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자기 꼬리와 싸우던 청하는 몇 분을 거기에 몰입하고 나서야 자기 꼬리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었는데, 그 방법이 자기 품 안에 끌어안은 채로 나와 체스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체스도 바둑, 장기에 이어 세번 연속으로 패배를 당했고.


세 번인아 다른 게임으로 바꿨음에도 세번 패배하자 나보다는 청하가 더 당황했다.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미안하다네. 내가 주로 뒀던 상대가 금향이었다는 점부터 깨달았어야 했느니라."


체크메이트를 당해 끝나버린 체스판에서 시선을 돌려 청하를 보니, 여전히 움직이려고 하는 꼬리를 품에 안은 채로 체스판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렇게 노려봐도 체스말이 움직일 리도 없었는데.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체스판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청하는 팔을 문 쪽으로 뻗었고, 문이 열리면서 체스판과 체스말이 알아서 정리되며 어딘가를 향해 날아갔다.


탁자 위가 정리되자 밑에 내려가있던 주전자와 찻잔이 탁자 위로 다시 돌아왔고, 잔에 차를 따를려다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시무룩하는 듯한 느낌과 함께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슬슬, 같은 차만 마시다보니 물리는 느낌이 없지 않아 들어서 물이 마시고 싶은 참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갖고, 절반쯤 남은 차를 마시고 더 따르려고 하는 주전자에게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거절당한 주전자는 내 쪽에서 벗어나 청하쪽으로 날아가더니 텅빈 잔을 보고는 그쪽에다가 차를 따랐다.


"더 안 마시느냐?"


"충분히 마셨습니다. 그리고, 더 마셨다가는 화장실을 갈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아, 그렇지. 미안하네. 우리에게는 그런 활동이 아예 없다보니 깜빡 잊어버렸군."


"그럴 수 있습니다."


텅 비어버린 찻잔의 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청하를 본다.


품에 안고 있는 꼬리가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이제 잠잠해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팔에 힘을 꽉 주고 안고있는 걸 지도 모르고.


소매와 품이 넓은 한복을 입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 힘을 주고 안은 건 아닌 것 같았다.


품이 넓다 해도 가슴의 크기가 크기라서 꼬리가 가슴 안쪽에서 질식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있었지만.


"그럼, 다음 놀이라도 하겠는가?"


"…그것도 좋겠지만, 슬슬 가볼 시간입니다."


"벌써? 아니, 벌써도 아니겠군. 우리 기준으로 생각하면 잠깐이지만, 인간의 기준으로는 잠깐이 아닐테니."


그렇게 말하며 청하는 고개를 뒤로 돌려 벽에 달린, 낡은 티가 보였지만 관리는 잘 되고 있는 건지 여전히 광택이 나는 괘종시계를 봤다.


여기저기 화려한 장식이 붙은 것과, 낡은 티가 나는 것을 보면 저것도 꽤 오래된 물건같다.


방 안에 들어와서 본 물건 중에서 낡지 않은 물건이 있기는 한 건가 생각을 한번 되돌아봤지만, 다 낡은 물건들이었다.


…그러고보니, 청하는 스마트폰이나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 않는 건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청하."


"응?! 왜, 왜 그러느냐?"


"청하는 스마트폰같은 통신기기를 안 갖고 다니십니까?"


"스마트폰… 아, 그것. 내게도 있기야 하지. 금향과는 다르게 나는 넓은게 좋더구나."


소매에서 꽤 옛날 물건으로 보이는 넓적한 스마트폰을 꺼내보인 청하는 그걸 내게 내밀었다.


"모처럼이니 내게도 전화번호를 주게나."


"알겠습니다. 다만, 너무 많이 전화를 하지는 말아주시겠습니까."


"걱정 말게. 가끔 도서관이나 금향 녀석이 하는 카페에 부르는 것 말고는 따로 전화거는 일이 없을 것이네."


"믿겠습니다."


"믿게나. 내가 허튼 소리를 하는 용처럼 보이는게냐?"


에잉. 요즘 인간들은 말이야… 모르겠군. 요즘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지 아는가?


청하는 머릿속으로 내게 물어봤지만, 고개를 내저으며 부정했다. 나도 이곳에서 한달동안 적응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으니까.


그게 아쉬운 건지 청하는 에잉.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우우웅─


바지 주머니를 타고 진동이 올라온다.


주머니에서 꺼내어 스마트폰을 청하에게 보여주니 그제서야 통화를 끊고는 미소를 짓는 청하가 보인다.


평소에 보던 웃음이 아니라 은은하게 짓는 미소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약간 남아있던 긴장이 그걸로 사라진 것처럼, 어느정도 여유를 가지고 청하를 쳐다보았고, 청하는 자기 스마트폰에 적힌 내 전화번호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전화번호를 건네줬을 뿐인데 저런 반응이라면, 금향도 청하와 비슷한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너무 과하게 좋아하는 게 아닌가.


청하는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물론 장난은 아니었겠지만 반복해서 내게 전화를 걸며 내 전화번호가 맞는 건지 확인했다.


"거기까지 해주셨으면 합니다."


"…핫! 미안하다네. 모처럼 전화를 걸 인간이 생겼다보니 그만…."


내가 뭐라고 할 것처럼 보였는 지 재빠르게 소매 안으로 낡은 스마트폰을 숨기는 청하였지만, 솔직히 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아까부터 진동이 울리는 게 귀찮았을 뿐이었다. 뭣보다 내가 청하에게서 물건을 빼앗을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청하가 내게서 물건을 빼앗는 게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갓난아기 손목을 비틀 듯이, 쉽게.


헤, 헤헤. 하고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가기 시작한 청하의 모습에 자연스레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청하의 뒤에 있는 괘종시계를 보니 시간이 거의 저녁이 다 되어갈 쯤이었다.


언제 저렇게 시간이 흘렀는 지. 아니, 바둑 세 판에 장기 세 판, 체스 세 판이나 했으니 생각보다 오래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셋 다 봐주면서 한다고 내게 시간을 꽤 오래 줬던 것도 있었으니.


이쪽을 보지 않는 청하의 모습에 참았던 한숨이 절로 나온다.


"하아… 그럼, 일어나겠습니다."


"어, 어어. 그러게나. 나도 밖에 마중은 나가주겠네."


청하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나를 따라오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돌 위에 잘 정돈되어 올라간 내 신발을 신고, 대충 던져놓은 청하의 신발을 청하 아래에 놓아뒀다.


"고맙느니라."


"별 일 아닙니다."


청하가 신발을 신는 동안, 마당 앞에 서서 청하의 집을 한번 살펴봤다.


…언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를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문양 하나하나가 고급스럽게 느껴졌고, 기둥으로 삼은 나무는 윤기가 흐르는 것이 감히 내가 만져도 되는 것인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기둥이 저런데 청하와 같이 들어갔던 방은 얼마나….


어느샌가 내 옆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는 청하의 모습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가세나."


"알겠습니다."


내게 왼손을 내밀어오는 청하의 손을 오른손으로 마주잡고, 청하와 함께 대문을 향해 걸었다.


청하의 집에서는 평소에 보지 못해서 낯선 모습들이 많았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평소와 같은 청하였다.


어린애처럼 신나서 마주 잡은 손을 앞 뒤로 흔들며 앞으로 걸어가던 청하의 옆을 따라 걸으며, 대문에 가까워지자 알아서 대문이 열렸다.


열린 대문 밖으로 보이는 도서관의 풍경은 여전했지만, 시간이 저녁이 다 되어가는 무렵이라 천장에 달린 전등이 도서관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도서관의 모습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 대단했지만, 아무래도 청하의 집을 보고 온 탓에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대문 밖으로 완전히 나오자 뒤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청하의 옆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도서관에 오밤중에 오는 일은 없는 게 좋을 것 같다.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책장들을 보게 된다면 거품물고 쓰러질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책장의 높이가 높이다보니 전등으로도 다 비춰지지 못하는 곳들도 보였다.


…청하가 그렇게 쉽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도서관에 들일 리는 없었지만.


"그거 아는가."


금향의 카페는 내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을 보고는 따라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건… 처음 듣습니다."


"인간이랑 같이 사는 방법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던 금향이, 내가 짓는 걸 보고는 자기가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한 게 카페였다네."


"그렇습니까."


"…알다시피 카페를 만든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뭐어… 말 안 해도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금향 녀석한테 장사에 재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그 녀석한테 재능이 있었다면 카페도 그렇게 구성하지 않았어."


아무리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라지만, 카페 가운데를 비워둔다니. 공간 낭비아닌가.


공간 낭비…까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인테리어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나보다 경험이 더 많아보이는 청하에게 그런 말을 할 지식이 될 련지.


청하는 지식 뿐만 아니라 연륜도 많아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로 만약의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평소에 보던 모습이 청하의 연기였을 뿐이고, 집에서 본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면?


옆에서 방실방실 웃으면서 걸어가는 청하를 한번 살펴본다.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면서도, 옆에 있는 나 때문에 약간 불편한 게 보였다.


"일부러 그렇게 꼬리를 움직이시는 겁니까?"


"물론이라네. 자네에게 꼬리가 닿으면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럼, 제 등 뒤쪽으로 해서 꼬리를 움직이면 되지 않습니까."


"…그건 생각 못했는데."


느낌표라는 게 실제로 보였더라면 청하의 머리 위로 느낌표가 뜨지 않았을까.


걷는 것도 멈추고 놀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청하의 모습에, 저게 연기라면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 등 뒤로 꼬리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까보다 편하게 꼬리를 살랑거렸다.


"그럼, 다시 가자꾸나."


"예."


당당하게 걸어가는 청하의 옆을 따라 걸으며, 머리 위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책에 놀라 고개를 숙였다가 옆에서 푸하핫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흐흐. 미안하구나. 기본적으로 책은 부딪칠 만한 곳에 닿는 순간 알아서 피해가게 설정되었느니라."


"…그걸 왜 이제야 말해주십니까."


"나도 이렇게 오랫동안, 내 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을 못했다네."


적어도, 몇 년에 한번은 오겠거니 생각은 했건만.


머릿속으로 전해오는 청하의 말에는, 안타까움과 아쉬움,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몇 년에 한 번이라니. 사람의 기준이라면 아주 오랫동안 못 만난 것처럼 느껴질 텐데.


몇번이고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었지만, 용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확연하게 달랐다.


아니, 대부분의 오랫동안 살아가는 종족들과 짧게 사는 종족의 기준이 다른 것이겠지만.


그래도 청하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아마 꽤 오랫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게 아닐까.


청하의 집에 찾아온 손님이 내가 첫번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웃을 생각인건지, 옆에서 깔깔깔 웃는 청하와 함께 걷다보니 어느샌가 카운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카운터에 보이는 직원은 책에 코를 박은 채로 청하와 내가 있는 쪽으로 손을 흔들었고, 청하는 그런 직원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오면 일 안 하고 노는 버릇을 좀 고쳐놔야겠군."


"저 오늘 일은 다 끝냈거든요, 사장님!"


"끝냈다고 해도 손님에게 그게 뭐하는 짓인가. 제대로 해야지."


"안녕히 가세요, 손님!"


청하가 그렇게 따지자마자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고는 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그런 직원의 모습에 청하의 이마에서 혈관이 튀어나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도 잠시. 한번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출입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어쩌겠는가. 내가 그리도 말을 했건만 듣지 않는 것을."


"…제가 뭐라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좋네. 단순한 투정이니."


그래도, 딱딱하게 말하는 주빈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구나.


…내 말투가 딱딱하다는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청하의 말처럼 어쩌겠는가. 나도 고치려고 노력을 해 봤지만, 이렇게 말투가 잡혀버렸는데.


나도 직원을 봤을 때의 청하처럼, 속에서부터 올라온 깊디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저도, 어떻게든 고쳐보려고 노력은 했습니다."


"…좀 더 고쳐보면 안 되겠는가?"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청하도 그렇고, 금향도 이런 말투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고맙다네. 그, 그리고 오늘 내 집에 와준 것도 고맙다네. 정말로. 얼마만에 찾아오는 손님인 건지 모르겠구나."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나를 보며 방긋 웃어주는 청하의 모습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뿔에 달린 색이었다.


여태까지 봐왔던 색들과는 완연히 다른, 밝은 푸른색에 뿔 안에 별이라도 달린 것처럼 반짝거렸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청하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뒤로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아, 후원 감사합니다!"


저 놈의 방음 마법을 빨리 고쳐버리던가 해야지.


…집에 돌아와서 씻고, 집 정리하고, 세탁기 돌리고. 다 하고 나서 오랜만에 푹 잠들겠거니 싶었는데 새벽에 또 깨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