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사는 생물인 인간으로서는 높은 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꽤 무섭게 여겨지기 마련인데, 하물며 번지 점프도 한 번도 안 해본 몸으로서 꿈이라고는 해도 이런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고소공포증이라던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싫은 건 싫은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꿈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어도 다시 말하지만, 떨어지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추락하는 경험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평소에 보던 것과는 반대되는 시선으로, 하늘을 향해 높이 지어진 건물들을 올려다보던 것에서 지금은 땅을 향해 지어진 것 처럼 보인다.


건물들에서 시선을 떼고 옆을 보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그 뒤로 파란색을 넘어 심해의 색처럼 진해져 검은색으로 가까워지는 우주가 보인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건지 감도 안 왔지만, 꿈이니까 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봤던 건지 아니면 들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지는 꿈을 꾸면 키가 자란다는 속설이었는데─


"─후원 감사합니다!"


…옆에서 빽! 하고 들려오는 큰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늘도 잠을 더 자긴 글렀구만, 하며 아직 잠에서 덜 깬 뇌를 깨우기 위해 베개 옆에 뒀던 스마트폰을 찾아 손을 휘저었다.


손가락 끝으로 무언가가 닿는 느낌에 그걸 여기저기 만져보니 네모낳고 끝의 사각은 둥근 느낌에 살짝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것이 스마트폰의 커버가 맞는 듯 했다.


반쯤 뜬 눈 앞으로 그걸 갖고와서 옆에 달린 버튼을 눌러 전원을 켜서 시간을 봤다.


오전 4시 47분.


더 자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그렇다고 지금 침대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럼, 가만히 누워서 시간이라도 보낼까 하고 생각은 해봤지만, 옆집에서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견디기가 힘들다.


뭐 그리 준비할 게 많다고 일주일이나 시간이 걸리는 걸까.


방송을 해본 적도 없었고, 방음부스라는 것도 있다는 것도 그제 알았기에 의문은 많았지만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누워있기도 애매했으니 어쩔 수 없이 잠에 취한 정신이라도 깨울 겸, 편의점이나 갈까.


부드러워서 떨어지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이불을 오른쪽으로 밀어내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자꾸만 감아지려고 하는 눈을 비비면서 침대 밖으로 몸을 돌리고 밑에 있을 슬리퍼를 신었다.


졸리다. 더 자고 싶다.


어제 11시 쯤에 잠들었으니 5시간 잤으면 충분히 잤을 만도 한데, 몸은 여전히 수면을 요구하고 있었다.


자꾸만 앞으로 숙여지는 고개를 똑바로 세우고, 스마트폰에 꽂힌 충전기를 빼내어 잠옷으로 입던 츄리닝 바지에 집어넣으면서 일어섰다.


일어서서 기지개도 한번 해보고, 허리를 아래로 숙여서 스트레칭도 한번 해본다.


남자의 몸보다 유연하기는 유연한 지 뼈에서 뿌드득하고 나던 소리들이 어디에서도 안 들렸다.


모처럼 새벽에 일어났으니 편의점에서 아침이나 가볍게 해결하고 공원이나 돌아다닐까.


의자에 걸쳐놓았던 검은색의 무늬없는 후드 달린 점퍼를 입고 방 밖으로 나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거실을 이 시간에 보는 것도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평소라면 이 시간엔 눈을 뜨는 게 아니라 좀 더 뒤에 떴겠지만… 옆집에서 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바람에 깬 것이니 어쩔 수 없었다.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게, 흡혈귀라서 낮밤이 바뀐 채로 살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어제 들었던 지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대한 빨리, 방음부스라는 게 고쳐지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전에 마법이라던가 하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런 것에는 단 하나의 지식도 없어서 이해도 못했고 옆집의 흡혈귀도 그러려니 하며 넘겨버린 것도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보면서 살짝 입맛을 다신다던가 묘하게 흥분된 기미를 보였던 것처럼 느껴졌지만… 아마 착각이겠지.


흡혈귀라고는 해도 이유없이 사람을 보면 흡혈을 한다던가 하는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가 내가 알던 세상과 다르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도덕이라던가 윤리라던가 하는 것들은 그대로이지 않을까.


…아마도.


골치아픈 생각들이 점차 머리를 뒤덮어가려는 것을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일부러 머리 한 구석으로 밀어내버렸다.


이런 것들은 괜히 깊게 생각해봤자 귀찮아질 뿐이다.


뭐가 어찌됐든 간에 지금 있는 곳은 여기니까 여기에 맞춰서 살면 그만이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에 따르라는 말도 있으니까.


어두컴컴하지만 사물의 윤곽들은 대충이나마 보이니 현관쪽으로 걸어가서 슬리퍼를 벗고, 검은색의 운동화를 신는다.


맨살에 닿는 느낌은 영 좋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오래 돌아다닐 생각도 없었으니 피부는 괜찮겠지.


운동화 앞 부분을 땅에 가볍게 두들겨서 다 들어갔나 확인하고, 놓고 온 게 없나 잠깐 머리를 굴려봤다.


스마트폰 챙겼고. 카드는 스마트폰으로 대체 가능하고. 마스크….


현관 옆, 신발장을 여닫는 손잡이에 달린 검은 봉투안에 포장된 마스크가 보였다.


이전 세계에서는 전염병이니 뭐니 하면서 어느정도 가라앉았을 때에도 쓰고 다니던 것이었지만, 이쪽에 와서는 일주일정도만 쓰고 다녔지 그 이후에는 쓰고 다니지도 않았다.


"…괜찮겠지, 뭐."


이제는 쓸 일이 없으리라 여기며 마스크에서 시선을 떼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뒤, 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현관문이 전자음을 내며 잠기는 것을 확인하고, 집 안에서는 그렇게나 크게 들렸던 소리가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안 들리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어차피 며칠 내로 해결될 문제였다.


그때까지만 참고 살자.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옆의 아래 버튼을 눌렀다.


1층에서부터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니 종족이라던가 그런 것들이 다르다고는 해도 기본적인 생활 방식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주머니에 들어간 스마트폰이라던가, 컴퓨터라던가 하는 것들.


…가끔, 인터넷에 나랑 비슷한 사람은 없나 검색은 해봤다. 요즘은 안 그랬지만 일주일 전에도 그랬고.


근데 검색해보니 별 쓰잘데기 없는 내용들로만 가득했다.


인간한테 쓰다듬어지고 싶다던가, 인간 껴안고 싶다던가, 인간한테서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난다던가.


보면 볼수록 머리가 아파오길래 그 이후로는 검색도 안 해본다.


"9층입니다."


"아."


잡생각이 너무 길었나보다.


어느샌가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안으로 들어간 뒤, 1층을 눌렀다.


오늘따라 내려가는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조용한 엘리베이터의 왼쪽에 붙은 광고판에 눈이 돌아갔다.


엘프가 재배한 야채를 보여주다가 다음으로 넘어가더니 젖소, 여기서는 홀스타우로스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런 종족의 한정판 우유를, 다음은 싸게 판매한다는 고기 종류들.


중간에 머리가 어질어질하게 만드는 우유가 있었지만 아무 것도 못 본 것이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밖으로 도망치듯이 빠른 걸음으로 나왔다.


아파트 출입문으로 가다가 중간에 멈춰서서, 오른쪽에 있는 우편함을 살펴봤지만 아무 것도 오지 않았다.


야간에 주로 활동하는 종족들도 있어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오는 우편이나 택배가 꽤 있던 지라 혹시나 싶어 확인해본 것이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서야 출입문 밖으로 나섰다.


새벽이지만 아직 해가 뜰 시간은 아니었기에 가로등이 켜져 있었고, 그런 가로등 아래로 오늘도 순찰을 도시는 분들이 보였다.


아파트 경비원들이시겠거니 하고 넘겼지만, 너무 젊어보여서 의외였다고나 할까.


엘프… 아마도 엘프가 맞지 않을까. 이곳에는 생각보다 더 오래 사는 종족들도 있다고 들었으니 그런 종족일지도 모르겠다.


그쪽을 너무 바라봤던 탓일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고개만 슬쩍 숙여서 인사하고 편의점을 향해 걷는다.


본 적 없는 나무들의 붉은 빛으로 물든 나뭇잎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도, 혹시나 앞에서 오던 사람이랑 부딪치지는 않을까 돌아보기도 하면서 걷다 보면 환하게 빛나는 편의점이 보였다.


새벽에 오는 것은 처음이라 평소에 보던 직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종족이겠지.


편의점의 문을 여니 전자음이 들리면서, 계산대에 서있던 알바생이라 생각되는 종족에게서 인사말이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알바생을 보자마자 생각난 것은 부엉이… 아니, 올빼미가 맞나?


머리카락 위로 깃털같은 게 양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동그랗게 뜬 큰 눈과 편의점 유니폼의 뒤로 보이는 흰색과 갈색, 검은색의 날개같은 무언가가 몸을 덮고 있었다.


…굉장히 종족 차별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고개가 180도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지만 굳이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인사를 해왔으니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인사하며 이른 아침으로 뭘 먹을지 컵라면류가 쌓인 곳으로 향했다.


종족이 많으니 컵라면의 종류도 가지각색이라 매운 맛이 없는 종류나 고기가 안 들어간 것, 야채가 없거나 아니면 특정 재료가 빠진 것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고기 향이 많이 나면서 적당히 매운 쪽이 좋았다.


그래서 이… 어떻게 발음해야 할 지도 모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컵라면을 주로 고르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요상한 호기심이 생긴다.


인터넷에서 봤던 건데 엘프들이 주로 먹는 컵라면이란건 어떤 맛인걸까.


마침 여기 편의점에도 있던 물건이라 왼손에 하나 챙겼고, 나머지는 마실 물이랑 고기가 들어간 삼각김밥 두개를 갖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 부탁드립니다."


"네, 네."


갖고 온 것들을 계산대에 내려두고,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꺼내서 페이로 결제하는 창을 띄우고 카드 결제기에 갖다 댔다.


"…봉투 필요하신가요?"


"아니요 나무 젓가락만 주세요."


계산기에서 결제가 완료되었다는 소리가 들리자 갖다대던 스마트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고, 먹을 것들을 편의점 한 켠에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저기… 요!"


뒤에서 알바생이 부르기 전 까지는.


"왜 그러십니까?"


"그… 이런 부탁드리기, 정말 죄송한데요…."


알바생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계산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인간이 쓰다듬으면, 기분이 좋다고 들어서요…."


"…하?"


"한번만, 한번만 쓰다듬어 주시면 안 될까요!?"


참으로 어질어질한 부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