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방학을 맞아 잠시 휴식을 취하러 고향 여수에 내려왔다.

오랜만에 온 여수는 정겨웠다. 물빛 순정은 항구의 정이라는 노래 가사가 어울리는 그 풍경, 서울에서는 차마 느낄 수가 없었다.

옛 추억에 잠겨 해변가 모래 위를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야, 니 우진이 맞제?"

누구지, 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나 니 고등학교 동창 성현이다. 워메 참말로 오랜만이구마잉~"

이름을 듣자마자 기억이 났다. 지옥같았던 고향에서 유일하게 만나고 싶었던 그 이름, 나를 지옥에서 구해준 그 이름.

"아...안녕, 참 오랜만이다."

"워메 서울 사람 다돼부렀구마잉. 오랜만에 왔응께 여그서 한밤 자고가."

"아...괜찮은데."

"나가 허벌나게 반갑기도 허고, 밥도 사주고 싶응께 그러는 것이여. 사양하덜 말어."

"알았어. 고마워."

"여그 타라잉."

"트럭이네?"

"엉, 나 중앙시장에 생선 날른다잉."

중앙시장,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어릴 적 추억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근처 진남관이랑 이순신공원에서 뛰어놀았었지.

생각에 잠겼던 차에 옆에서 성현이가 말을 걸었다.

"뭔 생각을 그리 허냐?"

"그냥, 어릴 때 추억을 떠올렸어. 너 만나서 반갑기도 하고. 사실 여기 와서 널 만날 줄은 몰랐어."

"그렇냐?"

"너 아니었으면 나 지금쯤 여기 없었을거야."

"그게 시방 뭔 소리당가?"

"애들이 나 때리고 괴롭힐 때, 너만 유일하게 내 편들어주고, 나 지켜줬잖아. 진짜 너 아니었으면 나 진짜 어떻게 됐을지 몰라."

"워메, 친구로써 당연히 지켜줘야 하는 거 아니당가? 갸들이 나쁜거제. 그나저나 소식이 없었는디 시방 니 뭣허냐?"

"나 연세대학교 의대 다니고 있어. 곧있으면 국가고시 봐. 진짜, 네가 내 암흑같던 인생에 날개를 달아줬어"

"그렇게 말항께 쪼까 쑥스럽구마잉. 그나저나 다 왔네."

그 말을 듣고 나서 본 곳은 작은 식당이었다. 식당 벽의 곰팡이 냄새가 조금 불편했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뭐 먹을겨?"

"나 오랜만에 서대구이 먹을게."

"마침 서대구이 추천할라 그랬는디, 통했는갑다."

"그러게."

그렇게 오랜만에 웃어보았다. 상경하고 나서도 여러 가지 일에 치여서 많이 힘들었다. 과에서도 왕따였고,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나를 그렇게 독점하고 싶어하더니 정작 바람나서 헤어졌고, 참 난리가 아니었다.  그런 나에게 웃음이라는 건, 행복이라는 건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보다. 회포를 푼 후, 우리는 성현이네 집에 가서 자기로 했다.

"어머님은 안녕하시지?"

"잘 지내신다잉. 오랜만에 봉께 참말로 반가워 하실거여."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성현이 어머님은 나를 반겨주셨다.

"워메, 참말로 오랜만이구마잉. 먼길 오느라 고생 많이 혔다. 언제 올라갈겨?"

"내일 기차 타고 가려구요. 잠깐 시간 내서 내려온 거라 더 오래 있고 싶긴 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하이고, 아쉽네잉. 일단은 왔응께 좀 쉬다가 가잉."

오랜만에 셋이서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꽃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말갛게 고운 얼굴을 내민 다음 날, 성현이와 어머님은 나를 역까지 배웅해주셨다.

"시험 꼭 합격허고, 나중에 꼭 한번 내려와잉."

"네, 알겠어요. 꼭 합격할게요."

1달 뒤 나는 당당히 시험에 합격하였고, 외과 의사가 되었다.

성현에게 전화로 알려주었다. 자기가 합격한듯이 상당히 기뻐했다.

"워메,축하혀. 의사슨생님 돼부렀네."

"고마워. 명절날에 내려갈게."

그렇게 우리는 명절날에 가끔씩 보는 사이가 되었고 더욱 돈독해져 갔다. 가끔 성현은 나에게 여수산 갓을 보내기도 했다.

명절을 쇤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평소처럼 지내는데, 성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우진아, 우리 엄니가 이상혀. 먼가 가슴쪽이 쪼까 거시기허시다 하고, 심장쪽이 빨리 뛰는 것 같다고 허시고.  여수서 제일 큰 병원에서는 암시랑토 안허다고 했는디, 쪼까 거시기혀부러. 곧 진료하러 서울 갈 건디, 니 병원이 워디당가?

"연대세브란스병원. 신촌이야."

"알겄어, 지금 차타고 남원까지 왔응께 속도 좀 내볼게."

장장 5시간을 달려 온 성현은 땀범벅, 눈물범벅이었다.

"우리 엄니 우짜믄 좋냐잉.. 평생 고생함시로 살았는디 워째 하늘은 이런 일만 주시냐고... 경진아, 부탁이여. 제발 우리 엄니 좀 살려줘야잉."

"내가 최선을 다해볼게. 일단 숨 좀 고르고 있어."

"알겄어야잉, 

마침 다행히 내 타임이 비어있어서 다행이었다.

"음...맥박이 일정하지가 않네요. 아마 부정맥 같아요."

"그거이 뭐당가?"

"일단 자세히 검사를 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검사 결과 심방세동이었다. 다행히 바이탈은 안정적이셔서 베타 차단제를 썼다.

"잘 마무리 됐어."

"워메, 고맙다잉. 참말로 고마워."

"뭘 그래, 예전에 너도 나 참 많이 도와줬잖아. 그리고 진료비는 내지마. 내 사비로 충당할게."

"아따 아니여, 뭘 그렇게까지 혀."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아니.. 그래도..."

"그냥 받아라. 어릴 적에 날 나락에서 구해줬는데 이 정도도 못해줄까."

"아무 문제 없겄는가?"

"괜찮아. 진짜로. 사양말고 받아."

"고마워, 참말로 고마워..."

연신 성현은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모습이 학창시절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야, 우리 어머님 모시고 콩나물국밥집 가자. 맛있는 데 알아."

"국밥? 국밥 좋제."

"얼른 가자. 빨리."

"알겄어. 빨리 가자."

우리 둘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신촌 앞 국밥집으로 갔다. 국밥에서 서시장 아지매의 투박하면서도 정겨운 말이 떠올랐다.

"서시장 아주머니는 잘 계셔?"

"어, 아직까지 잘 계신다. 왜 묻냐 근디?"

"국방 보니까 생각나네. 갑자기. "

"하이고, 야도 참. 식겄다. 빨리 먹자."

"알았어."

성현의 그 말 속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 어릴 적 날 도와줘서 그랬던 걸까, 지옥같았지만 정겨운 고향을 생각나게 해줘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단지 국밥이 뜨거워서 따뜻함을 느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