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서로 아무 말도 없이 차를 홀짝거리며 마시기를 몇 분째 였을까.


내 잔에 담긴 차가 다 떨어지면 청하가 따라주고, 자기 잔에 차가 떨어지면 내가 주전자를 들어서 청하의 잔에 따라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어떤 말을 꺼내야 할 지,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 지 생각을 해보았지만 답답하게도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저, 입 안에 맴도는 차의 상쾌한 향만 느끼며 청하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런 내 심정을 모르는 청하는 그저 웃으면서 맛있다는 듯이 차를 연신 마셔댔는데, 주전자에 담긴 차의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분명히 주전자에 담긴 내용물을 거의 다 마셨을 정도의 양이었는데,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나온다.


"…주전자도 뭔가, 따로 주술을 거셨습니까?"


"그렇다네. 왜, 신기한가?"


"아까부터 계속 나오는 게 언제까지 나오는 건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주전자 안에 들어있는 차는 마를 일 없이 계속 나오느니라. 주술 뿐만 아니라 마법도 걸어놓아 내부를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물만 넣으면 안에 들어있는 것의 효능으로 같은 차가 나오게 만들었으니."


"그렇습니까."


소리도 내지 않고 차를 마시며 내게 답하는 청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의 높으신 분처럼 느껴진다.


여태까지 봐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당황했지만, 내가 보지 못했던 청하의 모습이라 여겨 금방 익숙해지겠거니 하고 넘겨버렸다.


청하는 금세 차를 다 마셨는 지 또 주전자를 내게 건네며 잔을 내밀었지만, 주전자를 기울여봐도 차가 나오지 않는다.


"흠. 생각해보니 꽤 오래전에 채워놓고 다시 채운 적이 없었구나. 잠깐만 기다려주게."


그렇게 말한 청하는 오른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한자로 물 수가 적힌 흰색의, 부적과 비슷하게 생긴 종이를 꺼내어 내게서 주전자를 가져가더니 안으로 그 종이를 집어넣었다.


"잠깐, 주전자가 채워지는 동안 내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네."


"굳이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네. 점심 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야하지 않겠나. 그리고, 내 감정에 대해서도."


"…알겠습니다."


자세를 바로 잡고 청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니 청하또한 자세를 바꾸어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마주본다.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에는 내 주변에는 어른들밖에 없었다네. 이런, 이상한 말투를 사용하는, 성격도 이상해서 인간에게 친하게 다가가지 못했던 어른들이."


어른들은 인간의 생활에 궁금함이 많았지만, 자신들의 태도에 상처받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는 인간이 오지 못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네.


"…그래서 청하를 제외한 다른 용께서 안 보이는 겁니까?"


"그건 아니라네. 나 말고도 이종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족들도 분명히 있느니라. 다만, 용이라는 이유로 남들이 쉬이 다가오지 못하기에 가리고 다닐 뿐."


어쩌면, 내가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내 머릿속으로 자조하듯이 전하는 청하에게서 안타까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어째서 저런 감정을 품고 내게 설명하는 걸까. 이게 그렇게나 중요한 이야기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아직은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청하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는 게 중요했다.


상념으로 빠질려는 생각을 바로 잡고, 청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나름대로 인간들에게 친하게 지내려는 동족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느니라. 그들 중에는 나 또한 있었으니."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서 죄송하지만,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안 좋은 일이라… 모르겠군. 전혀 모르겠네. 이게 안 좋은 일인가? 매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답이 나오지를 않다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동족들도 있었고, 그런 동족들의 일부를 받은 인간들은 자기 무리들을 지키는 데 전력을 다했느니라.


"너무 과할 정도로. 자기 밑에 속한 이종족들과 인간들을 위해 다른 종족들을 습격하거나 지배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지."


"…전쟁입니까."


"수없이 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동족들은 물론이고 드래곤까지도 영향을 받았을 정도라네."


금향이 공격을 당했던 것도, 금향의 동족들이 인간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어준 탓에 그랬으니.


아까는 자조하듯이 전하는 말이었디만,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무덤덤하게 옛 일을 말해오는 청하의 모습은 낯설었다.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태까지 봐온 어린애같은 모습이 아니라 오래 산 노인을 보는 것 같다.


아마, 청하가 알면 자기는 어린애라고 주장할 것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청하도 본인이 말하는 일에 휘말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다행스럽게도 휘말리지는 않았네. 동족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건지 그 당시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내 밑에 있는 인간들과 이종족들을 지키는 데 열성이었다네."


"…일부를 내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없었지. …지금까지는."


문득, 청하가 건네준 복주머니 안에 든 비늘이 떠오른다.


청하가 단 한번도 건네준 적이 없었다는 자신의 일부가, 지금 내 주머니에 있었다.


"이제와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는 표정을 하지는 말게나. 그건 선의로 건네준 것이니."


주빈, 너에게 뭘 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하지 않았겠느냐.


그렇게 전하는 청하의 말에 확실히, 청하라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청하가 지금의 내 생각을 읽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심증만 있을 뿐이지 물증은 없었으니 입을 꾹 다물고, 청하의 이야기를 듣는다.


"다시 돌아와서, 나를 따르던 인간들은 많았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점차 줄어들었지. 전쟁으로 인간의 수가 줄어든 것도 있었지만, 줄어든 만큼 이종족들이 그 공간을 채워나갔다네."


"그건, 예전에 찾아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퍼져나가는 것에는 나의 동족들과, 드래곤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인간이 무자비하게,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것이 보기가 싫어 이종족들을 도와줬을 뿐이라네. 우리들은 여전히, 인간을 원하며 인간이 우리를 바라봐주기를 바라지."


그게 인간에게 있어서 과도할 정도의 무게감이 되어 돌아왔을 줄은 몰랐다네.


내게 고개를 숙인 청하는 잠깐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나 또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여 둘이 있는 방 안에는 침묵만이 가득했고, 주전자가 허공에 붕 떠서는 텅 비어버린 내 잔과 청하의 잔에 차를 따르는 소리만이 들렸다.


"내, 사과를 받아주겠나?"


"사과를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지 않습니까."


"사고였어도, 문제가 발생할 뻔 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네. 게다가, 용이면서도 인간에게 그… 그런 짓을 할 뻔 했으니."


"…제 문제였습니까?"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네! 우리같은 종족들은 인간의 영향을 어느정도 자제할 수 있다네!"


다만, 그… 내가 인간들과 함께 살았던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나도 모르게 인간에게 다가가버리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렇게 변명이라도 하듯이 설명하는 청하는 내게 평소에 볼 수 없었던,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생각해보면 내게 그렇게 다가오는 이유가 사람이 그리워서 라는 이유라면 왜 그렇게 행동했는 지 대충은 이해가 간다.


이해는 가지만, 마지막에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민 것은 왜 그랬던 건지 모르겠다.


"그럼, 마지막에 얼굴을 들이민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잊어주게나. 진짜로, 그건 실수였으니 잊어주게나."


"…이유를 물어봐도 괜찮습니까?"


"대답 안 해줄거라네. 대답 안 할거야."


부끄러워서 아마 한동안 얼굴을 들고 다니지도 못할 것 같으니.


머릿속으로 전해오는 청하의 말에는 말 그대로 부끄러움이 가득차 있었다.


확실히, 남의 얼굴에 그렇게 가까이 얼굴을 갖다대면 부끄러울만 하기는 했다. 청하에게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게 보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는 않았으니.


내 몫으로 놓인 잔을 들어 차를 마신다.


입 안에서 차의 맛과 향이 맴돌고, 잔을 내려놓으면 주전자가 허공을 유영하며 내 잔으로 다가와 차를 따른다.


"알겠으니, 고개를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적어도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를 합시다."


"알, 알겠느니라."


한번 움찔하고 고개를 들다가 멈추고, 절반쯤 들었을 때에도 한번 더 멈추고, 마지막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볼 정도로 고개를 들었을 때에 본 청하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아주 잘 익은 사과처럼. 아니, 청하는 옛날부터 살아온 종족이니까 빨갛게 물든 감이라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지도 모른다.


청하의 붉게 물든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에 청하가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시야를 방해했다.


"보, 보지 말아주게나! 이렇게 부끄러울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까!"


"이미 다 봤는데 무슨 말을…."


"그래도,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니라!"


아마 청하의 눈 앞에 있는 게 내가 아니라 금향이나 다른 지인이었다면, 청하가 탁자를 뒤집어 엎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꼬리가 탁자의 밑으로 들어간 게 보였고, 당장이라도 탁자를 들어올릴 준비가 된 게 보였다.


"용, 용을 멋대로 놀리다니.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거라!"


"…후회할 일은 청하님이 만들고 계시고 있습니다."


"뭣! 청하님이라고 부르지 말거라! 청하라고 불러! 청하!"


"말투가 점점 더 이상해지십니다."


"주빈은 왜 그런 말투를 사용하는게냐!"


"옛날부터 살아온 청하님에게 맞추어 저 또한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 것인데,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평소에 하던 대로 해주게나! 어색해서 듣기 힘드니!"


"그럼, 청하님도 평소에 하던 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어색해서 힘듭니다."


부끄러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청하의 눈을 마주본다.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이걸로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한 건 끝났다. 더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청하는 흠, 흠. 하고 헛기침을 몇번 하고는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았던 자세를 바꾸어 방금처럼 편한 자세로 돌아왔다.


나 또한 바로 잡던 자세를 살짝 풀어서 편안한 자세로 바꾼다.


청하의 이야기로 긴장되고, 우울해진 분위기는 어느샌가 평소의 청하와 이야기했을 때와 비슷해졌다.


"그래서, 이제 부끄러운 이야기도 끝이 났으니 놀이라도 하는 건 어떤가. 바둑은 좋아하나?"


"바둑은… 어렸을 적에 배우기는 했습니다만, 잘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가. 그럼, 내가 적당히 봐주면서 해 줄테니 한 판 하겠느냐?"


"오랜만이기도 하니, 해보겠습니다."


청하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하자 청하는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검지 손가락과 중지 손가락을 겹쳐서 들고는 구부렸다.


덜컥! 하고 문이 큰소리를 내며 열리면서 방 안으로 바둑판과 바둑알이 담긴 팔각형 모양의 작은 상자 두개가 탁자 위의 잔과 주전자를 옆으로 밀어내고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서 밀려난 잔과 주전자가 항의하듯이 흔들렸지만, 주전자는 뚜껑이 닫혀 있어 차가 흘러나오지 않았고, 내 잔과 청하의 잔에는 어떤 조치가 취해진 건지 차가 넘쳐나지 않았다.


그런 주전자와 잔의 항의에 청하는 조용. 이라고 한마디를 말하자 흔들림이 멈추고, 얌전히 탁자 아래로 내려갔다.


"오랜만이라고 했으니 내가 흰색을 잡겠네. …정말로, 할 줄 아는 게 맞겠지?"


"할 줄은 압니다. 할 줄은."


팔각형 상자의 뚜껑을 여니 검은색 돌이 보인다.


하나를 집어서 만져보니 촉감이 좋은 게 이것도 꽤, 아니. 아주 높은 확률로 금향의 물건들처럼 고급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세게 내려놓아도 부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네. 그래도, 살살 다뤄줬으면 한다만."


"예의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가. 그럼, 한 수 부탁하네."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내 손에 든 검은 돌을 바둑판 위로 올려놓는 것을 시작으로 청하와의 바둑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삿된 말이지만 개같이 발리고 말았다. 그것도 세판 내리 연속으로.


역시 옛날부터 바둑을 해왔을 청하와 하는 게 아니었다.


세판 연속으로 진 상대인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청하의 시선이 오늘따라 아프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