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뺨을 날카롭게 그어 통증을 남기며 불어온다. 화사하게 펼쳐진, 푸르른 하늘과 대비되게 지면에서는 회색빛밖에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처럼 갈대는 흔들리고, 그 중간에 회색빛 흙길이 길게 뻗다 철길에 의해 막혀 있다. 그녀는 두꺼운 검은색 점퍼를 여미며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다.

 

그녀는 고요한 눈으로 검붉은 녹이 슨 철길을 고요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본다. 철길 앞에는 차폐문과 각종 제어 기기들, 그리고 표지판이 붙어있다.

표지판에는 위협하는 듯, 빨간색 배경에 굵은 글씨로 정지 표시가 쓰여 있다. 그것 때문인지 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소리치는 것을 그대로 글자로 표현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로 묵묵히 그녀는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시내로 들어가 택시를 잡았다. 차분히 목적지를 말한 뒤로 택시 안은 마치 아까처럼 쌀쌀함이 공중에서 맴돌았다. 그녀는 조용히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켠다. 잠금 화면에서 알림이 표시된다.

 

<업데이트 알림 2><문자메시지 1>

 

잠금을 풀고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니 저번 주에 지원했던 회사의 면접 최종탈락 통보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에 시선을 둔 채로 한참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한숨을 한 번 쉬고, 차창에 고개를 기대 눈을 감는다.

 

그럴 줄 알았지.

 

목을 울리지 않은 채로 입모양만을 움직여 그녀는 침묵을 말한다. 그녀는 생각을 끊으며 잠에 빠졌다.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꾼다. 마치 눈이 빨갛게 물든 것처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붉은 색처럼 보이는 꿈이었다. 풍경은 그녀가 저번에 본 갈대밭과 비슷하지만 철길은 없고 대신에 둥근 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으로 그녀는 천천히, 천천히 들어섰다. 핏빛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붉은 태양이 내리쬐는 새빨간 벤치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유일하게 흰색인 안개꽃이 지면을 수놓으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녀는 자연스레 거기 앉아 혼잣말을 한다.

 

그렇게 내가 미웠니.

 

널 좋아한 나를 그렇게나 미워했니. 널 안으면 안 되니. 널 쓰다듬으면 안 되니. 너의 입술 위에 나의 입술을 포개면 안 되니.

 

나는 너의 손을 맞잡고 그 녹음의 계절을 거닐고 싶은데.

 

어디에선가 손바닥이 날아와 그녀의 뺨을 날카롭게 때리고 지나간다. 그녀는 뺨에 손을 댄 채로 침대에서 일어난다. 꿈을 깼음에도 뺨이 여전히 아린 탓에 그녀는 뺨을 문지른다.

 

*
정오에 길을 가다가 정장을 입은 그를 그녀는 만났다. 그는 활짝 웃으며 정말 반갑다고 먼저 말을 건넸다. 중학교 시절보다 키가 부쩍 큰 그를 보고 그녀는 낯선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다 커서 더 이상 소녀와 소년이 아니게 되어 버린 거라고, 이제 그때만큼 어리지 않게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도 여전히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눈썹이 짙은, 몸이 다부지고 얼굴이 잘생긴 그를 보며 그 둘은 함께 근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지냈어?”

 

그는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응 그럭저럭”

 

그녀는 어딘가 불편한 듯 저 멀리를 쳐다본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직장 구하느라 정신없지 뭐. 너는?”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되물었다.

 

“나도 요즘 바쁘지”

 

그녀는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았다. 그는 이미 취업까지 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아챈다.

 

“너 취업했구나. 축하해”
“뭘, 그렇게 좋은 회사도 아니야.”
“그래도 부럽다.”

 

그는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너 진짜 많이 변했어.”
“내가?”
“응”
“더 못생겨졌어?”

 

그는 크게 웃었다.

 

“아니, 그냥 느낌이 약간 다른 것 같아.”
“그런가? 그렇게 치면 너도 변했지.”

 

그 둘은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같이 앉아 있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겨울 하늘 낮은 해가 머리 위에서 땅을 비추고,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은 천천히 미끄러지듯 공중을 가르며 흘러간다.

 

그는 고민한다. 그녀에게 그 말을 할까 말까 한다. 아직도 목이 가늘고 얼굴이 흰 그녀를 안고 싶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을 한켠에 가진 그는 망설인다.

 

“저... 저기”
“응, 왜?”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녀는 당황한다. 이 일을 아직도 그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그녀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짤막한 말을 하나 던진다.

 

“나도 몰라.”

 

그는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리다 말을 더 던진다.

 

“아직도 나를 좋아할 순 없는 거지?”

 

그에 물음에 그녀는 아무 답도 하지 않고 침묵한다.

 

“왜 나를 좋아할 수가 없는 거야.”

 

그는 억양이 최대로 절제된 어투로 묻는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일어서서 떠나려고 한다. 그는 그녀를 붙잡고 말한다.

 

“미안”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어깨를 들썩거린다. 얼굴이 붉어지고 고개를 숙인다. 거센 힘으로 그녀는 그의 손을 쳐낸다.

 

“난 이제 지쳤는데 이해해 줄 순 없니. 넌 나를 그저 그런 사랑 같은 욕망 때문에 만나고 싶은 거니. 너도 다 봤잖아. 내가 괴로워했던 것도 모두 봤는데. 그런데도 이해를 못해주겠니. 그렇다면 그냥 가.”

 

그녀는 서둘러 그곳에서 멀어진다. 그녀의 힘으로 힘껏 달려 그가 외치는 말로부터 멀어진다.

 

*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몸을 누인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비비고 하얀 벽지로 도배된 천장을 빤히 바라보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겨 내야지, 이겨 내야 하는데. 어떻게 아직까지도 이렇게 생생하고 괴로울 수가 있을까. 언제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이 고통을 그녀는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지 잘 모른다. 이 고통이 최초로 시작했을 때부터 그 방법을 찾으려고 그녀는 애를 썼지만 마치 불치병처럼 끈질겼기에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 그녀는 체념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갑자기 일어나 중학교 졸업사진을 조심히 꺼낸다. 오랫동안 외면해서 먼지가 잔뜩 쌓인, 톡 쏘는 화학약품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녀는 책장을 조심히 넘기면서 중학교 시절 같은 학교에 있었던 아이들, 혹은 알았던 아이들을 천천히 본다. 지금과는 다르게 아직 어린 티가 난다. 그녀는 그 사람이 있는 사진만은 건너뛰어 보지 않고 앨범을 덮고 책꽂이에 놓은 뒤에 서랍에서 원고지 묶음을 꺼낸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녀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적어 놓은 거였다. 그녀는 그걸 꺼내 처음부터 살핀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쓴 시를 묵독한다.

 

겨울 밤

 

겨울 밤
공기는 차갑고

 

나는 혼자
괴로움을 생각한다.

 

과거는 소중한데 미래는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슬퍼하는

 

긴 머리카락 찰랑이는 어린 소녀가
그 차가운 겨울밤으로 들어가고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행복한 일일까

 

겨울 밤
공기는 차갑고

 

나는 혼자
외로움을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그리 행복하지 않고

바라는 일도 일어나진 않을 테지.

 

나는 홀로 나의 양손을 서로 붙잡고
나에게 보내는 애도의 절을 한다.

 

*
그녀는 밤에 다시 꿈을 꾼다. 그녀가 어린 시절 다녔던 중학교의 복도에 그 사람과 그녀가 함께 서 있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그 사람은 그녀의 기억에 의존해서인지 어딘가 불완전한 모습이다. 그녀는 그 사람에게 달려가 안긴다. 그녀는 그 사람의 샴푸 냄새를 맡고 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말을 한다. 좋아하는데, 사귀면 안 돼? 그 사람은 그녀를 밀쳐 낸다. 저리 가. 그녀는 다시 가 그 사람의 교복을 붙잡는다. 저리 가라니까! 그 사람은 그녀를 밀쳐 내더니 손으로 그녀의 뺨을 때린다. 그 사람의 단단하고 흰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세게 치고 간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도 당황한 듯 멈칫한다. 저.. 저기 그녀는 붉게 물든 뺨을 움켜쥐고 달려간다. 그녀는 눈물을 쏟아낸다.
 

곧이어 그가 나타난다. 그는 그녀에게 고백을 한다. 좋아한다고, 언젠가부터 자신이 좋아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작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런 매력에 끌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그럼 자신을 좋아할 수 없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녀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찡해지는 코끝을 참으며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그녀는 다시 어제 꾸었던 꿈속의 갈대밭으로 이동된다. 중앙 벤치에 그녀가 앉아 있고, 그 옆에는 누구도 없다. 마치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이 느껴진다. 안개꽃은 온데간데없고 공터에는 거친 핏빛 흙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날카로운 바람이 불자 갈대들이 흔들리며 비웃듯 소리를 낸다.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귀를 틀어막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다.

 

*

커 가면서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어떤 것들을 원하고, 혐오하고, 욕망하며 결국 친구들을 잃어버리고, 사회에서 고통을 피하고 숨으면서, 나는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그래서 과연 바닥까지 가고 나면 남은 건 무엇일까. 침전하지 않도록 어떤 일이든 일어나서, 탈출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그건 너무 비현실적이겠지. 그래. 결국 나는 침전하겠지. 침전해서 그 붉은 바다의 바닥에, 갈대가 수북한 공터의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뺨을 맞겠지. 욕을 듣겠지. 그러니까, 이젠 됐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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