에 흰색 줄무늬가 특징적인 검은색의 아무런 무늬 없는 바람막이를 입고, 스마트폰과 이어폰, 그리고 지갑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뭔가 잊은 건 없는 지 생각을 해본다.


아침… 먹었고. 점심은 나가서 먹을 예정. 저녁은 모르겠고. 보일러… 아.


방에서 나가 거실의 목욕으로 돌아간 보일러를 껐다.


이것 말고도 또 다른 잊어먹은 게 없나 다시 뇌를 굴렸다.


집에 와서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니었으니 가스 밸브가 열려있지도 않았고, 오늘 뭐 택배가 오는 것도 아니었고.


이것저것 하나하나 따져가다보니 나온 결론은 아무 것도 잊어먹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머니에 지갑은 있나, 스마트폰이랑 이어폰은 까먹지 않았나도 다시 확인해보고 난 뒤에 현관으로 가 운동화를 신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어디로 갈 지는 결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침에 돌아다녔던 걸 생각해보면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나.


가까운 곳이라고 해도 카페였지만.


생각 외로 이 근처에 PC방이나 노래방 같은 곳은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야 그런 곳들이 모여있는 편이었다.


카페라던가 편의점이라던가 마트같은 건 근처에 있으면서.


예전과는 묘하게 달라진 부분들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으니 그냥 넘겨버렸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서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오는 동안 스마트폰을 꺼내어 들을 만한 노래가 있나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다.


검색 내용들을 손가락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 스크롤을 내리니 온갖 노래가 나왔지만, 그중에서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봤던 분홍머리가 보인다.


이틀 동안 겪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만이 차올랐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이 흡혈귀는 어떤 방송을 하는 걸까.


어느샌가 문이 열렸던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서 1층을 누르고, 이어폰 단자를 스마트폰에 꽂아넣고, 귀에 이어폰을 끼고 흡혈귀의 다시보기 영상을 틀었다.


"작은 박쥐들아 안녕! 오늘도 사람의 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흡혈귀 방송에 들어온 걸 환영해!"


…잠깐 들었던 것 뿐이었지만 벌써 듣고 싶지 않아졌다.


내면에서 차오르는 불만이 순식간에 분노라 바뀌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걸 당장에 꺼버리고 그냥 노래를 찾아 떠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참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들어보고 판단하자.


일시정지를 눌러 멈췄던 화면의 버튼을 누르니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내 옆집에 사람 분이 살 줄은 상상도 못했다니까! 아, 근데. 내가 흡혈귀라서 밤에 방송을 하니까 그것 때문에 종종 깨시는 것 같더라. …원래라면 안 들려야 정상이겠지만… 내가 실수를, 진짜로 작은 실수를 해버리는 탓에."


이건 좀 흥미가 생기는데.


1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의 밖으로 나가며, 이건 생각보다 볼만한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방음 부스라고 이야기는 했는데, 그게 방음 마법에 문제가 생겼던 것 같아서. 그걸 해결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다보니 일주일이라고 이야기는 드렸는데, 실제로는 얼마나 걸리는 지를 몰라서."


그렇게 떠들어대는 흡혈귀의 화면 옆에 보이는 채팅창에 작은 박쥐라고 불린 시청자들이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한 내용들을 봤다.


마법사를 불러야 하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돈이 나간다던가, 그것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종족도 있다던가, 그런 문제는 단순 마법사가 아니라 방음 관련해서 전문직 마법사를 불러야 해서 시간이 더 걸린다던가 하는 것들.


본인의 경험을 얘기하는 시청자부터 시작해서 어디선가 돌아다니던 이야기를 하는 시청자, 별의 별 시청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시청자들의 이야기를 보던 흡혈귀의 얼굴은 밝아졌다가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아니, 그렇게 오래 걸…리나? 큰… 큰일 났네…. 난 일주일이면 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옆의 채팅창으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옆집에 사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라고 난리치는 시청자들의 채팅창을 읽은 흡혈귀가 우물쭈물거리며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그게… 내가, 옆집에 사는 분이 진짜로 '사람', 그러니까. '인간'이라서… 시간대가 안 맞는데 어떻게하면 좋을까…?"


내가 사람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시청자들의 반응이 한순간 사라지더니, 이윽고 폭발하듯이 채팅창에 온갖 글들이 올라온다.


진짜 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글부터 시작해서 너 그거 잘못되는 순간 집에서 쫓겨나는 게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른다, 한번만 사진 찍어줄 수 있냐는 온갖 글들이.


눈으로 못 봐줄 수준의 글들이 올라오는 것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던 나머지, 다시보기를 꺼버리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아니, 거. 허, 참내."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골치아픈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