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승주는 여타 전남 지역과 다를 바 없이 조용한 농촌이었다. 정임이 사는 상사면 역시 순천 읍내랑 가까울 뿐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마을이었다.  다만 이따금씩 산새들이 지저귀고,  큰 냇물은 도란도란 흘러가며 이 마을을 휘감고 있었다.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 정임은 문방구를 하고 있었다.
"하따, 허벌나게 심심하구마잉~"
문방구 계산대에 앉아 있던 정임이 말했다. 손님은 오지도 않는데 앉아있어야 하니까 그럴 법도 하다. 한참 그렇게 심심하다고 노래를 부르던  정임을 제지한 건 남자친구 윤석의 목소리였다.
"너 지금 뭐하냐?"
"워메 니 언제 와븐것이여? 학교는 끝난겨?"
"끝났지. 니 보고 싶어서 빨리 뛰어댕겨왔다."
"아고, 말은 참."
"우리 주말에 단풍보러 갈래? 단풍 예쁘더라."
"단풍 좋지야. 주말에 역전에서 보자잉."
"그래, 난 다시 학교 가봐야 되니까 잘 있어."
"뭐땀시 학교 다시 가야 혀?"
"나 학생회 일 때문에."
"그래, 알겄어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지만 학생회 일이 바쁘다는데 어쩌겠는가. 정임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를 보내주었다. 
'하고, 주말까지 워찌게 기다린당가.내일이 화요일인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임은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갔다.
화요일이었다. 그날도 평온한 날이었다. 오늘도 정임은 문방구 문을 열면서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도봉에 올라가서~ 단풍도 보고 떡도 먹고 임도 보고~''
즐거운 분위기를 깬 건 낙안댁 아줌마였다.
"워메 거시기 있냐잉?"
"시방 뭣헌다고 나를 찾소?"
"워메 정임아, 여수서 지금 군인들이 난리를 피웠는디 이 미친것들이 곧 순천이랜다. 지금 해룡은 난리도 아니라허데. 설마 요런 촌구석까지 올랑가는 모르겄지만 몸 조심혀야잉."
"곧 순천이라고요?"
"그렇다고 허대."
정임은 당장 보따리를 싸들고 윤석의 학교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사범학교에 다니고 있는 윤석이 위험할 것 같기에 그를 시골구석의 자기 집에 숨길 작정이었다. 발걸음을 바삐해 경전선 철길을 넘고, 흙길을 지나 남제리 쯤 왔을 때, 정임은 무언가를 보았다. 역한 냄새가 났다.
"워멤메 저게 뭐시당가...?"
보았더니 사람의 시체였다.
"이...이게 시방 무슨 난리여... 뭔 사람들이 저라고 자빠져 있디야...."
그리고 뒤를 돌아본 순간, 군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오고 있었다.
"우익 새끼들 한 놈도 빠짐없이 찾아. 삳삳이 시내 뒤지도록."
''이게 무슨 난리지? 우익은 또 뭐지? 난 그런 걸 몰라...''
정임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윤석이 기독학생회에 있었는데 왠지 그것이랑 관련이 있어보였다. 순전히 눈치였다.
"빨리 뛰어야 혀, 뛰어야 혀."
계속 뛰고 뛰었다. 빨리 이 안 좋은 기운이 번지기 전에 그를 데리고 나와야 했다. 중앙동 읍내까지 오자, 가게들은 불타고 있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거이 생각보다 더 심각헌 거 같은디...?"
예감이 틀리길 바랬다. 왜 불행한 예감은 항상 맞는 건지 너무 한탄스러웠다. 
"아한테 설마 뭔 일 있는건 아니겄제? 설마 군인들이 학교까지 쳐들어 갈라고.."
너무 힘들어서 잠시 숨을 돌리기로 했다. 한 10분쯤 지난 후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교정에 들어간 순간 정임은 다리힘이 탁 풀려버렸다.
학교는 불타고 있고 군인들은 총을 쏘고 있었다.  탕,탕,탕. 빨리 그를 찾아야 했다.
"윤석아, 시방 어딨드냐? 워디여?"
애타게 그를 찾았다. 삼세번을 부르고 나서야 윤석이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임아, 피해! 어서! 어서 빨....."
말을 마치지 못하고 윤석이 뒤에서 총을 맞았다. 빨간 액체가 정임의 피부를 물들였다.
순간 정임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
"우익 새끼 한 놈 죽였습니다. "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임은 화가 치밀었다. 화가 치밀다 못해 회한의 감정까지 들었다. 정임은 그 남자에게 다가가서 뺨을 때렸다.
"시방 니가 뭐던다고 사람을 골로보내브요? 뭣땀시?"
"이 년이 지금 미쳤나. 이 새끼는 우익이야. 개새끼라고."
"우익이 뭐길래 시방 그라는디요. 이 착한 애한테 뭐던다고 총을 쳐쏴블고 지랄이여 지랄이!"
"한 번만 그 주둥아리 지껄이면 너도 똑같이 될 줄 알아."
"해보랑께? 시방 니놈이 먼저 죄없는 사람 죽여놓고 이게 뭐하..."
탕, 소리가 무심하게 하늘을 갈랐다.
"야, 이년도 거적때끼에 담아서 저기 갖다 버려."
19살 정임은 그렇게 무심하게 피어나지도 못하고 가버렸다. 흙길은 붉게 물들었고 붉은 빛 태양만이 그 자리를 쓸쓸하게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