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며칠사이에 방음 마법이 더 불안정해진 것인지 옆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더 또렷하게, 더 명확하게 들려온다.


"앗, 오늘은 옛 흡혈귀들처럼 말하는 것을 잊었노라! 나의 작은 시종들이 보내준 공물은 잘 쓰겠노라!"


…청하가 떠오르는 말투였지만, 적어도 청하는 저렇게 한 가지 말투로 끝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한창 방송을 하고 있을 때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저런 성격이었는 지 아침에 봤을 때랑은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벌써 세 번이나 잠을 방해받은 건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참을 인을 세 번이나 마음속에 새겼는데도 화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보면, 나도 참을 만큼 참은 게 아닐까.


소음으로 옆 집에 찾아가는 게 불법이었던가. 그런 말을 인터넷이었나 어디선가 본 것 같았지만, 알게 뭐람.


지금의 나는 수면을 방해받아서 열 받은 사람이라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 뒤, 슬리퍼를 신고 바로 옆 집에 따지러 가려고 했지만, 지금 옷 상태로 나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다가온다고 해도 이불을 덮고 있으면 더웠기 때문에 검은색 반바지에 흰색 반팔티를 입은 채였다.


이대로 나가면 아마 부끄러움 보다도 추워서 밖에 나가자마자 덜덜 떨고 있지 않을까.


얌전히 방 안으로 돌아가서 반바지를 청바지로 갈아입고, 옷장에서 외투를 하나 꺼내 입은 뒤에야 현관에 가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오니 새벽임에도 확연하게 달라진 날씨가 느껴진다.


아직 영하권에 들어간 것도 아닐 텐데 입김을 불면 그대로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벌써부터 추웠다.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옷을 제대로 입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추위에 잠도 깨버린 채 슬리퍼를 질질 끌며 옆 집의 문 앞으로 향했다.


집 안에서는 그렇게나 잘 들렸던 목소리가 문 밖으로 나오자마자 안 들린다는 사실이 여러모로 화가 난다.


게다가, 그 원인이 이 분홍머리 흡혈귀한테 있었으니 내 분노는 정당하다.


주먹을 쥐고, 문을 세게 두드릴까 고민이 들었지만 새벽부터 쾅 쾅 하고 두들기면 나 또한 소음을 일으킨 당사자가 되기에 두들기는 소리만 들리도록, 통. 통.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두드리고 난 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리나 문에 귀를 대고 기다렸지만, 밖으로 나오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번 더 두들겨볼까.


방금은 너무 작게 두들겨서 안에까지 전달이 안 된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방금보다는 힘을 살짝 더 넣고, 문을 쿵 쿵 쿵 하고 세 번 두드린다.


안에서 쿠당탕, 우당탕 하고 뭔가 큰 소리가 나면서 물건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괘의치 않았다.


어차피 내 집도 아니었을 뿐더러, 옆 집의 소음의 원흉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 동정심은 커녕, 오히려 꼴 좋다는 말만 떠올랐다.


문 앞까지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문 안쪽에서 달칵. 하고 잠금을 푸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문에서 뒤로 벗어났다.


안에서 밖으로 천천히 문이 열리며, 열심히 방송하고 있었는 지 평소에 보지 못했던 화장칠한 분홍머리 흡혈귀의 얼굴이 보인다.


사람, 아니. 흡혈귀를 볼 때마다 매번 졸려보이는 표정이었는데, 새벽에 이렇게 활기찬 표정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나빠진다.


누구는 소음때문에 자다가 깼는데, 누구는 방송에 후원인지 뭔지 받아서 기분이 좋다니.


문 안쪽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분홍머리 흡혈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런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 아, 아니에요…. 저, 저 때문에 또 깨셨나…요?"


"예."


조심스레 물어보는 흡혈귀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긍정하자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리며 사색으로 변했다.


"죄, 죄송합니….!"


"새벽에 다른 이웃들 깰 일 있습니까."


나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려는 흡혈귀의 입을 막아버리고 말았다.


분홍머리 흡혈귀는 허리를 숙이는 것도 멈춘 채,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다가, 자기 입을 막고 있는 손 쪽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다 여겨 입에서 손을 떼니 뭔가, 손으로 입을 덮은 부분이 축축하다.


손을 눈 앞까지 들어올려보니 핥기라도 한 것처럼 침인지 뭔지 모를 물이 묻어있었다.


뭐지. 내 손을 핥기라도 했나.


내 속을 가득채우던 분노가 사라지고, 이제는 황당함만이 자리를 잡는다.


손에서 눈을 떼고, 문 옆에 서 있는 흡혈귀에게 고개를 돌리니 내 손으로 덮었던 부분을 혀로 핥는 중이었다.


"…뭐하십니까?"


"…아."


그제서야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 깨달았는 지, 급하게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를 건네왔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까 전의 큰소리로 말할 때와는 다르게 내게 들릴 정도로만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에, 그래도 상식이 있기는 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식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새벽에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방음 마법에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겠지만.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네? 저, 저희 집 안으로…요?"


"방음으로 질문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 네. 좀, 더럽지만, 안으로 들어오세요."


밖에 얼마나 서있었다고 벌써 이렇게 추운 건지 몸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흡혈귀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문을 크게 열고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내왔다.


들어와도 괜찮다는 말도 들었으니 흡혈귀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보일러를 틀어놓지도 않았는 지 밖이랑 온도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예전에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본 것중에서, 흡혈귀는 따뜻한 것보다 추운 것을 좋아한다는데, 생각보다 맞는 말일질도 모르겠다.


집 안에 들어와서도 외투를 벗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현관에 서서 슬리퍼를 가지런히 벗어놓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가 차가워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바닥도 차가워서 발이 시렵다.


동상이라도 걸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그런 내 모습에 흡혈귀가 허겁지겁 보일러를 난방으로 틀고는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죄, 죄송합니다. 마실 게 이런 것 밖에 없어서…."


유리병에 담긴 토마토 주스였다.


"…잘 마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새벽에 깨서 배에 뭐라도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방음때문에 찾아온 옆 집에서 이런 걸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흡혈귀는 자기 방이랑 나를 연신 벌가아보며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었는데, 아마 방송때문에 그런 듯 싶었다.


일단, 자기 할 일을 해결하고 대화하는 게 좋아보인다.


"…방송이 걱정되신다면, 그것부터 해결하고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급하게 나온 거라…."


후닥닥 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쏜살같이 자기 방으로 들어간 흡혈귀는 자기 시청자들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네고는 급한 일이 생겨 방송을 끄겠다고 전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방 안에서 지친 표정으로 걸어나오는 흡혈귀의 모습이 보였다.


이래저래 시청자들에게 시달렸는 지 표정이 완전히 죽어있었지만, 내가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바닥이 어느정도 따뜻해진 것 같아 손을 뻗어서 바닥을 만져보니 아까보다는 조금 덜 차갑지만, 그럭저럭 앉을 만한 온도가 되었기에 자리에 앉았다.


흡혈귀도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내 앞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소음 때문에 찾아온 내 시선을 피하는 흡혈귀를 보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하는 건지 생각을 해본다.


…다시보기를 통해서 방음 문제에 원인이 흡혈귀에게 있다는 것 부터? 아니면, 방음이 일주일이나 걸린다는 건 알겠는데 언제부터 시작할 건지에 대해서?


당사자도 아닌 피해자의 입장일텐데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두통이 일어난다.


반쯤 마신 토마토 주스를 한 입에 털어마시고, 유리병을 옆에 내려놓고 흡혈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흠칫 몸을 떠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좋은 표정은 아닌 듯 싶었다.


"…일주일이면 된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일주일이면 해결되는 게 맞습니까?"


"…그, 그게…."


우물쭈물거리며 대답하는 것을 주저하는 모습에,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리는 문제라는 걸 확신했다.


그와 동시에, 이 흡혈귀는 대체 뭔 생각으로 방음 마법에 문제를 일으킨 건가 싶었다.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소음 때문에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짓을 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속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한 상태였다.


이런 것으로 화를 내기에는 사흘동안 있었던 일이 일이었던 지라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눈 앞에 있는 게 흡혈귀가 아니라 금향이었다면 방음 마법을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새로 만들었을 것이었고, 청하라면 벽에 부적을 붙이는 것으로 방음을 해결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눈 앞의 흡혈귀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생각했던 기간은 일주일이었는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얼마나 걸립니까?"


"거, 거의 이주에서 삼주는 필요하다고 보셔야…."


"…무슨 실수를 했기에 방음 마법을 고장낸 겁니까."


"네, 네?! 어, 어떻게 그걸…."


"다시보기에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에 아까부터 새하얗게 변했던 얼굴이 이제는 아예 죽을 상으로 변하더니 내게 무릎을 꿇고, 사죄의 절을 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빠르게 고쳐볼테니, 다른 곳에서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안타깝지만, 이미 다른 분에게 부탁드렸습니다."


"…네?"


"이쪽을 주로 담당하시는 걸로 보이는 마법사께 보여드렸습니다."


"호, 혹시 그 분 이름이 아리센…?"


"맞습니다."


얼굴이 안 보이는 상태일텐데, 어째서 얼굴이 어떻게 변해있을 련지 상상이 되는 걸까.


이제는 급기야, 몸을 떨기 시작한 흡혈귀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당황하고 말았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 그게…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경고를 들었어요."


"…여태까지 했던 실수가 참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저도 원해서 그런 실수를 한 게 아니었는데…!"


팍 하고 고개를 들며 나를 쳐다보는 흡혈귀의 얼굴은 울상으로 변해있었는데, 자기도 어떤 실수를 했는 지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는 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툭 하고 건들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는 흡혈귀의 모습은 참으로 딱해보였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쩌겠는가. 자기 실수로 마지막 경고까지 들은 상태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안타깝습니다. 하고 흡혈귀에게 말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글너 내 말을 들은 흡혈귀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이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 나도 마법을 제대로 쓰고 싶어서 연습했던 것 뿐인데! 흡혈귀라고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니라구요!"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어떻게 합니… 마법?"


"네! 마법이요! 방음에 문제가 생긴 것도 제 방에서 마법을 연습하다가 그렇게 된 거라구요! 경고를 들은 것도 마법때문에 그런 거였구요!"


"제가 따로 찾아본 것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마법은 금지 아니었습니까?"


"그건 위험한 것들을 금지한 거였지, 손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간단한 마법들은 금지가 아니라고요!"


"…혹시, 어떤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실패하신 건지 물어봐도 괜찮습니까?"


"…소, 손에서 빛을 만들어내는 마법을 사용하려다가, 마력을 너무 많이 넣어버려서…."


우는 것을 멈추고, 자기 손바닥을 쫙 펼쳐서는 그 위로 마법을 만들어내려는 흡혈귀를 급하게 막았다.


"여기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저희 집에만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집에까지 영향을 끼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되면 사태가 더 심각해집니다."


"아, 그렇죠…."


마법을 사용하려는 흡혈귀의 뾰족한 귀가 아래로 내려가고, 들어올렸던 손이 힘 없이 아래로 내려가며 눈물을 멈추지 않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왜 마법을 연습하려고 하신 겁니까."


마법을 연습하려면 굳이 집 안에서 하는 게 아니라 근처에 보이는 연습실에라도 가서 하면 되는 게 아닌가.


내가 이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생각보다 마법을 가르치는 곳이 많이 보였었고, 그리고 그런 마법을 연습할 수 있는 공공장소도 많이 있었다.


당장, 다른 나무보다 훨씬 큰 나무가 있던 공원에서도 조금 더 걸어가면 마법을 따로 연습할 수 있는 넓은 터가 있었는데 굳이, 왜 집에서 하려는 건지.


그런 내 생각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흡혈귀가 처량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흡혈귀가 되어서 남들에게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조상님들은 잘 사용했다고, 그런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인데."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가 아니라 제게 있어서 흡혈귀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라구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흡혈귀라니, 부끄럽잖아요!"


우갸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거실을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하는 흡혈귀의 모습에 청하나 금향과는 다른 의미로 골치아픈 종족과 엮였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