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5시가 조금 되지 않은 4시 54분.
 약속 장소에 가기 위해 빨간색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위에 베이지색의 코트를 걸치고, 저택의 현관을 빠져나온다, 물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의 가발을 덮어쓴 채로.
 과거의 산물인 이 저택의 외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저택 밖으로 향하는 외길을 걸어나간다.
 지금 걷는 정원이나 다름없는 장소는 원래의 주인이 없는 지금, 이름 없는 풀들로 가득히 차 있다.
 그나마 겨울이기에 말라 죽어가는 것들도 있지만, 여름에는 꽤나 무성하여 내 무릎까지 오는 높이들로 풀들이 자랐었다.

 "사람들을 불러서 다 없애버려야 되나. 나 혼자하기엔 하기엔 너무 넓은데"

 주변을 둘러보면서 혼잣말을 남긴 채 그 사람과 공공장소의 경계인 철로 이루어진 3미터를 좀 넘는 벽에 난 문을 빠져나간다.
 고고함을 자처했던 그 사람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산의 중턱에 저택을 짓고 보통은 나오는 일이 없었다.
 가정부와 비서 그리고 청소부, 이렇게 셋만을 고용해 자신은 거의 히키코모리와 같이 저택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나날의 도중에, 돈만 주면 뭐든지 한다는 심부름 센터라는 이용해 먹기 좋은 꼬마를 찾아내 비서에게 데려오라고 한 것인데, 물론 그 꼬마는 5년 전인 고등학생 때의 나다.
 뭐든지라고는 하지만 위법행위까지 시킬지는 몰랐다.
 어찌됐든 그 사람이 뒤에 있으니 잡혀갈 일은 없었지만.
 그러한 사람의 밑에서, 그 사람이 죽은 후까지 약 5년간을 저택에서 왔다갔다 하다보니, 이 무지막지한 언덕을 오르내리는 것은 이제는 단련이 되어있다고 할까,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그 사람이 죽고 난 후에 일하던 사람들을 내보낸 후, 밤 중에 저택에서 배달음식을 시키는 일이 많았는데, 6개월 전부터 최소 2인분이라는 식당가의 이상한 규정이 생겨 최근에는 배달음식을 먹는게 뜸해졌다.
 역시 적어도 한명 정도는 남겨두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나. 내가 버는 돈으로는 내 몸도 건사하기 힘들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가면서 그 사람의 돈을 안 쓰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숨을 내쉬며 기나긴 비탈길을 내려간다.
 내리막을 걸어 약 10분 가량이 지나자 서서히 주택가에 들어선다.
 달동네라고 부를만한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택들.
 보통 1층의 상가에서 일을 하고 2층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최근에는 건물을 통째로 상가로 만들어가는 추세인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쓸데없이 오래된 마을이기에 사람이 올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겠지.
 걷는 도중에 만나는, 일로 알게된 사람들과 인사를 하며 언덕에 위치한 주택가를 빠져나가면, 거기에는 방금까지 있던 곳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의 빌딩들이 늘어서 있다.
 흰색의 보도블럭을 깔아놓은 중간 중간에 가로수를 심어놓은 중앙의 길과 그 양 옆에 세워진 빌딩들.
 지금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상가들이 빌딩 내부의 대부분을 꿰차고 있다.
 언덕에 위치한 주택가를 제외하고, 평지에 있던 상가들이 있던 자리에 최근에 재개발사업에 들어가 상가들이 들어설 빌딩들이 새로 세워진 것이다.
 솔직히 말해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놀이터가 없지만, 예전부터 살아온 이전 세대들에게는 자신들의 생활을 뺐어가는 위협이겠지.
 그런 탓에 몇 대에 걸쳐서 대를 이어가는 상가의 주인들은 적극 반대에 나섰다고 하지만, 결국은 국가의 승인으로 재개발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재개발지구에 속한 거주민들이 더 많았고, 언덕에 사는 거주민들 중에서도 상가를 운영하지 않는 사람들은 새로운 상가가 들어오는 것도 좋다는 생각에 찬성표가 많아 국가가 이를 승인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심부름 센터에 불과한 나에게 이미 계획에 들어간 재개발을 막아달라는 이상한 요청이 들어왔지만, 일개 학생이 국가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가 없기에,

 "그 땐 이게 최선이었는데, 지금 부탁 받으면 다를려나"

 사실 상 빌딩이라고 해도 대도시와는 달리 약 10층 높이의 건물들이 순식간에 줄을 세우듯 들어섰다.
 빌딩들의 높이가 낮은 것은 그나마 최대한 새롭게 들어서는 상가의 수를 줄여 볼 생각이었지만, 그게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이 그 때에 최선을 다해 고민한 결과였으니까.
 그리하여 나에게도 조금은 관련이 있는,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의 장식이 넘치는 새로운 상가단지를 걷다가, 단골이라고 불려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최근에 자주 드나든 카페에 들어간다.
 이미 학생들은 방학에 들어간 것일까,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애들이 꽤 많이 있었다.
 그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두리번 거리며 확인하다가, 카운터와 출입구에서 제일 떨어진 곳에 앉아 탁자에 커피를 올려놓은 채, 내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의 책을 바라보고 있는 약속의 상대를 발견하고,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다가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염색을 했는지 주황색 비슷한 색의 단발머리를 한 그녀.
 고등학생 시절에 같은 학교를 다닌 여자들 중에서 지금까지 연락하고 있는 유일한 여자다.
 오늘은 무슨 기분이 들었는지 빨간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바탕에 검은색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있다.
 옆의 의자에 반 접혀진 채로 걸쳐진 코트도 아마 베이지색일 것이다.
 주문을 끝내고 아직 시간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스마트폰의 시간을 확인하고 다가가 맞은 편에 앉는다.

 "안녕, 하나. 아직 10분 정도 남았는데 일찍 왔네?"

 인사를 건네자 읽고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이쪽을 바라본다.
 부모가 돈이 있는 탓인지 아니면 그저 유전자의 힘인 것인지 꽤나 미소녀다.

 "오늘도 여전히 미소녀인걸"

 "......"

 방금의 대사는 미안하지만 나의 대사가 아니다.
 명실상부 하나가 내뱉은 말인 것이다.

 "그보다 어제도 말했지만 하나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자신의 핸드백에 넣는 하나.
 아니, 하나라는 이름은 고등학생 때까지의 이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머리색을 바꾸는 김에 이름까지 바꾼 모양이다.

 "하나은이었던가?"

 "응, 특별히 나은이라고 부르게 해줄게"

 높은 녀석의 시선으로 특별히라고 말하는 하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다닐 것이다.
 저번에 지나가던 녀석들이 그렇게 부르던 기억이 있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외자 이름이었기에, 게다가 '나'라고 하는 이름만 부르기 힘든 이름이었기에, 고등학생 때까지 성까지 같이 불려서 이름만 불려본 적이 없는게 맘에 안 들어 바꿨다고 한다.

 "근데 왜 바지야? 치마 입고 오랬잖아.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가니까"

 내 바지를 바라보고는 맘에 안 들었는지 의문을 던지고는 커피를 마시는 하나.

 "가발 쓰고 오기도 싫은데 치마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하나의 말에 불평을 담아 대답하자 때마침 주문했던 커피가 나왔는지 진동벨이 울려,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한다.
 점원에게서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에 돌아와 앉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뒷모습을 보니 바지도 나쁘지 않네, 누가봐도 여잔데?"

 말하면서 웃는 하나한테, 시끄러워, 라고 한마디 던지고 커피를 한모금 마신다.

 "그보다 가발은 꼭 써야 되냐? 너네 집에 가서 써도 되잖아. 밖에서 그림을 그릴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안돼. 오히려 치마를 입지 않은 분 만큼 의뢰비에서 깎아도 될 정도 아냐?"

 "아니, 의뢰의 내용은 모델이지, 여장 자체가 아니잖아"

 그렇다.
 물론 이쯤되면 누구나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가발을 쓰고 다니는건 별로 내가 여장 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백퍼센트 이 녀석의 이상한 의뢰 때문이다.
 하나의 의뢰는 당돌한 것이었다.
 때는 일주일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일이 없는 내가 저택에서 시간을 죽이면서,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하고 고민을 하던 오후 3시쯤에 벌어진 일이다.
 햇빛이 비추는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유명한 추리소설을 읽던 도중, 탁자에 놓았던 스마트폰이 오랜만에 소리를 냈다.
 스마트폰에는 '하나'라는 이름이 표시되고 있었다.
 그 때 이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아니, 결국은 이렇게 되었겠지만.

 "당신의 마을의 심부름 센터씨 신한공무점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발신자가 누군지는 아는 상황이지만 우선은 영업멘트를 날리자 상대의 이상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 아빠? 나야, 나. 조금 돈이 필요한데 돈 보내줄 수 있어?"

 "이것이 바로 '나야, 나' 사기인가? 미안한데 나한테는 나만한 딸은 없는데"

 이상한 물음에 이상한 대답을 하자 상대는 이상하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어라? 이상한데. 절대로 속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어?"

 "적어도 어린애의 목소리를 내라고. 아니, 애초에 나한테 딸이 없는데 속을 리가 있냐, 바보냐?"

 나의 정당한 대답에, 그것도 그렇네, 하고 대체 어디까지 진심인건지 진지한 목소리로 답해오는 목소리.
 이상한 짓을 하는걸 보니 틀림없이 하나였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정말로 돈이 필요한건 아닐테고"

 "돈이야 언제든지 필요하지만 괜찮아. 진짜 아빠한테 방금 같은 전화를 하면 돈은 금방 들어오니까. 그보다 너무한걸? 내 번호 저장 안해놨어?"

 친아버지한테도 보이스피싱 같은 짓을 하는거냐, 넌.
 아니, 친자식이 돈이 필요하다고 할 뿐인건가?

 "저장해놨는데, 왜?"

 "저장되어 있는데 어째서 영업멘트?"

 아무래도 받자마자 한 캐치프레이즈가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캐치프레이즈야. 일단은 일하는 사람의 예의라고 할까?"

 "앞으로는 그런 예의 필요 없으니까 하지마"

 "네에네에, 그래서? 3년만이던가? 무슨 일로 전화했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보고 처음이니까 거의 3년이 다 되어간다.
 장난을 치자고 오랜만에 전화했을 리도 없을거라고 생각해 용건을 묻자, 하나가 대답했다.

 "2년 10개월만이야. 졸업은 2월에 했으니까. 그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일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가 된거야, 슬퍼지는걸. 대학교 간 이후로 전화 한 번 안 하고 말이야. 언제까지 내가 먼저 전화해야 돼?"

 "어라, 고등학생 때도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솔직히 말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2년간 같은 반이었지만 말을 나누게 된건 3학년의 겨울방학 전인, 마침 3년 전의 이때 쯤부터다.
 짧은 기간에 친해져도 크리스마스의 직전이었으니, 그야 사귀는 녀석들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핑크빛 나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이상한걸. 애매한 기억에는 거짓말을 해도 진실로 받아들인다는걸 오늘 아침 텔레비전에서 봤는데. 전혀 그렇지 않네?"

 "이상한건 네 머리 속이지. 게다가 졸업식날 네가 한 말 기억 안나?"

 약 3년 전의 졸업식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겨울이 끝나가는 2월의 막바지.
 졸업식이 끝나고, 딱히 친구도 없기에 집으로 가려고 발걸음을 움직이는 나의 손목을 잡는 손이 있었다.
 손목이 잡혀 뒤를 돌아보자, 나보다 10cm 가량 작은 키의 하나가 나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검은색의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졸업한 뒤에는 수도권 근처로 떠난다던, 같은 반 녀석들 중에서 나에게 말을 건네는 단 하나 뿐인 여자다.
 약 3개월간 일 관련으로 알게 된 사이인 이 여학생이 무슨 일로 내 발걸음을 멈췄나 싶어서 이유를 물으려 하기 직전,

 "잠깐 이리 와 봐. 할 말이 있어"

 시간이 되는지도 묻지 않고 손목을 잡은 채로 어딘가로 끌고 간다.
 자기중심적이라고 할까, 이상한 뇌 구조를 가진 것 같은 여자의 손에 이끌려 빈 교실에 끌려 들어간다.
 고등학교의 졸업식날.
 여학생과의 단 둘만의 교실.
 어딘가의 연애 만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상황에 별로 기대하는 것이 있지는 않지만, 분명 이 상황이라면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 또한 약간의 기대를 마음에 품고 소녀의 말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소녀는 마침내 입을 열고,

 "대학교에 들어가면 여기의 일은 전부 없던 걸로 할 생각이니 연락하지 말아줬으면 해, 아무리 내가 보고 싶어도 말야"

 ......

 "지금 뭐라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전화를 한다거나, 찾아온다거나 하지 말아줬으면 해. 알았지?"

 하? 하아? 하아아아아?
 고백을 하지도 않았는데 차인 듯한,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말을 들으면서 기대했던 나의 멍청함에 웃음이 나, 전력으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그럴 일 없어"

 이 때 만큼 사람을 향해 활짝 웃은 일도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살짝 원망의 웃음이 섞여있기는 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눈 앞의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래? 이상한걸"

 그러고나서 여자는 무언가가 생각대로 안 되었는지, 그대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성대하게 한숨을 내쉰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 졸업식날의 핑크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한 추억을 떠올리고 있자, 수화기 너머의 하나가 이내 생각난 듯이 말을 꺼낸다.

 "그러고보면 그랬네. 외로워하는 얼굴을 볼 생각이었는데. 엄청나게 밝은 얼굴이었지, 그 때"

 그래서 이상하다고 한거냐.
 이 하나라는 녀석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이상한걸, 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
 대부분이 생각대로 될 리가 없는 상황이기에, 네 머리 속이 더 이상하다, 라고 되받아쳐 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수도권 대학으로 간 뒤에 연락도 못하게 한 하나씨께서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을까"

 "그 대학에 관한 일로 의뢰할 일이 있어서"

 "대학교 일로?"

 대학교에 관련해서 나한테 의뢰할 일이 뭘까, 생각하고 있자, 하나의 말이 이어진다.

 "응, 그러니까 시간 맞춰서 와, 그럼"

 "잠깐, 아-"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끊어진 전화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쓸데없는 이야기만 주구장창하고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로 끝마치다니.
 게다가 아직 의뢰에 대한 내용은 커녕, 시간이나 장소도 듣지 못 했는데.
 어이가 없어서 전화를 걸어볼까, 하는 도중에 메신저의 알림이 울렸다.
 발신자는 볼 것도 없이 하나였다.
 내용으로는 약속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에 대한 약도 등이 있었고, 그 끝에는,

 '신한씨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사랑하는 언니, 하나로부터'

 라는 이상한 문구가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나의 캐치프레이즈를 따라한 듯한데, 답변으로는 다음과 같이 적어줬다.

 '누가 언니냐, 누가. 오히려 오빠라고 불러도 좋아. 당신의 마을의 심부름 센터씨 신한공무점, 신한으로부터'

 그러자 보낸지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답장이 도착했다.

 '언니라면 불러줘도 되는데, 어때?'

 그 답장에 나는 오랜만에,

 '응, 필요없어'

 최상의 웃는 얼굴로 재답장을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약속의 날인 어제, 옷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기에, 오늘과 같은 옷을 입고, 오후 6시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상점가에 있는 건물 중 하나에 위치한 빌딩의 3층.
 밖에서 보니 건물의 유리창에는 흰색의 벽지가 붙어 있는지 안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뭐하는 곳인지 상상을 하면서 엘레베이터에 올라 3층에 내려, 철문에 노크를 한다.
 노크를 하고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렸다.

 "10분 빨리 왔네? 들어와"

 거기엔 예전과는 달리 머리를 주황색으로 물들인 하나가 있었다.
 예뻤던 얼굴과 작은 키는 달라진게 없었기에, 몰라볼 정도는 아니었다.
 코트를 입은 나와는 달리, 안에는 온풍기라도 돌리고 있는지, 흰색의 반팔 셔츠를 입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빨간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럼 실례할게"

 철문을 지나자 뻥뚫린 넓은 공간이 있었다.
 건물을 지탱하기 위한 기둥만을 남긴 채, 방과 방을 구분하는 벽도 없고 아직 공사를 하지 않은 듯한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 속을 하나의 안내를 받아 구석에 걸어가자, 거기에 의자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준비된 파레트가 놓여있었다.

 "이런데서 그림이라도 그려?"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파레트를 보며 묻자,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부터 그리려고"

 "오, 역시 미술대생. 겨울방학인 걸로 아는데 방학에도 그림이라니 고생하네"

 "그림 그리는건 고생이라고 할 것도 아니지. 지금부터는 너가 더 고생해야 되는데"

 음?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내가 더 고생해야 된다고 들은 이상한 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에 들었던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려고 하기도 전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자, 이거 받아. 앞으로 그거 입고 오면 돼. 일주일 정도 걸리려나?"

 "이게 뭔데?"

 자신의 집에서 여기까지 들고온 것 같은 쇼핑백을 받아들고 안을 확인하려고 바라보면서 묻자 하나가 대답했다.

 "가발이랑 옷"

 "가발?"

 하나의 말을 들으며 쇼핑백에 든 물건을 빼내어들어보자, 하나의 말대로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이었다.
 덮어쓰면 허리까지 올 것 같은 가발을 왼손에 들고, 이거 뭐 어쩌라고, 란 느낌으로 양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어깨높이에서 올렸다내리자, 하나가 가발을 손에 들더니 나의 머리에 씌웠다.
 그리고는 만족한 표정을 짓고는 웃으면서,

 "역시 나의 눈은 틀리지 않았어. 완벽한 미소녀인걸?"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짓거렸다.

 "아니, 뭐, 가발은 그렇다치자. 아니, 그렇다칠만한 상황도 아니지만. 그보다 이건 진짜 뭔데"

 가발을 쓴 채로, 쇼핑백에 든 나머지 물건을 꺼냈다.
 어딘가의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것도 여주인공이 입을 법한 흰 원피스였다.
 어째선지 가슴 패드가 들어있는 채인.

 "예쁘지? 최대한 어울릴만한 걸로 골랐어. 밀짚모자까지 쓰면 완벽할 것 같은데, 맘에 드는게 없었어"

 대체 뭐가 아쉽다는건지 모르겠지만, 아쉽다면서 한숨을 내쉬는 하나.
 나는 그저 이게 대체 무슨 장난인가 싶은 기분이 들어, 다시 한번 순서에 따라 물었다.

 "그래서, 이거 왜 가져온건데"

 "음? 모델할 때 입으라고 사왔어. 좀 비쌌지만 최대한 어울리는걸 사기 위해 노력했어"

 칭찬해달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전혀 칭찬해 줄 일이 아니었기에 무시했다.

 "모델은 역시 나?"

 "응, 의뢰니까 모델비는 따로 없지만, 의뢰비는 주도록 할게"

 아직 한다고 안 했는데, 이미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게다가 심부름 센터에 의뢰를 했으니 의뢰비를 주는건 당연한거고.
 역시 이런건 단번에 거절하는게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어,

 "의뢰비는 걱정하지마. 저번만큼만 주면 되지? 근데 돈 더 줄테니까 나랑 만날 때는 밖에서도 가발 쓴 채로 있어주면 안돼?"

 "아, 응. 네가 원하면 그거까지 하고. 뭐든 시키는대로 하죠, 하나님"

 돈에 굴복하는 나였다.
 저번만큼이라니 분명 3년 전, 그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일테니, 이번 일이 무엇이 되었든 앞으로 3년간은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최근에 일이 없는 나로써는 무진장 감사한 일이었다.
 역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자는 하늘의 도움을 받는 것이구나.
 근데 이왕 도와줄거면 좀 쉬운 일로 해주면 덧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자 하나가 이어서 말을 꺼낸다.

 "자, 그럼 일에 대한 이야기도 끝났으니까 시작할까?"

 "그래, 시작해보자고"

 "응, 그럼 갈아입어"

 ......
 하나의 말에 나는 잠시 손에 들고 있던 원피스를 바라보고,

 "아니, 진짜 부탁인데 이것만 안 입으면 안되겠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의뢰인에게 부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첫날이니까 얼굴만 그려준다는 관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가발만 쓴 채로 일의 첫날을 마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의 의뢰를 받은 나는 그녀를 만날 때는 가발을 쓰고 나온다는 이상한 의뢰까지 받게 되었지만, 치마만은 어떻게든 거부하여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오늘은 가발을 쓴 채로 밖에서 만나자는 하나의 요청에 의해 찻집에서 만난 것이다.

 "뭐, 지나간 일은 됐고. 근데 궁금해서 묻는건데 나를 여장시킬게 아니라 그냥 여성 모델을 쓰면 되는거 아니야?"

 어제는 얼굴을 그린다고 입을 움직이지 못 했기에 이제와서야 궁금한 것에 대해 묻자 하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아니,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게 아니고 너의 여장 모습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 얼굴을 하고 남자로 사는건 전 인류의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아? 라고 덧붙인 말을 듣지 않은 걸로 하고 커피를 한모금 마신다.
 이 녀석은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무척이나 남자다운 외모를 하고 있다.
 안보이니까 사기를 치는게 아니고 진짜로, 지나가는 여자 10명 중 8명은 쳐다볼 정도로.
 물론 하나한테도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야 여자는 예쁜 여자를 쳐다보는 경향이 있으니까"

 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지만 분명 그녀들은 나의 잘생김에 시선을 고정한다고 생각, 아니, 그것이 사실이다.
 어찌됐든 그 뒤로는 하나의 대학생활이나 나의 쓸모없이 지낸 3년간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그녀의 아틀리에라고 할 수 있는 그 빌딩으로 향했다.
 그리고 결국 어제의 흰 원피스를 입게 된 것이지만, 모두의 행복을 위해 평생 마음 속에 가둬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