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카페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난 뒤, 금향이 무료로 건네준 커피를 마시며 도서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뒤에는 청하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매일 보던 쾌활한 모습이 아니라 터덜터덜, 축 쳐진 발걸음으로 따라오는 중이었다.


아까의 일이 그렇게나 충격이었던 건지 점심을 먹을 때에도 같은 모습이었는데, 아직까지도 헤어나오지 못한 모양이다.


다만, 문제라면 그런 우리의 모습을 주변에서 보기에는 약간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이었지만.


누가 본다면 모녀의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청하의 외모를 보면 그럴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 믿었다.


…아마도.


청하의 외모가 키나 그런 부분들은 어린애로 보이기는 하지만, 가슴 만큼은 압도적으로 크다보니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발걸음을 멈추고 등 뒤에서 따라오는 청하를 가만히 서서 기다리니 등 쪽으로 툭. 하고 부딪쳤다.


"…아. 미안하네."


"괜찮으니, 아까 일은 잊어주셨으면 합니다."


"하, 하지만 그건 내 잘못이지 않는가."


"실수 아닙니까. 여러번 실수한 것도 아니고 한번의 실수로 뭐라고 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 그렇게 받아준다면 다행이구나."


청하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자 그제서야, 축 쳐진 어깨가 똑바로 세워졌고, 땅을 쓸듯이 내려가있던 꼬리도 어느정도 높게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청하에게는 저런 모습보다는 평소의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너무 과하면 모른 척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청하의 모습에 주변에서는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내 입장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더 이상의 관심을 원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안 그래도 사람이라는 점 때문에 관심을 충분히 받고 있었는데, 거기다 방금 청하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충분하다 못해 넘쳐나는 관심을 받는 중이었으니.


흥, 흐흥.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나보다 먼저 앞으로 걸어나가는 청하의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빨리 도서관에 가자는 청하의 말이 머릿속으로 들려온다.


…잠깐 서있었을 뿐이었는데 말이지.


역시 청하는 청하였다. 괜히 원래의 청하로 만들어버렸나 후회가 생겼지만, 아주 약간의 후회였다.


어찌 됐든간에, 평소보다 더 빨리 걸어가는 청하의 뒤를 따라 도서관으로 걸어간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불만인 건지 빨리 가자며 거의 달리는 것에 가까운 속도로 걸어가는 청하의 모습에 역시 방금의 상태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하가 거의 뛰듯이 걸어가고, 나 또한 그것에 맞추어 뛰듯이 걷다보니 도서관에 빨리 도착하기는 했지만, 지치는 것도 빨랐다.


얼마나 걸었다고 이걸로 지치는 건지.


벌써부터 종아리부터 시작해서 허벅지가 아파온다.


숨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다리가 이렇게 아파서야. 나중에 따로 달리던가 아니면 헬스를 하던가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먼저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서는 빨리 오라는 손짓을 보내오는 청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제의 모습 그대로인 도서관의 모습이 보였고, 카운터 쪽을 살펴보니 오늘은 일을 하고 있는 직원이 보였다.


"음! 오늘은 잘 하고 있군."


"사장님이 야밤에 그렇게 나갔는데, 어떻게 일을 안 하고 있겠어요. 아, 손님. 어서오세요. 생각보다 더 빨리 오셨네요."


"하루만에 다시 뵙습니다."


직원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니 직원도 똑같이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제랑 어제 입던 복장은 사라지고, 오늘은 단정한 느낌으로 하얀 스웨터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치마를 입은 모습이었다.


"옷을 다른 것으로 입으셨습니까?"


"네. 마음에 드는 옷이기는 한데, 그래도 오래 입을 수는 없으니까요."


직원에게 그렇습니까. 하고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더니, 청하의 꼬리가 내 허리를 휘감는다.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해온 것에 당황하면서도, 직원 쪽을 쳐다보니 직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청하에게 좋은 시간 되라는 말과 함께 의자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 청하는 뭐가 그리도 기분이 나쁜 건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올려다보는 청하의 표정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섞여있었고, 곁눈질로 뿔이랑 꼬리를 보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이나 색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았다.


내 곁눈질을 눈치챈 청하가 자기 등뒤로 꼬리를 숨기면서 그와 동시에 뿔을 손으로 가리는 것은 동시에 일어났다.


"멋대로 용의 뿔과 꼬리를 통해 감정을 알아보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주게!"


"죄송합니다."


"사과라면 되었다. 아무튼, 모처럼 왔으니 금향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의복이라도 입어 주게나."


"…옷, 말입니까?"


"의복말이다. 금향도 집사복인가 뭔가하는 걸 입혔으니, 나도 내 마음에 드는 옷을 입혀봐야 되지 않느냐?"


내 의사는 어디로 보내버렸나.


따지고 싶었지만, 애초에 밤부터 시작해서 새벽까지 싸운 이유가 집사복을 입은 상태로 사진을 찍은 내 잘못도 어느 정도 있었기에 얌전히 입을 다물고 청하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다.


가는 동안 하늘을 날아다니는 책들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책장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따라간다.


책장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일정한 규칙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반복한다.


청하는 자기 대신에 책장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인지 발걸음을 멈추고, 책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만든 주술이라네. 내가 가진 책들과 책장들이 어지간히 많아야지."


"그렇습니까. …혹시, 어떤 주술이 들어갔는 지 물어봐도 괜찮습니까?"


"괜찮기야 하겠지만, 이해는 할 수 있겠는가?"


"…취소하겠습니다. 이해를 못 하겠군요."


"그렇다니 뭐, 나로서는 안타깝군.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순간 바로 제자로 들일 생각이었는데."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까?"


"포기했을리가. 금향도 아마 자네를 제자로 받아들일려고 준비 중일텐데."


대체 내게 뭐가 있다고 눈 앞의 푸른색 용이랑 황금색 드래곤은 이렇게나 많은 관심을 쏟아붇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저, 각자의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넘겨버리는 편이 편하다.


직원이 요약해준 책의 내용대로 나는 너무 깊게 엮이지 않도록 조심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너무 깊게 엮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들이었으니.


용과 드래곤의 기준으로 엮인다는 건 어느 의미인걸까. 어느 정도로 친해진다는 걸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엮인 이후의 사람들은 집착당하며 살아갔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책장을 보며 발걸음을 멈췄던 청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것에 맞추어 다시 발을 놀렸다.


분명히 일직선으로 걷고 있는 것 뿐인데도 왜 이렇게 길이 난잡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보면 방금 왔던 길이 보였지만, 앞을 보면 이상하게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말게. 주술의 영향으로 공간이 넓어진 상태라 그렇게 느끼는 것이니."


"아까부터 일직선으로 걷는 게 맞습니까?"


"직선으로 걷고 있는 게 맞다네. 다만, 이건 내가 있으니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게 다른 점이군."


"원래라면 못 들어오는 곳입니까?"


"그렇다네. 쉽게 설명하자면, 주빈은 집 주인의 초대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알겠습니다. 근데,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


"저번에 만났을 때부터 그렇기는 했지만, 아까부터 말투가 계속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다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주위의 어른들이 하는 말들을 따라하다 보니 이렇게 되버렸으니."


"…버릇입니까?"


"버릇이지. 너무 깊게 물들어버려서 이제는 뗄레야 뗄 수도 없는 버릇이라네."


"그렇습니까."


왜 저렇게 요상한 말을 계속하는 건가 싶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말버릇이었다.


청하도 고쳐보려고 노력한 것 같기는 한데, 안 고쳐진 걸 보면 지금은 포기한 것 같다.


"참고로, 어른들의 말은 어땠습니까?"


"안타깝게도 나와 비슷하다네. 다만, 다들 그런 말투를 오래쓴 탓에 아무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느니라."


"청하같은 말투가 대부분입니까?"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 같은 말버릇이라네."


그렇게 청하의 말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나 를 시작으로, 청하의 집이라 생각되는 곳까지 잡다한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걷는 동안 주변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책장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신기하게 본 것도 한 두번이지 이제는 언제쯤이면 도착하는 건지 궁금하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다.


"시계를 봐도 별 의미는 없느니라. 이 공간 안에서는 시공간이 뒤틀려있으니."


"…그것도 주술입니까?"


"주술이니라. 공간을 특정삼아서 사용하는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지. 물론, 이것보다 더 넓은 공간에는 사용할 수 없다네."


"이것보다 더 넓은 공간에서 사용이 가능했다고 하면 조금 무서울 뻔 했습니다."


"…금향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이야 하다만, 그다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군. 그렇게 공간을 넓혀봤자 의미도 없고."


딱, 이 정도의 공간이 적당하느니라.


그렇게 머릿속으로 전하는 청하가 걸음을 멈추고, 어느샌가 나타난 문을 여니 뒤로 현대적인 건물이 아니라 옛 시대의 것처럼 보이는 목재로 지어진 집이 보였다.


저런 집을 양반집이라고 부르던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풍스러웠고, 청하가 입은 옷을 생각하면 어울리는 집이었다.


너무 전통적인 느낌이 없지않아 들기는 했지만, 집에 초대받은 입장이었으니 속으로 삼켜두었다.


청하가 먼저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고, 열린 대문 사이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내는 모습에 뒤 따라서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선 대문 뒤의 모습은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간의 모습이었다.


마치 옛날에 살았을 법한 양반집의 모습을 그대로 따놓은 것 같은 공간에 약간이지만 과거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청하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푸하핫! 하고 웃고는 내 등 뒤로 다가와서는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앞에서 서 있을 겐가! 어서 빨리, 안으로 들어가게나!"


"아, 잠, 잠깐. 너무 세게 밀지 말아주시죠!"


등 뒤에서 밀어오는 힘이 너무 강한 나머지 무게가 앞으로 쏠리며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아, 이거 머리 박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앞으로 꼬꾸라지는 시야에 눈을 꾹 감고, 고통에 대비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이 없었기에 살짝, 실눈을 뜨고 앞을 보니 공중에 들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청하가 나를 어깨에 짊어진 상태로 집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청하는 자기가 신던 신발을 대충 돌 위에 벗어던지고, 내 신발을 직접 벗겨서는 곱게 내려놓았다.


"…저도 걸을 수 있으니 내려주시면 안 됩니까?"


"손님이 너무 느려서 집 주인이 직접 데려다주는 것인데, 뭐가 그리 불만인가."


"제가 두 발로 걷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어허. 손님은 얌전히 기다리게나!"


그렇게 말한 청하는 나를 어깨에서 내려놓지 않고 안이 넓직한 방으로 데려왔다.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자 어디선가 탁자와 방석이 날아와 방 가운데에 내려앉았고, 청하는 방석 위에 나를 소중한 물건처럼 천천히 내려놓고는 반대편의 방석에 앉았다.


"차라도 마시겠나?"


"주신다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너무 공짜를 좋아하는 것 아닌가?"


"공짜여도 선의로 건네주는 것과 선의가 아닌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야, 지금 내가 주는 것은 어떤가?"


청하가 허공에 휙 하고 손을 뻗자 방의 문이 열리고 주전자 잡혔고, 차를 담는 잔 두 개가 내 앞과 청하의 앞에 날아왔다.


졸졸졸 하고 청하가 먼저 내 잔에 차를 따르고, 그 다음에 자기 잔에 차를 따르는 모습을 보니 이리저리 날뛰던 청하의 모습과 안 어울려 어색하게 느껴진다.


내가 보던 청하는 이렇게 행동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청하는 주전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나를 보며 웃었다.


"왜. 내가 평소와는 달라서 그런가?"


"그, 렇습니다."


"집에서는 예의를 갖추고 살아야 하는 법이지. 그게 남의 집이든, 자기 집이든."


언제 지인이 올 줄 모르지않나.


그렇게 머릿속으로 말해오는 청하의 입꼬리는 높이 올라간 채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하의 꼬리도 올라간 입꼬리처럼 천장을 향해 높이 솟구친 채였고.


"모처럼의 손님이니, 나와 실컷 놀아주다가 가게나."


청하는 자기 몫으로 놓인 차를 마시고는 나를 보며 잔을 들어올렸다.


…그래도 청하니까 장난은 치지 않았겠지.


먹을 것에 장난을 치는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청하를 믿고 잔에 담긴 차를 마신다.


쓴 맛이 나겠거니 했지만, 생각보다 쓴 맛은 나지 않았고 입 안에서 맴도는 깔끔한 맛과 입 안에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상쾌함 만이 느껴졌다.


"어떤가. 점심에 먹은 것들을 닦아내기에 좋은 차 아닌가?"


"…좋은 차입니다."


"그렇지? 금향 녀석은 맛도 없는 게 뭐가 좋다고 말하더구나."


그리 말하며 청하는 기분이 좋은 듯, 웃으면서 내 잔에 차를 한잔 더 따라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