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알아서 머리가 감겨지는 부적에 알아서 머리가 묶이는 끈을 사용하니 나갈 준비를 마치는 데에 긴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머리를 말려야한다는 게 가장 큰 귀찮음이었지만, 그것도 아미야가 건네준 지팡이의 마력을 사용해서 머리카락을 천천히 말렸다.


굳이 도구를 꺼내거나 꽂을 필요도 없이 간단하게 머리를 말릴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나 편한게 있었으면 진작에 썼을 텐데.


한달이라는 시간 동안 겪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기에 아쉬움만 남겼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옷도 대충 다 입었으니 이제 도서관으로 향하는 일만 남았다.


남았지만 왜 이렇게 가고 싶지 않은 걸까. 이유는 당연히 청하였지만, 그것 외에도 하나가 더 있었다.


저번에 보았던 봉인이 걸린 책이라면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그 책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귀찮은 일에 엮일 것 같다는 느낌이 팍 팍 들었지만, 이미 가겠다고 말을 꺼냈으니 되돌릴 수도 없었다.


흘린 물을 다시 찻잔에 되돌릴 수 없듯이. 아니, 여기서는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남자였을 때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이제는 이쪽의 상식에 맞추어 바꾸어가는 게 맞지 않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남자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와 동시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여기에서의 삶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마법이라던가 치안같은 부분에서도 그렇고, 자잘한 부분들에서도 만족스러운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종족이 거의 안 보인다는 게 참 아쉬운 일이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면 그래도 머물 생각이 조금은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게 아니었으니 참 안타까웠다.


사람으로서 여기에서 사는 것도 생각보다는 귀찮은 일이 많기도 했다.


당장 금향이라던가 청하라던가, 편의점에서 있었던 일이라던가, 필리아라던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온갖 일들에 엮여버리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여전했다.


빨리 남자로 돌아갈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있었고. 여기서는 만날 수도 없었기에.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가득 채우는 생각을 지워버린다.


안 그래도 복잡한 심정에 이런 생각까지 하기에는 마음도 그렇고 정신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기 마련이었다.


없다는 사실을 한달이라는 시간 동안 충분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또 다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켜내며, 방의 불을 끄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가는 동안에 잊어먹은 것은 없는 지 한번 되돌아보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챙기지 않고 갈 뻔 했다.


황급히 방으로 돌아가서 복주머니와 신분증을 비롯한 체크카드를 바지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그것 말고도 다른 것들을 더 챙겨야하는 것이 있나 곰곰히 생각을 해보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면 이 상태로 가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방 안을 한바퀴 걸어다니며 잊은 게 없는 지 떠올려보고, 그제서야 안심하고 현관으로 다시 향했다.


적당한 신발을 신고, 현관물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쌩 하고 부는 바람이 몹시 춥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왜 이리 추운 건지. 아직 겨울이 된 것도 아닐 텐데.


아며칠 뒤에는 겨울에 다가서는 날이 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후우 하고 입바람을 불면 새하얀 연기가 보이는 걸 보면 충분히 추운 날씨였지만.


가는 동안에 추워서 벌벌 떨면서 가는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현관물을 닫았다.


제대로 잠겼는 지 손잡이를 잡고 한번 당겨보니 덜컹하고 걸리는 걸 보면 제대로 잠겨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런 사소한 부분들도 제대로 확인해야 나중에 큰 사고가 되지 않는 법이었다.


엘리베이터 발걸음을 옮기기 전, 필리아의 집 문을 곁눈질로 흘낏 쳐다봤다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방송에서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될 법한 일들은 아마 없었을 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필리아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고 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을까.


1층에 내려가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상승시키고, 문이 열리기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스마트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해본다.


빠르게 준비한다고 서둘렀는데도 벌써 1시가 다 되어가는 걸 보면 도서관에 도착할 때 쯤이면 늦은 점심을 먹을 것 같았다.


청하가 늦게 도착했다고 뭐라고 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네.


이런 걸로 뭐로 한 적은 없었지만, 귀찮은 일이 되도록이면 없었으면 좋겠다.


소리도 없이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 뒤 1층을 눌렀다.


다 좋은데, 문이 열리거나 닫히는 소리를 제외하면 다른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단점으로 느껴졌다.


도착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을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한번은 왔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시간을 보내다가, 1층에 도로 내려간 것을 보고 아차 싶었던 적도 있었다.


…내가 부주의했던 것도 있었겠지만.


앞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벌써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밖으로 걸어나갔다.


9층에 있었을 때와는 다르게 바람이 덜 부는 것처럼 보이는 밖의 풍경이 보였다.


살랑거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모습도 그렇고, 꽃들도 뽑혀나갈 것처럼 꺾이는 게 아니라 살랑거리는 걸 보면 아래쪽은 그럭저럭 괜찮은 날씨인 모양이었다.


…밖에 나가봐야 알겠지만. 안에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출입문 앞에 다가서니 문 틈 사이로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나가니 확실히 9층에서 불었던 바람과는 다르게 잔잔하게 불어왔다.


오늘은 생각보다 밖에서 걸어다니기 괜찮은 날씨였다.


햇볕도 적당히 내리쬐는 것 같기도 했고, 바람도 이 정도면 공원에 앉아서 쉬고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예정이 있었기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쉬움이 한 가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도서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 밖에.


날씨가 좋아서 그런 건지 전에는 안 보였던 고양이 귀와 꼬리 두 개가 달린 여성이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서 균형감각을 자랑하고 있었다.


저런 상태로 어떻게 웅크리고 있는 건지, 보면 볼 수록 신기하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같은 두 발로 걸어다니는 종족인 건지 의심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낮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닌 지, 귀를 쫑긋거리는 걸 보면 저러고 있는 게 편안해서 저러고 있는 모양이었다.


뀌 말고도 꼬리 두 개도 살랑거리며 움직이고 있었고.


하나 의문이 있었다면, 왜 굳이 저 나무 위에서 저러고 있는 걸까 하는 점이었다.


다른 나무도 많을 텐데 굳이, 매번 같은 나무 위에서.


…물어볼 생각은 없었지만. 나름대로의 이유같은 게 있으니까 같은 곳에 있을 수도 있었다.


이유가 없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지만, 추측은 그만두었다.


제대로 사정을 아는 것도 아니고 멋대로 추측하고 결론을 내는 건 실례였으니.


나무 위에 고양이 여성에게서 눈을 떼고, 다른 곳으로 돌려보았다.


거의 점심 시간이 끝나가는 무렵에 나온 탓인지 돌아다니는 종족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백수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후드티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다니는 종족도 보였고, 눈에 띄일 정도로 화려한 복장과 장신구를 차고 다니는 종족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남자였을 때의 그 곳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는 않구나 싶었다.


너무 크게 다른 곳이 없기에 한달이라는 시간 동안 어떻게든 적응했던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서 이상할 따름이었다.


다른 점이 많은 데도, 이다지도 비슷한 부분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지금의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수상할 정도로 비슷한 역사를 따라가는 세계였지만, 여러 부분에서 다른 것들이 많았다.


대통령을 사람이 아니라 다른 종족들이 각자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던가, 수십개의 당으로 유지되고 있다던가 하는 것들.


특히, 세계대전에 관련된 부분에서 가장 크게 변화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이고, 또 죽어나가던 것이 여기에서는 다른 종족들로 바뀌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과학과는 별개되는 법칙인 마법이라는 게 존재해서 그런 건지, 사상자보다 부상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전의 세계와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온건하게 끝났다는 점에서도.


온건하게 끝난 이유에는 아마, 용이나 드래곤같은 종족들이 있었기에 그렇게 끝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자세히 알아본 것도 아니었으니 추측이었다.


자세히 알아볼 수도 없었던 것은, 어느 부분들은 일부러 삭제라도 된 것처럼 아예 내용이 없었으니.


흥미롭게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맥이 끊겨버리니 실이 끊어지는 것처럼 흥미가 식어버렸다.


…생각하는 게 너무 길어진 모양이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는 스마트폰을 잊은 채로 생각에 빠져있었던 것을 보면.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어보니 세 통의 전화가 와 있었고, 그리고 방금 전에 보낸 듯한 문자가 있었다.


청하가 점심을 준비 해놓았다고, 언제쯤이면 도착하냐는 내용이었다.


언제 도착한다고 말을 한 것도 아닐 텐데, 왜 벌써 준비를 해놓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곧 있으면 도서관에 도착할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였다.


이걸 문자로 보낼까, 아니면 전화를 할 까 고민을 해보았지만, 걸어가는 동안에 문자를 보내기에는 힘들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으니 전화를 걸었다.


"언제쯤 오는 것이냐!"


"곧 있으면 도착합니다만, 준비가 너무 빠른 것은 아닙니까?"


"식어도 금방 뎁히면 되는 것이니 상관없느니라! 하여튼, 나도 배가 고프니 빨리 오거라!"


예 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뚝 하고 끊어진 스마트폰을 걸음도 멈추고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왜 이렇게 급한 건지. 아니, 생각해보면 언제는 안 급했던 적이 있었던가.


전화를 끊은 게 방금이었는데 빨리 오라고 보채는 문자를 보내오는 것에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기다리는 청하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근데, 점심을 먹는 다면 도서관 안에 있는 청하의 집에서 먹게 되는 건가?


전에 보았던 집의 모습을 떠올리니 생각보다 불편한 점심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예의를 차리던 청하…의 모습은 솔직히, 그렇게 잘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이리저리 색깔이 변하던 뿔과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유분방하게 흔들리는 꼬리가 먼저 떠올랐다.


그 모습을 생각하니 점심을 먹으면서도 자기 멋대로 흔들리고 있을 꼬리를 청하가 어떻게든 감추려고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외형에 안 어울리는 가슴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도.


걷는 동안에 주변을 보면서 걷는 다는게 생각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도서관 출입문에 머리를 박을 뻔 했다.


여태까지 부딪치지 않고 왔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한편으로는, 여기까지 앞을 안 보고 잘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옷차림에 문제가 없나 몸을 한번 대충 훑어보고, 뭐 묻은 게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