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일본식 저택의 안, 아침이 약한 리노가 어째선지 오늘은 7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 거실에서 TV를 보고있었다.
 신토의 번화가를 비추는 뉴스엔 눈이 많이 내린 탓인지 비춰지는 사람이 적었다.
 자막엔 요즘 들어 빈혈이 자주 일어나거나 쓰러지는 사람이 늘었다고 써있었다.
 그러나 리노의 눈에 들어온건 뒤에 늘어선 상점들이었다.

 "아처, 나가자. 기껏 일본에 왔는데 안 놀다가면 안 되겠지"

 아무래도 뉴스에 비치는 상점가들을 보고 어딘가 가고 싶은데라도 있었던걸까, 목까지 올라오는 남색 니트에 청바지를 입고 있던 그녀는 그 위에 허벅지까지 오는 빨간색 코트를 입고 하얀 머플러를 두르더니 저택을 나섰다.
 어제밤부터 쏟아져 내리던 눈은 새벽이 되서야 그 기세가 잠잠해지더니 아침이 되자 말끔히 그쳐있었다.
 저택의 밖으로 나서자 시야에 들어오는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세상과 그에 반사되는 따스한 햇볕이었다.
 아침의 외출은 의외로 나쁘지 않네, 라고 생각하며 누군가가 새벽부터 눈을 치워 깨끗해진 길을 조심스레 걸어간다.
 토요일의 아침이라서일까, 아니면 길에 쌓인 눈 때문일까, 통행인이 없는 길을 걸어나가는 도중 어디선가 본 듯한 뒷모습이 앞을 걷고 있었다.
 키 180cm의 말랐다고 보기엔 건장한 소년, 짧은 주황색 머리에 보라색 점퍼를 입고 청바지를 입은 그를, 어디서 봤을까, 하고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자 이쪽의 시선이라도 느낀 것일까, 뒤를 돌아보는 소년은 아, 하고 감탄사와 같은 것을 입에 담는다.
 역시 어디선가 만났던가?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어볼 뿐,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저희 집에 오셨던 분이시죠?"

 소년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집? 여기에 도착해서 들렸던 사람이 있는 집이라곤-

 "아! 생각났다! 너, 후지무라가의 일원이지, 분명"

 할아버지가 살았었다는 집을 성배전쟁 기간 동안 빌리기 위해 갔었던 후지무라구미, 거기서 할아버지의 지인이라는 할머니분과 대화 도중 얼핏 그를 보았던게 떠올랐다.

 "네, 후지무라 라이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은 편안하신가요?"

 자신들 소유의 집을 빌려주었기 때문인지 친절히 물어봐주는 소년.

 "난 리노, 리노 에델펠트. 그보다 집이네. 뭐,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없어서 사실 좀 실망했지만 사는건 나쁘지 않아"

 전 회의 성배전쟁 때 할아버지들이 거주했던 집이라고 들어 뭐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정리하는건 당연하겠지.
 처음 그 집에 들어섰을 땐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라 거실의 TV도 이쪽에서 구매한 것이다.

 그 후로 이것저것 별 내용도 없는 잡담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도착지는 같았던 모양인지 내가 버스정류장에 서자 그도 멈춰선다.

 "어딘가 가는거야?"

 "네, 신토에요.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서"

 "그래? 나도 신토에 가는데, 어디서 일해?"

 단순히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물음에 라이가가 대답한다.

 "중식집이요, 홍주연세관 태산[紅洲宴歳館 泰山]이라는"

 중식집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나의 귀는 집중해, 대뇌는 그것을 외워버린다.
 시계탑에 들어간 이후로는 자주 만날 일이 없던 할머니가 어렸을 때 해주었던 음식은 중식으로 그 맛은 그야말로 최상.
 손에는 그가 알려준 위치를 휴대전화의 지도로 찾으며, 머리속에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혼자서 신토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아무래도 라이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


 휴일의 아침부터 친구, 후지무라 라이가에게로부터 전화가 왔다.
 라이가는 일일 알바를 하는데 같이 하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그에 별로 할 일도 없던 마토우 신이치는 언뜻 그에 응했다.
 옷장에 있던 흰 티에 청바지를 주워입고 초록색의 종아리까지 오는 긴 자켓을 걸치고 밖에 나가려는 도중, 방에서 나오는 마토우 소우와 마주쳤다.

 "아침부터 건강하네, 신이치. 약속이라도 있어?"

 아무래도 윗층에서 준비하느라 움직이는 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응, 후지무라가 일일 알바 같이 하지 않겠냐고 해서"

 "그래. 뭐하는 일인데?"

 신이치의 아버지인 신고는 아침 일찍 출근하기에 언제나 신이치의 안전을 확인하는건 소우의 일이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변함없이 자신의 일정을 묻는 소우에게 신이치는 웃으며 말했다.

 "왜, 이번에 신토에 지점을 냈다는 유명한 음식점 있잖아?"

 신발을 신으면서 말하는 신이치는 신발을 다 신고 일어나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중식전문 홍주연세관 태산이라고-"


 ◇


 어째선지 아침부터 눈이 뜬 엔은 침대 위에서 상체만을 일어난 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것일까, 두리번거리던 엔은 머리를 긁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으으- 추워"

 겨울기간 혼자 사는 집의 거실이 추운 것은 당연한 일, 사람도 없는 거실까지 열을 넣기엔 돈이 아깝다.
 그래도 요 며칠간은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오면 꽤나 따뜻했었다.
 서번트라도 실체화하면 추위를 느끼는 것인지 랜서는 늘 거실에 있어 열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아, 랜서가 없었을 때만 해도 잘 몰랐었는데 확실히 춥구나, 여기"

 엔은 거실의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엔이니까 그저 춥기에 가만히 있는거라고 생각되지만.
 잠시동안 그러고 있던 엔은 세면소에 가서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휴대전화를 손에 들었다.
 팔에는 지금에 와서는 빛을 잃은, 랜서의 마스터였다는 령주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내 성배전쟁은 끝났겠다, 오랜만에 놀러나 갈까"

 휴대전화의 화면에는 마토우선배라고 적혀있었다.


 ◇


 류도우사의 경내 눈을 치우는 남자가 있었다.
 남자의 키는 185cm이며 유도를 한 탓인지 꽤나 덩치가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무지 짧았다.
 그의 이름은 류도우 쿄우게츠로 류도우사 주지스님인 류도우 잇세[柳洞一成]의 손자이다.
 류도우 쿄우게츠[柳洞鏡月]는 어제밤부터 내린 눈을 치우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아침 6시부터 쓸기 시작한 눈에 덮인 류도우사 경내는 8시인 지금이 되서야 제 모습을 되찾았다.

 "아아- 진짜, 주말에 이게 뭐냐"

 주지의 아들인 그는 자신의 형과는 달리 꽤나 문제아였다.
 아니 문제아라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했을 뿐이지만.
 학원이나 어른들이 보기엔 그저 문제아겠지.
 이런 성격의 쿄우게츠는 뭐든 행동으로 옮기는 엔과 죽이 맞아 자주 놀러 다녔다.
 어째선지 엔이 꽤나 따르는 듯한 1년 선배인 마토우 소우와 함께.
 왜 하필 오늘 과거가 떠오른지는 모르겠지만 쿄우게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었다.

 "어디간거냐? 엔. 혼자만 재밌는 인생 보내고 있지 말고 데려가달라고-"

 그에--

 "응? 뭐야, 내가 올지 어떻게 알았냐? 그 사이에 부처라도 씌인거냐?"

 계단쪽에서 올라오며 말을 건 것은 엔이었다.
 그 옆에는 그 때 그 시절과 같이 마토우 소우도 함께였다.
 얽매이는 것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걷는 엔.
 여전히 귀찮은 듯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오는 소우.
 쿄우게츠는 순간 그 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신토에 놀러가자는 엔의 말에 쿄우게츠는 옷을 갈아입고 바로 나가려 했지만, 역시나 소우, 전 학생회장인 그의 덕분에 절에 쌓인 눈을 전부 다 치우고 류도우사를 벗어났다.
 신토에 버스를 타 맨 뒷자리를 차지한 그들은 왼쪽부터 쿄우게츠, 엔, 소우의 순으로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도중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쿄우게츠가 물었다.

 "엔, 네 녀석. 갑자기 사라져서는 어디 갔다온거냐? 전화도 자주 안하고 말이야"

 쿄우게츠의 말에 엔은 이상하다는 듯,

 "어라? 내가 말 안 했나? 런던 갔다가 온다고 안 했던가?"

 이에 쿄우게츠가 그런 말은 못 들었다고 하자 입을 여는 소우.

 "아니, 했었다. 그렇군, 졸업식날 게임장에서였지, 아마. 뭐, 야구배트 휘두르는 사람한테 들릴 리가 없었겠지만"

 소우의 말에 엔이 거봐- 라는 식으로 말하자 이에 분노한 쿄우게츠.

 "바보냐?! 날아오는 공에 집중하는 상태로 들릴 리가 없잖아?!"

 그에 소우가 비꼬는 듯--

 "집중한 것 치고는 점수가 영 아니었지"

 그 말에 쿄우게츠는, 갸오-, 하고 폭팔했다.

 "좋아, 이 자식. 선배고 나발이고 덤벼"

 이를 보고 중간에서 웃어대는 엔.

 "아하하하하!"

 분노한 쿄우게츠에게 담담히 말하는 소우.

 "좋다. 오랜만에 나쁘지 않지, 배팅"

 화내는 쿄우게츠, 웃어대는 엔, 무덤덤한 소우.
 그들은 마치 8년전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각자의 마음 속에서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


 "아차, 너무 빨리 왔나?"

 대교를 지나자마자 내린 버스정류장의 근처에 있는 중화풍의 음식점의 문에는 CLOSE라는 문패가 걸려있었다.
 그도 당연할 게 이 식당에서 오늘 하루동안 알바를 한다던 라이가보다 빠른 버스를 타고 온 것이다.
 리노는 개점을 기다릴까 고민하다가 결국 주변을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8시를 조금 넘은 시각, 이제 막 개점하는 가게들이 많은 번화가에는 통행인이 어느 정도 있었다.
 아침부터 장사가 되는걸까, 하며 아침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라멘집으로 들어갔다.
 의외로 많은 손님들을 둘러보던 도중, 온풍기의 바로 앞에 아는 얼굴이 한명, 혼자서 라면을 먹고 있었다.
 도중에 눈치채지 않게 조심히 다가가,

 "안녕, 그거 맛있어?"

 인사를 하며 맞은편에 앉자, 고개를 들어올린 그는 좋지 못한 것이라도 봤다는 양, 아침부터 신랄하게 말해오는 것이었다.

 "아아, 방금까지 맛있었는데. Fuck, 네녀석의 면상을 봤더니 맛이 떨어졌다. 어떻게 책임질거냐, Fucking 금발"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에게 그가 먹는 것을 가리키며 같은 걸로, 하며 주문을 마치고 코트를 벗어 옆자리의 의자에 걸친 뒤 그를 바라보았더니, 그가 입은 옷은 U넥의 남색 니트.
 그걸 보고 자신의 옷을 바라보고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는다.

 "어라, 우리들 커플룩이네?"

 그 말에 그는 먹으려고 젓가락으로 들어올린 라면발을 그릇의 국물에 다시 빠뜨리고는 이쪽을 쳐다본다.
 그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Fuck, 돌아가면 제일 먼저 소각하지 않으면 안되겠군, 이거"

 욕은 내뱉으며 진지하게 말하는 그.
 어라, 그러고보면 아직 나는 그의 이름도 모르고 있구나, 깨닫고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너무하네, 그보다 있잖아. 나, 아직 그쪽 이름 모르는데"

 "그래서, 뭐야? 그쪽의 이름 알고 있으면 이쪽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는거냐?"

 "헤에-, 내 이름, 기억하는구나"

 순간 그는 잘못 말했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칫, 아사가미 로우다. 좋을대로 불러라"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역시 이 사람 놀리는 재미가 있을 듯 하다.
 로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라면을 먹는데에 집중하고 있다.
 때 마침 여기도 그릇이 옮겨져 왔기에 잘 먹겠습니다, 하고 작업에 들어가려고-

 "어라? 뭐야, 이거?"

 거기에는 간장을 기본으로 한 소스를 사용한 라멘인지 살짝 갈색빛이 나는 국물의 라면 위에 중국식 햄, 계란 지단, 오이, 수박, 새우, 오징어 등의 고명을 얹어져 있었다.
 여기까진 간장라면을 먹어봤기에 별로 특이할 건 없었지만 이상한 점이 딱 하나.

 "어째서 냉라면? 지금 한 겨울이야?!"

 그래, 얼음.
 라멘의 육수엔 살얼음이 둥둥 떠다녔다.
 말할 필요도 없이 냉라면.
 로우가 먹는 것에서 어쩐지 김이 안 난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것이었나-
 정작 로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 안에 있던 그 차가운 것을 삼키고 말했다.

 "시끄러워, 너. 그것보다 라면이다. 차가운게 당연하잖아. 뜨거운 라멘 같은걸 라멘 취급할 수 있겠냐"

 아니, 보통 뜨겁잖아, 라고 생각하는걸 입 밖으로 내려고 했으나 로우의 말은 거기서 끊키지 않고,

 "그딴 라면, 몸이 차가운 북극의 에스키모놈들이나 먹는거다. 애초에 일본인이 뜨거운 걸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바보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아니, 편견이라고 할까, 너뿐이거든, 그런거"

 의도치 않게 츳코미를 넣으며 주문했으니 어쩔 수 없지, 하며 한 입.

 "------"

 순간 빙산의 위에서 꽃밭을 보았다.
 오오, 지금 이 순간에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 싶을 정도로 그것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겨울, 바깥의 추위를 녹이려 들어오는 자들을 위한 온풍기의 바로 앞자리는 오히려 너무 더울 정도, 그러나 그렇기에 비로소 이 자리에서의 냉라면은 그야말로 맛의 정점을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눈치챘는지 맞은 편의 라면선배가 말씀하신다.

 "오, 느꼈냐? 너, 뭘 좀 아는구나. 너랑은 대화가 통할지도 모르겠군"

 어째선지 의기양양한 모습에 웃으며 아아, 그러십니까? 라고 말하고, 의외라고 할까, 엄청나게 맛있는 냉라면을 먹으며 킥킥대는 것이었다.
 어느새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맛 좋았던 라면을 완식하고 어째선지 서비스라며 나온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난 뒤 가게를 뒤로 했다.
 아무래도 아까까진 아침이라 통행인이 적었던 모양인지, 지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로우는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는지 자, 그럼, 이라는 말을 남기고 걸어나갔지만 어째선지 이대로 헤어지기도 그렇고 옆에 서서 따라 걸었더니, 로우는 걸음을 멈춰섰다.
 그에 맞춰 걸음을 멈추자, 로우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 뭐냐? 할 말이라도 있냐?"

 원래라면 욕이 나올법한 상황에서도 배가 불러 안정된 탓인지 아니면 냉라면 취미를 공유하는 사이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과는 꽤나 다른 반응을 보이길래, 무심코,

 "아니, 오늘 하루 따라 다녀볼까- 해서"

 그야말로 로우가 짜증낼 듯한 말을 내뱉었다.
 그에 당연하다고 해야될지 로우가 말한다.

 "Fuck, 할 일도 없냐, 그렇지 않으면 뭐야, 나를 좋아하기라도 하는거냐? 그럼 유감이네, 난 너한테 흥미가 없어서 말이지"

 나불나불 말을 늘어놓는 로우.
 아까부터 느낀거지만 로우는 의외로 생긴거와 달리 말하는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거에 대해선 말이 두배로 늘어나는지 냉라면 강의는 꽤나 듣기 힘들었을 정도.
 어찌됐든 로우가 늘어놓은 말에 간단히,

 "응, 나 좋아해. 너 같은 사람"

 이라고 말하자,

 "아, 그래"

 아무런 감정도, 표정변화도 없이 대답한 로우는 멈추었던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로우를 따라 걸으며 쓸데없는 말,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들을 서로간에 주고받았다.


 ◇


 그 시각 타구장에 남자가 셋.
 긴팔의 초록색과 흰색의 스트라이프 티에 남색 계열 청바지를 입고 있는 키가 제일 큰 남자가 타구장에 들어가 날아오는 공을 열심히 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남자 중 한명은 검은 긴팔셔츠에 검은 면바지에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조금 짧은 편인 머리카락 마저 검은색인 미남은 영화에 한 장면에 나올 듯한 올 블랙이었다.
 그 옆에서 깔깔 대는 마지막 남자는 옆의 그와는 다르게 올 레드였다.
 빨간 나그랑티에 빨간 면바지, 게다가 그 위에 입은 조끼마저도 빨간색이었다.
 다행이랄까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소우는 시선은 타자에게 고정한 채, 옆에서 웃어대는 엔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했다.

 "성배전쟁은 포기했나? 엔"

 포기하기를 바라는건지 계속하기를 바라는건지 모를 무감정한 목소리.
 이에 엔 역시 시선은 타자로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으음, 뭐, 그렇지. 아니, 어쩔 수 없잖아? 랜서는 소멸했고 말야, 나 혼자 발버둥 쳐도 말이지-"

 그 말에 돌아온 것은 어제의 누군가와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가"

 짧은 한마디에는 어떠한 감정이 담겨져있는 것일까, 엔은 함께한 지 어언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의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뭐, 단순히 엔이 바보인 탓도 있지만.

 "음- 어제 리노씨도 그러던데, 어째서 묻는거야?"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그 단순한 해답을 실천하는 엔.
 이에 답을 알고 있을 소우는,

 "그런가, 그 여자도 너를 잘 알고있군"

 답을 피해 엉뚱한 소리를 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걸까, 뭐, 그렇다면 굳이 들을 필요는 없지, 라고 생각한 엔이 화제를 돌리려고 할 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


 ◇


 "어라? 엔! 이런데서 뭐하고 있어?"

 로우와 함께 걸으면서 주변에 뭔가 할거 있나, 하고 둘러보는 도중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빨강이 보여 인사를 건넨다.
 엔의 옆에는 타구장을 지켜보고 있는 검정이 하나.
 자신을 부른게 아니라서 이쪽을 쳐다보지 않는거겠지만.
 그런데 갑자기 옆에 있던 로우가 그에게 다가가더니 어깨를 두드리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어느새 다가와서 말을 건네는 빨강 따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타구장의 앞에서 로우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미남자 한명.
 의외로 시끄러운 로우의 이야기를 받아주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입을 움직이거나 하는데-
 미남이다.
 초미남.
 마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얼굴과 옷으로 어찌하여 이런 곳에 있는걸까.
 진짜 뭐야, 저거, 뭔데 저렇게 잘생긴거야.
 나는 나불거리는 엔의 말 따위 무시한채,

 "저기, 저 사람 누구야?"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가리키면서 그야말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응? 아- 마토우선배?"

 마토우-
 마토우? 에, 설마 그? 성배전쟁의 시초 중 하나인 마토우란 것인가?
 설마-, 하고 묻는 나의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응, 맞아. 마토우 소우, 세이버의 마스터잖아. 에? 설마, 몰랐어?"

 최악이다.
 응, 진짜 최악-.
 그 기묘한 만남이랄까, 를 거치고 나서 추가된 타구장에서 나온 한명까지 더해 다섯명이 되어 소모임 같은 느낌으로 우리는 근처에 있던 어쩐지 돌로 된 요새 같은 이미지에, 간판이 독일어로 쓰여있는 카페 아넨엘베[Ahnen erbe]에 들어갔다.
 가게의 분위기는 기본적으로 앤티크하다. 
 조금 어둡고 안정되어 있으며 전등은 달려 있지 않고 햇살만으로 조명을 구성해서 예배당 비슷한 느낌이 난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자, 오늘의 메뉴라는 것도 있었다.

 "음, 이런 카페는 안 와봐서 그런데, 뭘 시키면 되냐? 엔"

 엔의 친구라던 쿄우게츠가 엔에게 묻자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그렇네, 역시 여기는 짬뽕일까"

 엔이 말도 안되는 말을 하자 내 맞은 편에 앉은 초 미남자 소우씨가 그 감미로운 낮은 중저음으로 말한다.

 "거짓말은 그만둬라, 엔. 정작 본인은 다른걸 주문할 게 아닌가"

 "아, 역시 알아챘어? 역시 마토우선배"

 소우씨의 말에 엔이 거짓말임을 밝히자 쿄우게츠라는 남자가 화를 냈다.

 "또 거짓말이냐?! 하마터면 진짜 주문할 뻔 했잖아"

 그 말에 소우씨는 담담히,

 "아니, 걱정할거 없다, 쿄우게츠. 그런것을 이런데서 팔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당연한 것 같은 말을 했으나, 어째선지 먼저 말을 꺼내는 로우.

 "그 선입관 아무래도 틀린 모양이다, 소우. 메뉴판을 봐라. 짬뽕 있어. 호오, 게다가 냉짬뽕이란 것도 있군. 나는 이걸로 하겠어"

 "에? 진짜로? 대단하잖아, 여기. 카페인데 짬뽕 파는거냐?!"

 로우의 말에 엔이 신기한듯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웃어댄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 끝이 없을거 같은데, 라고 생각해 먼저 주문할까- 하고 있을 때,

 "그러고보면 그쪽은 누구지?"

 마치 방금 눈치챈 듯 소우씨가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대답하려고 하는 찰나,

 "아, 리노씨? 에미야와 에델펠트의 후계자래"

 바보같은 머저리 엔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소우씨는 엔과 대화를 이어나간다.
 칫, 좀 입 다물어주지 않을까나, 저 녀석, 하고 살짝 기분 나빠진 곳에서 로우가 말을 걸어왔다.

 "뭐야, 너. 방금 전까지랑 다르지않냐? 방금 전까진 나불나불 짓거리지 않았냐"

 아니, 그쪽이 더 많았거든요, 하고 무심코 태클이 걸어지고 싶은 말에 나는 조용하게 시치미를 뗀다.

 "아니, 별로 다르지 않은데"

 그런데 아무래도 나의 시선은 소우씨한테서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로우가 내 시선을 파악하기라도 했는지 비웃듯이 말한다.

 "헤에-, 호오-, 그런건가. 이건 Rock다. 소우, 시간이 있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도 읽는게 어때?"

 윽, 분명히 깨달은게 틀림 없어, 이 녀석.
 그렇지않고서야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응? 로미오와 줄리엣? 적끼리 사랑한다는 얘기던가, 그거?"

 도중에 엔이 끼어들어 말한다.
 그러니까 너는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
 쓸데없이 로우의 이야기를 늘리지 말라고-

 "아아, 그거다. 읽어두면 후에 도움이 될걸, 그렇지 않냐? 여자"

 어째서 거기서 나한테 이야기를 돌리는걸까, 절대 노리고 있지, 이거.

 "그..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나는?"

 말하면서 옆에 앉은 로우를 째려본다.
 로우는 엄청나게 즐거운 모양인지 웃어대느라 정신 없는 모양.
 다른 녀석들은 이해하지 못한 듯하고, 정작 소우씨는 눈치챘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어찌됐든 이런 카오스한 상황에 어느새 주문했던 음식들이 나열되어간다.
 냉짬뽕, 하야시라이스, 카레, 파르페, 커피.
 냉짬뽕은 말할 것도 없이 로우의 것이었고, 그 뒤로는 순서대로 엔, 쿄우게츠, 소우씨, 나의 순이었다.
 근데... 파르페?
 의외로 안 어울릴 것 같은 그 모습을 로우도 느낀 모양.

 "뭐냐, 너. 파르페라니"

 지적과 같은 말에 보충을 해야되는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Rock! 뭘 좀 아는구나, 소우. 역시 내 동생인가. 하하하! 역시 먹는 것은 차갑지않으면 안되지"

 차가운걸 좋아하는 로우의 맘에 든 모양이다.
 그보다 방금 뭔가 걸리는 단어가-

 "엣? 동생?"

 무심코 뱉어낸 말에 로우가 대답한다.

 "아아, 그래. 내 동생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가 소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도 이해 못하는건 아니지. 그렇지? 여자"

 어째선지 또 이쪽으로 넘기는 로우.
 뭡니까, 이 브라콘.
 그보다 어째서 나한테 넘기는건데 아까부터, 싸우자는건가, 이건.

 "근데 어째서 이렇게 다른거야? 성격은 둘째치고 외형도 전혀 다르잖아. 이쪽은 흑인에 남색미역머리고, 소우씨는 백인에 흑발 초미남이잖아"

 "아니, 흑인 아니거든. 그저 탔을 뿐이다. 중동에 오래있었다보니, 그리고 머리는 내쪽이 아버지, 소우쪽이 어머니 유전이니까. 근데 초미남인건 동일하다만?"

 "헤에, 소우씨의 어머니는 예쁘시겠네"

 "Fuck, 처음과 끝은 무시냐"

 그 후, 계속되는 로우의 공격 같은 말을 어찌어찌 넘기고 소우씨와는 단 한마디도 못한 채 가게 밖으로 나왔다.
 일단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채 천천히 걸어나가다가 그대로 헤어지나 했는데 어째선지 로우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한마디,

 "바보냐, 너는. 어쩔 수 없네. 어이, 소우!"

 조금 앞서 나가는 세명 중 끝에 있는 소우씨를 불러세운다.
 뭐, 덤으로 나머지도 잠깐 멈춰섰지만 로우가 둘이 할 얘기가 있다는 듯 손짓하자 그들은 속도를 줄인채 걸어나간다.
 그리고는 어째선지 나를 부르는 손짓.
 그것을 보고 총총 뛰어가니,

 "소우, 이 녀석이 너에 대해 알고싶다던데"

 어째선지 소개하고 있다.
 부끄러움에 피가 올라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
 무슨 말을 하는거야, 이 사람!

 "아니, 그게-"

 그러나 재빨리 부정하려는 나의 말을 끊은 소우씨는,

 "그런가요, 저도 당신에 대해선 알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심장을 멈추게 할 생각인가보다.
 그 와중에 분위기를 읽는건지 못 읽는건지 로우는 Rock를 연발해 웃으며 떠들어대지만, 너무 정신이 없어 들리지도 않는다.
 그 후 어떻게 됐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폰번호는 겟한 모양이다.
 역시 나, 정신이 없어도 잘 해냈다.
 그리하여 업 된 기분으로 오전을 지나 오후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