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다. 모든 공간이 검다. 손끝조차 바라 볼 수 없는 완벽한 어둠. 바닥을 디디고 있는 건지, 이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고개를 계속해서 돌려 보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 곳엔 무언가 다른 공간이 있었다. 일렁임이 있었다. 잔잔한 파도가 휘도는 듯한 그 안에서는, 흑백 판화를 담은 듯한 사각형 화판 안에 움직이는 풍경이 있었다. 그 풍경은 오래된 영사기에 걸린 필름처럼, 툭툭 끊어지며 눈에 익은 장소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일까. 무척이나 오래 전에 보았던 풍경인 듯 한데. 기억을 되짚어 보려 하지만 비눗물에서 보일 법한 탁한 무지갯빛이 정확한 모습을 흐리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크게 볼 수 있다면. 아니면 저 판을 꺼낼 수만 있다면. 그러면 저 곳이 어디였는지 알아낼 수 있을 텐데. 손을 뻗어 그 시커먼 바다를 찔렀다. 그리고 자맥질을 하기 위해 물을 걷어 내었다. 하지만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나의 동작은 무의미했다. 그저 버둥거리기만 할 뿐,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풍경을 끄집어 낼 수도 없었다. 안타까웠다. 왠지 이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머릿속에 비슷한 기억들이 차 올랐다. 내 머릿속에 수도 없이 떠오르던 불분명한 기억의 파편들은, 시나브로 시각적으로 실체화되고 있었다. 어둠 속에 별처럼 박혀 가던 조각들은, 순식간에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형체가 분명한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내 눈 앞을 가렸다. 그것은 또 다른 잊혀진 기억이었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재생하고 있는 기억 안에는, 이 곳에서 그렇게 풍경을 꺼내려 진을 빼던 나의 모습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떠올렸다. 나는 단 한번도 저 풍경을 꺼내어 들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손을 뻗을수록 지쳐가게 만드는 흐린 풍경을.

 왠지 슬퍼졌다. 나는 그렇게, 어둠 속을 헤집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러자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던 사각형의 틀은 멀어지기 시작했다. 풍경이 주던 희미한 빛조차 사라지고, 이윽고 어둠은 이 공간 안의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빛을 받을 수 없게 된 나의 모습은, 지우개로 지워지듯이 그렇게 잊혀질 풍경과 같이 없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