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백호연은 자기 전화번호를 알려주고는 내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한번 하고는, 이틀 안으로 문자나 전화를 주겠다며 말하고는 부랴부랴 어딘가로 향했다.


그 속도가 내게 뛰어오던 것과 비슷해 보였으니 급한 일이 생겼거나 출근할 시간이라 그런 거겠거니 하고 넘겼다.


…껴안고 있었던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슬그머니, 한 두명씩 공원에 나타나서 걸어다니기 시작하는 다른 종족들을 곁눈질로 보다가 나 또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정도로 시간을 보냈으면, 그 분홍 흡혈귀도 어련히 방송을 끝냈거나 자고 있겠지.


터덜터덜, 묘하게 지친 발걸음으로 아파트로 걸어가던 도중, 편의점의 모습도 중간에 봤는데 교대하는 시간인지 아까 봤던 올빼미랑 머리에 뿔이 달린 종족이랑 같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덤으로 물건들도 같이 들어왔는 지 서로 도와주면서 빠진 물건이 없나 확인하고 있었고.


저런 모습을 보면 그렇게 흥분할 만한 종족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진짜로 나 때문에 그렇게 되버렸나.


앞으로 다른 종족들에게 가까이 다가갈만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그런 다짐을 품고, 아파트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꽤 높은 층에 있었는 지 내려오는 데 시간이 걸려 잠깐 스마트폰을 꺼내어 오늘은 또 뭔 일이 있었나 인터넷을 살펴봤다.


…그렇게 유익한 건 없네. 이것도 종족차별, 저것도 종족차별.


어찌된 게 전의 세상이랑 종족이 많아졌다는 것 말고는 그렇게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마법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게 가장 큰 것 같지만.


솔직히, 마법이라고는 해도 내게 크게 와닿는 부분은 없었다.


그도 그럴게, 병원에서도 정밀 검사를 해봤지만 내 몸에는 마나라는 게 전혀 존재하지를 않아서 대부분의 마법에 크게 영향을 받기 쉽거나, 아닐 지도 모른다는 말만 들어서 아리송하다.


왜 그렇게 어중간한 설명이냐 물어보니 사람이라는 게 마법을 쓰는 경우도 있었고, 못 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개개인마다 격차가 너무 커서 어떨 때에는 영향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서 그렇다.


…가 의사의 설명이었다.


결론은 내 성별이 바뀐 것도 어떤 마법의 영향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고, 어쩌다 영향을 받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총평.


참으로 머리만 아파진 결과였다.


"1층입니다."


음, 딴 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들렸고, 문이 열리자 안으로 들어갔다.


9층 버튼을 누르고, 닫히는 버튼을 한번 더 누른 뒤, 벽에 등을 기댔다.


새벽에 깨어난 탓에 밖에 나왔을 뿐인데 하루동안 정말 상상도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집에 들어간 뒤에 대충 얼굴만 씻고 침대에 누운다면 바로 잠이 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짧은 시간만에 몸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지금 잤다가는 새벽에 깨기는 커녕, 새벽에 눈 뜨고 밤을 지새워야할 지도 몰랐으니 잘 예정은 없었지만.


지금 들어가서 해야하는 일은 입은 옷은 빨래통에 집어넣어버리고, 샤워하고 잠을 깨울 커피라도 사러 밖에 나가야했다.


진짜로 잤다가는 수면 패턴이 꼬이는 건 둘째 치고, 밤에 옆집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방송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9층입니다."


등을 기댄 벽에서 몸을 떼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돌아 걸었다.


그리고, 내 방 앞에서 멈췄을 쯤에 옆집에서 소리가 들려오나 잠깐만 기다려봤지만, 문 밖에서는 역시나 암뤈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자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한숨만 내쉬면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손잡이를 당겨 문을 열었다.


현관으로 들어선 뒤에 문을 닫으니, 한발짝 늦게 현관 전등에 불이 들어오며 해가 아직은 낮게 떠오른 시점이라 약간 어두컴컴한 집안이 보였다.


운동화를 대충 벗어던지며 슬리퍼로 갈아신고, 샤워를 하기 위해 보일러로 다가간 뒤 목욕으로 돌렸다.


저 멀리 베란다쪽에 설치된 곳에서 우우웅 하고 진동음이 들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확실히 옆집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시각이 시각인지라 아마 자고있지 않을까.


낮밤이 다른 흡혈귀의 입장에서는 바른 생활… 아니, 낮에 돌아다닐 수도 없고 깨어있는 것도 힘드니 바른 생활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활인가.


딱히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당장 피해보고 있는 입장이라 동정심은 커녕, 벽 너머로 들려오는 소음이 빨리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


자다가 새벽에 깨는 것도 생각보다 기분 나쁜 일인데다가 피로도 제대로 풀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거기서 잠을 더 자기에는 강제로 깨버린 탓에 잠도 안 온다.


…뭔가 불완전하게 타버린 감정도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건 아까의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는 부탁과 백호연에게 껴안긴 탓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람을 대체 뭐로 생각하는 걸까. 애착인형도 아니고."


그런 불멘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볼 때마다 껴안아봐도 되냐고 물어보는 게 제 정신인가.


아니면, 여기서는 그런 스킨쉽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일상화된 세계인건가.


내가 알고있는 상식들의 대부분이 쓸모가 사라져간다. 정확히는, 당연히 지켜야되는 것들에서는 괜찮았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 무너져간다.


이게 사람과 사람이 아니라 종족과 종족이 되어버리니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할 지를 전혀 모르겠다. 머릿속이 점차 복잡해져간다.


이대로 가다가는 뻥 하고 터질지도 몰랐기에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서 생각을 지우려 노력하고,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한쪽에는 변기와 세면대, 한쪽에는 욕조가 붙어있어 욕실이 아니라 화장실 겸 욕실이었지만, 이러나저러나 뭐라 부르든 상관없는 구조였다.


욕실 벽 한 쪽에 붙여놓은 옷걸이에 갈아입을 옷과 속옷들을 올려놓고, 샤워기의 물을 온수로 돌렸다.


쏴아아 하고 기분 좋아지는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 손을 내밀어 물의 온도를 확인해본다.


조금은 미적지근한 느낌이 들었으니 조금 더 따뜻해지도록 샤워기 밸브를 온수쪽으로 좀 더 돌렸다.


약간이지만 물의 세기가 약해지고, 다시 손을 갖다대니 이제서야 샤워하기 적당한 온도가 된 물이 된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입고있던 옷은 물론이고 속옷도 욕실 밖으로 전부 던져버렸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욕조 안으로 들어가 샤워기를 들고 머리랑 몸 이곳저곳을 닦았다.


몸을 대충 닦고 나서는 샤워기를 고정하는 곳에 샤워기를 꽂아 놓고, 욕조 한 켠에 놓은 샴푸를 손에 담아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이 길어지면서 생긴 불편함은 생각했던 것보다 샴푸를 더 많이 써야한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감는 것도 그렇고 말리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귀찮음을 굳이 감수할 이유가 있나 싶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는 머리를 자를 이유가 없었기에 가만히 냅두고 있었다.


…최근에 발생한 애착인형처럼 취급받는 것 때문에 머리를 남자였을 때처럼 짧게 잘라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세면대에 붙은 거울로 봤던 여자로서의 내 모습은 남자였을 때와는 완전히 딴편이었지만, 이상한 부분에서는 남자였을 때랑 달라진 부분들이 없었다.


가령, 이상하게도 눈 밑의 다크서클이라던가 왼쪽 눈 밑의 점이라던가 주요 부위에 털이 없다거나 하는 것들.


머리카락이나 다른 곳에는 털이 그렇게나 많았는데 왜 그런 곳에는 털이 없었던 걸까.


샤워기의 물로 머리에 묻은 샴푸를 닦아내며 왜 그런 건지 생각을 해봤지만, 내가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아나.


그냥, 헛소리랑 다를 바가 없는 결론들만 내놓으면서 샤워를 하고 있을 뿐이지.


오늘따라 길디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드는 것을 느끼며 머리에 묻은 샴푸가 물에 쓸려내려가기를 기다렸다.


이쯤이면 됐겠지 하고 샤워기를 다시 고정시키고, 머리카락 이곳저곳을 만지면 손에 샴푸가 묻었나 안 묻었나를 확인해보니 물기만 묻어있는 것을 보면 다 닦은 것 같았다.


남자였을 때보다 확연하게 더 오래 걸리는 샤워 시간에 묘하게 짜증이 난다. 정확히는 머리때문에 더 오래 걸리는 거겠지만.


에휴. 하고 한숨만 한번 내쉬고 옷걸이 한 쪽에 걸린 수건으로 몸이랑 머리의 물기를 닦아냈다.


물기로 축축해진 수건을 욕실 밖에 쌓인 옷들 위로 던져버리고, 몸을 뒤로 돌려 세면대의 거울을 봤다.


열기로 이곳저곳 뿌얘진 거울 사이로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온, 왼쪽 눈 밑의 점이 인상적인 피곤해보이지만 병이 걸린 것 같지는 않은 하얀 피부의 가슴이 적당히… 적당히? 는 모르겠다.


아무턴 그런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허리까지 보여주는 거울로도 잘려 보이는 긴 머리카락도.


"…진짜로 잘라버릴까."


물기를 닦아냈어도 축축한 느낌이 드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