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세 판 연속으로 청하에게 지고 난 뒤, 아무 말 없이 잔에 담긴 차를 마셨다.


바둑으로는 아예 상대가 안 될 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져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도 어느정도 봐주면서 하겠지 생각은 했었는데, 봐주면서 해도 지게 될 줄은.


역시 연륜으로 다져진 실력인건가. 하고 청하의 바둑 솜씨에 감탄이 나온다.


청하는 내가 세 판 연속으로 진 탓에 기분이 나빠진 것은 아닌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내가 괜찮다는 듯이 말하자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미안하네. 내 실력을 너무 몰랐구나."


"괜찮습니다. 지는 일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렇게까지 질 줄은 몰랐지만."


"그렇느냐. 나는 적어도, 어렸을 적에 해보았다길래 예전의 나 만큼은 하는 줄 알았느니라. 그게 용의 기준이라는 사실을 망각해버렸군."


청하는 식은 땀을 흘리며 탁자 옆에 놓인 자기 잔을 들어 안에 남은 것을 입에 털어마셨다.


고작해야 바둑인데 왜 저렇게 식은 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하는 건지 모르겠다. 게임에서 졌다고 화를 내는 성격이 아닌데.


오히려 게임에서 졌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졌겠지. 하고 넘겨버리는 편이었다.


그런 내 성격을 모르기에 청하가 저리 긴장한 것도 이해는 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건 너무 긴장한 게 아닌가.


청하의 꼬리도 그런 긴장을 담았는 지 아까부터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뿔은…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이상할 정도로 청하의 뿔을 보고 파악하려고 할 때마다 청하가 그러지 말라고 말했으니까.


지금도 청하의 뿔을 대충 살펴보려고 했을 뿐인데 눈을 희번뜩 뜨면서 나를 쳐다본다.


"어허. 감히 용의 뿔을 보고 감정을 파악하지 말라고 했거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너무 뚫어져라 보지만 않으면 괜찮느니라. 내 가슴에 몰리는 시선만큼이나 뿔에 몰리는 시선도 충분히 눈치챌 정도니."


"용이라서, 그렇습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종족들의 시선을 받기에 충분한 신체 아니더냐. 특히나 이, 작은 키에 이만한 가슴은."


청하가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는 이리저리 눌러대자 양옆으로 늘어나거나 위아래로 튀어나오는 가슴이 보인다.


…일부러 저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런 행동을 밖에서 했다면 시선을 안 끌래야 안 끌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것을 청하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굳이 내 앞에서 저러는 이유가 뭘 까.


내가 자기에게서 시선을 피하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을 만져대던 청하의 손놀림은 주전자가 서로의 잔에 차를 따를 쯔음에 멈췄다.


"…에흠, 어흠. 미안하구나. 이게 생각보다 만지는 게 재밌느니라. 만져보겠느냐?"


"거절하겠습니다."


"즉답이로구나."


"즉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질문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구나. …그래도, 재미있지 않았느냐?"


"재미 없었습니다.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어서 뭐가 그리 즐거우십니까."


"예전에 이런 행동을 했을 때에는 다들 체통을 지키라면서 아주 온갖 난리를 치뤘는데, 그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아느냐."


용이시여, 체통을 지켜주시옵소서 하고 말이다.


머릿속에서 전해오는 청하의 말에 상상으로 사극 속에서 볼법한 의복을 입은 신하들과 왕이 청하에게 무릎을 조아리고 체통을 지키라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바로 바로 떠오르는 걸 보면 내 안에서의 청하의 이미지가 어떤 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청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는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아주 눈에 훤히 보였다.


"즐거우십니까?"


"즐겁다. 아주 즐거워. 인간이라 이렇게 오랜만에 놀아보는 것도 얼마만인지."


"그렇습니까."


"…그래도, 역시 청하님보다는 청하라고 불러주지 않겠나?"


"…정말, 힘든 부탁을 하십니다."


"청하님이라는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겹단 말일세. 이제는 인간에게 청하라고 불리고 싶다네. 나름대로 체통이고 뭐고 다 버려가며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을 보아서 좀, 부탁하네."


체통이고 뭐고 버렸다는 청하의 말에 요근래에 봤던 청하의 모습을 되짚어본다.


…다 버리기는 했네.


도서관에 처음 왔을 때에 청하라고 부르라고 한 것부터 시작해서, 그제 있었던 일과 어제 있었던 일.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면 청하의 말대로기는 했다.


그래도 집에서는 나름대로 체통이라고 할 만한, 예의라는 걸 지키고는 있었지만.


나 또한 그에 맞춰서 예의를 갖추어 청하에게 대하고 있었을 뿐인데, 청하에겐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혹시, 제 말이 불편하셨습니까?"


"불편하다마다. 꼭, 예전에 들었던 말들을 다시 듣는 기분이라 별로였느니라."


"님이라는 단어는 빼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불러주면 안 되겠나?"


"…청, 청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왜 이렇게 쑥쓰러운 감정을 들게 만드는 건지.


청하라는 이름을 부르자마자 눈 앞에서 크으으, 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 청하가 보인다.


얼굴을 가렸다는 건 잘했지만, 꼬리는 제 감정을 감추지를 못하고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미친듯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꼬리는 안 감추십니까?"


"핫! 보, 보지 말거라!"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가리려고 노력하고, 한 손으로는 제 멋대로 움직이는 꼬리를 제어하려고 노력하고.


양 손으로 해도 모자를 일을 한 손으로 하려고 드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청하의 빨갛게 달아오른 절반의 얼굴이 보였고, 꼬리를 잡기는 했지만 꼬리의 끝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막지는 못했다.


여기서 청하라고 이름을 한번 더 부른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 지 호기심이 생겨난다.


안 그래도 얼굴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얼굴이 달아올랐는 데, 이 다음에는 어떤 반응일까.


궁금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청하를 님을 빼고 부른다는 게 생각보다 쑥쓰러웠던 것도 있었지만, 진짜로 어떻게 나올 지를 몰랐으니.


청하가 진정했을 무렵에는 이미 찻잔에 담긴 차가 다 식어서 미지근할 쯤이었다.


한 입에 차를 전부 털어마신 청하는 잔을 탁자 아래에 내려놓고는, 바둑판과 바둑알을 손짓으로 치우더니 다른 게임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장기였다.


"장기도 둘 줄 아는가? 모른다면 규칙과 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네."


"장기도 둘 줄은 압니다만, 바둑이랑 비슷합니다."


"…내 한 수, 아니. 세 수는 봐주면서 해주겠네."


"아까도 한 수에서 두 수로 늘어났지만 똑같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세 수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것도 힘들다면 더 봐줄테니, 장기를 두자꾸나."


"알겠습니다."


결과는 뭐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청하가 아무리 봐준다고 해도 연륜이 연륜인지라 쌓인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어떻게 장기말을 움직이더라도 그에 맞춰서 대응하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장기말이 죽어나갔다.


바둑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판이 됐을 쯤에는 일부러 봐준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설렁설렁 두기 시작했음에도.


"잘하십니다."


"혹시나 물어보는 것이네만, 비꼬는 것은 아니겠지?"


"비꼬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잘하셔서 그렇습니다."


"그…런가? 옛날에는 다들, 이 정도는 했었던 것 같았는데."


"그때에는 이런 것들이 주류였던 시대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구나. 평소에도 이런 종류의 놀이를 즐겨 하였으니."


그리운 표정으로, 장기말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추억하던 청하는 모든 장기말을 상자에 도로 집어넣고는 아까와 똑같이 보내버린 뒤, 다음 게임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세번째 게임은 체스였다.


"이건 금향이랑 주로 하던 놀이니라. 나도 이건 생각보다 못 하는 편이구나."


"그렇습니까."


"금향 녀석에게 열판을 둬서 한 판을 겨우 이겼을 정도니."


"그것도 잘하는 편 아닙니까?"


"잘…하는 편이구나. 생각해보니 금향 녀석도 그때에는 이것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네."


"다른 것은 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잘 안 하는 편이었지. 자기에게는 체스가 더 편하다면서."


이것도, 그때 쓰던 판과 체스말이라네.


아직도 광택을 잃지 않고 매끈함을 자랑하는 체스말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게 나보다 나이가 많은 물건인가 싶었다.


"얼마나 쓰셨습니까?"


"거의… 사백년은 넘었구나."


"…저보다 나이가 많다 못해 조상님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돕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느냐."


"저보다 나이가 많은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청하."


"님이라는 말을 빼… 아니, 방금 청하라고 불렀느냐?"


"청하라고 불렀습니다만."


"…후, 후후. 생각보다 유쾌한 기분이구나. 금향은 이런 기분을 매번 느끼고 있었던건가…."


"청하처럼 좋아하지는 않으셨습니다만."


"뭣!"


탕! 하고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자 충격으로 체스판과 체스말이 공중에 떠올랐지만,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가 붙잡기라도 한 것처럼 공중에 뜬 상태로 멈춰있었다.


나 또한 충격으로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아버렸기에 그 뒤의 상황을 보지는 못했기에, 조심히 눈을 떠보니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청하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 처럼 탁자를 손으로 짚은 상태였다.


"그 녀석은 이름을 불리고도 나처럼 좋아하지 않았다고!?"


"바로 옆에서 듣지 않으셨습니까."


"나, 나는 청하라고 불린 게 너무 기쁜 나머지 꼬리랑 뿔이 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탕 탕 탕. 하고 세번 연속으로 탁자를 내리친 청하는 흥분한 기미를 감추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호흡을 길게 내쉬는 소리가 몇번 들려왔고, 어느정도 가라앉은 숨소리가 들려오자 청하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다.


"미안하네. 예의를 갖추어야 하건만, 순간적으로 그렇게 행동해버렸구나."


"…괜찮으십니까?"


"전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 지 모르겠구나. 인간에게 이름을 불렸다는 것 만으로 이 정도라니. 예전에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허어. 나도 다른 동족들처럼 변해버린 걸지도 모르겠느니라.


어딘가 허망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던 청하는 잠깐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눈 앞의 탁자에 집중했다.


"지금은 상념에 빠질 시간보다는 노는 것에 집중하겠네. 그러려고 주빈을 부른 것이니."


"그건 알겠지만, 일단 체스판부터 탁자에 내려놓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여태까지 공중에 떠 있던 체스판과 체스말은 그제서야 탁자 위에 도로 내려올 수 있었다.


"기왕이면, 꼬리도 아래로 내려주시는 건 안 됩니까?"


"…꼬리?"


청하는 고개를 돌려 자기의 등 뒤를 보고는 강아지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를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고장난 기계처럼 뚜뚝, 뚝 하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청하가 약간 무섭게 느껴졌지만, 얼굴을 보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내가 이렇게 흔드는 게 아닐세! 아니란 말이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흔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만."


"에, 에잇! 그만 좀 흔들리거라! 내 신체면서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게냐!"


"청하를 닮아서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닮아서 그렇다고?! 이번에는 봐주지 않고 상대해줄 테니 기대하거라! 그 전에, 이 말 안 듣는 꼬리부터 어떻게 하겠느니라!"


청하는 두 손으로 꼬리를 붙잡고는 자기 다리 아래로 집어넣고 깔고 앉았다.


그렇게 깔고 앉았음에도 여전히 움직이는 꼬리 탓에 엉덩이나 다리가 씰룩거리며 움직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밖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잊어주게나."


"잊으려고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청하."


"자, 자네 일부러 그러는게냐!"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청하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앗! 그만 좀 움직이거라, 꼬리 녀석아!"


자기 신체랑 투닥거리기 시작한 청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