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마지막까지 이곳을 지키는 사람이 될 테니까, 다시 만나면 적으로 만나겠지."


"수아야. 잠깐만……."


"됐어. 나중에 만나."


차갑게 말을 잘라내며 자리에서 일어 난 수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하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멀어져가는 수아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어떻게든 수아가 이 일에서 멀어졌으면 싶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은행동의 일은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자들과 그걸 빼앗으려는 자들의 싸움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냥 막무가내로 은행동 사업에서 빠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수아가 은행동 사업에 관여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 될까?


"그런다고 쟤가 물러날 리도 없고."


만약 조폭과 관련된 일이라면, 수아는 오히려 더 관여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실대로 말해서 내 옆에 두고 지켜줘야 할까?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수아의 성격이라면 분명 내 옆으로도 오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은행동을 지키기 위해, 나와 뒷배를 알 수 없는 연대에 맞서려고 하겠지.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머릿속이 한참 뒤죽박죽 되고 있을 때, 은행동 현장에 파견 나가있는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야?"


[대표님, 지금 '주거권해방연대'라는 곳에서 철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오지 않으면 절대 안 비켜주겠다고 하던데요.]


"하아, 그 젠장할 놈이."


평소였다면 그냥 밀어붙이라고 했겠지만, 상대는 조폭이었고, 그 뒤에 또 정체 모를 권력자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수아가 엮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러 행동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알았어. 지금 갈게."


생각을 채 정리하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은행동으로 향했다. 철거를 진행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컨테이너와 굴삭기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험악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 비키시라니까요!!"


"안 돼. 절대 못 비켜! 차라리 우릴 죽여!!"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릅니다!!"


철거하려고 모여 있던 인부들 앞을 빨간 머리띠를 한 주거권해방연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내가 그 현장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철거 작업을 지휘하기 위해 나와있던 직원이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그래. 저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데?"


"그게, 대표님이 아니면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해서요. 아침부터 지금까지 저러고 있습니다."


직원의 초췌한 표정을 보아하니 인부들과 연대 사람들이 싸우는 걸 막느라 잔뜩 고생한 것 같았다.


"알았어. 일단 사람들 데리고 점심이나 먹고 와."


지갑에서 개인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내주며 말했다. 어차피 같이 있어봤자 도움도 안 되고, 괜히 깊게 엮이게 되어 조폭들이 써먹을 만한 패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카드를 받아 든 직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네? 저희가 가면, 그럼 대표님은 어떻게 하시려고……."


"날 보고 싶다고 했다며? 얼굴이나 실컷 보여주고 와야지."


직원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등을 떠밀자 직원은 걱정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 몰라? 걱정하지 말고 후딱 갔다 와."


"네, 네. 알겠습니다."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직원은 황급히 연대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던 인부들을 데리고 빠졌다. 대치하고 있던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사라지자 연대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나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그렇게 찾으시던 대표가 바로 저입니다."


능청스럽게 말하며 다가가자 연대 사람들은 나를 향해 적의가 잔뜩 담긴 시선을 보내왔다. 웃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티나지 않게 연대 무리를 살펴보았다.


'보자. 조폭으로 보이는 사람은 서너명? 오늘은 그냥 훼방만 놓으려고 온 건가?'


그렇다면 그 서너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진짜 은행동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주거민일 것이다, 수아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이건 사업이야.'


그리고, 싫어해 마지 않는 조폭들을 싸그리 몰아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하고 싶으신 말들이 참 많을텐데, 제가 좀 바쁜 사람이라서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 대표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여기 대표 분은 어디계시죠?"


평소에 하던 것 처럼 사람들 속을 긁어가며 말하자 연대 사람들 사이에서 투박한 외모의 사람이 앞으로 나왔다.


"제가 그 대표입니다만?"


"오, 그 쪽인가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목소리랑 다르게 생각보다 남자답게 생기셨네."


손을 내밀었다.  성대원은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대표님은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랑 판박이시군요."


"하하,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서 절 찾은 이유가 뭔가요? 병아리들이 엄마닭 찾아서 시끄럽게 울고 다니는 것 같아 불편하네요."


자연스럽게 손을 놓으며 말하자 연대 사람들의 표정이 대번에 썩어들어가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성대원이라는 자식의 표정을 살펴보니, 화가 나는 걸 억지로 참고 있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하하. 어제 전화로는 제 의견이 잘 전달이 안되었나 보군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그 덕분에 결심할 수 있었거든요."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성대원의 앞까지 다가가 성대원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 새끼들을 싸그리 밀어내고 내 발밑에서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만들기로 말이야."


"큭, 이 개자식이……."


성대원은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법한 표정이었지만, 주변의 눈치를 보는 건지 양 주먹을 꽉 쥔 채 날 노려보기만 하였다.


'한 대 맞기만 해도 좀 더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텐데.'


아무리 머리가 비어 있는 깡패라고 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나보다. 나와 성대원의 기싸움에 뒤에 서 있던 연대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있던 그 때, 내 귀로 또각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성대원 대표님! 여기 계셨군요."


"오! 장수아 변호사님. 일찍 오셨군요."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와 순식간에 바뀐 성대원의 표정에 황급히 뒤로 고개를 돌렸다.


"수아?!"


수아는 차가운 눈초리로 날 쳐다보며 나와 성대원 사이에 멈춰섰다.


"뭐야. 네가 왜 여길 오는 건데?"


"말했잖아. 다음에 다시 만나면 적일 거라고. [주거권해방연대]에서 은행동 사업을 막는데 변호사를 고용한다고 하길래, 내가 해주겠다고 했어."


성대원은 곧바로 수아의 옆으로 와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아~ 정말이지. 장수아 변호사님이 도와주시겠다고 안하셨다면 정말 큰일날 뻔 했습니다. 저희는 이런 법 관련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거든요. 정말로, 저희의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정말, 저번에도 그렇고 너무 절 과대평가하신다니까요? 저도 여기서 살아서, 제 집을 지키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능청스럽게 너스래를 떠는 성대원과 그런 그에게 웃으며 대답하는 수아를 보며 일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어떻게든 수아가 이 일과 관련이 없길 바랬는데, 이미 그녀는 확실하게, 그것도 그녀가 싫어하는 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엮여버리고 말았다.


"젠장……."


갑작스러운 수아의 등장에 당황한 나머지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와 수아를 보는 성대원의 눈에 소름끼치는 이채가 발했던 것을.





그날 저녁, 성대원은 부하가 운전하는 차 뒷자석에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젠장할 녀석. 한 마디를 안 지네."


수아 변호사가 도착한 뒤, 수아와 애송이와 함께 따로 자리를 옮겨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성대원은 담배필터를 질겅질겅 씹었다. 속을 살살 긁던 애송이 녀석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었다.


'그럼 뭐, 시에서 준 것보다 더 많이 주시던가요. 그렇게 한다면 한 번 생각해보죠. 어차피, 당신들 수준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 건방진 애새끼, 반드시 내 손으로 족쳐버릴 거다."


너덜너덜해진 담배 필터를 창 밖으로 던져버린 성대원은 차 시트에 몸을 기대고 억지로 화를 식혔다. 그러는 동안 성대원이 탄 차는 전통 가옥으로 된 고급 가라오케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춰섰다.


"도착했습니다, 두목."


"오냐. 금방 나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라."


입구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한 성대원은 성큼성큼 가라오케 안으로 들어갔다. 목적지인 미닫이 문 앞에 도착한 성대원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정장의 남성에게 턱짓을 했다.


"선생님께 성대원이 왔다고 전해드려라."


고개를 끄덕인 정장의 남성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커다란 상을 앞에 두고 열 명 남짓한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언론사 사장, 경찰청장, 국회의원 등등 정치계에서 내노라하는 인사들을 지나쳐 정장의 남성은 상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중년 남성에게 다가갔다.


"김민철 의원님. 밖에서 성대원이라는 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대원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보구만."


야당 대표인 김민철 국회의원은 술자리에 있는 정치계 인사들에게 일일히 기다려달라고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김민철이 입에 담배를 물며 나오자 성대원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하였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십니까, 선생님?"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인 김민철은 성대원의 팔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래그래. 네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덕에,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 보내고 있다. 후우~ 그래서, 그 건은 어떻게 됐나?"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회사 대표가 워낙 미친놈 소리를 듣는 녀석인지라, 뒷배가 있다고 언질을 줬는데도 오히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으니까요."


성대원의 말을 듣던 김민철은 담배꽁초를 복도 밖 정원에 던지며 말했다.


"대원아. 왜 내가 겨우 그 허름한 동네를 지키라고 하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란 말이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면 어제까지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이웃 마저도 무참히 죽일 수 있는 비열한 생명체란다."


김민철은 복도 바로 옆 마당에 있는 연못을 내려다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하나로 통합하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지. 안 그러냐?"


"맞습니다, 선생님."


"정말 무척 힘든 일이란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공공의 적을 만들어준다면, 그럼 어떻게 될까?"


연못 안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헤엄치는 금붕어들을 보던 김민철을 시선을 돌려 성대원을 보고 말했다.


"조금만 더 있으면 계획을 실행할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 철거 사업을 막도록 해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해결하도록 하게나. 뒤는 걱정하지 말게."


김민철의 말에 성대원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침 좋은 방법을 찾아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