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인간이 희귀종인 세상에서
개념글 모음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인 손가락 끝마디가 살살 아려왔다.


송곳니에 살살 찌른다고 찌른 건데도, 아파오는 것을 보면 저번에도 그랬듯이, 생각보다 더 깊게 찔린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손가락에 시선을 줄 시간도 없이 마법진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사진에 금향이 적어놓은 대로 고쳐나가는 필리아의 손 끝을 따라, 잘못 고쳐나가는 부분이 없는 지 살펴보며 마법진의 이곳저곳을 훑어본다.


빨간색으로 빛나던 부분들은 이제 양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고, 파란색으로 빛나는 부분들이 많아짐에 따라 경고처럼 내뿜던 빨간빛도 사그라들었다.


필리아는 그런 마법진의 상태를 보면서 나름대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고,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인지 약간 주눅들은 것 처럼 보였다.


금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내가 봐주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고쳐나가지도 못했고, 아마 더 망쳐놓거나 마법진이 뒤틀려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지도 몰랐다.


만약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필리아를 도와준 게 그렇게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대신,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이 아려왔지만.


마법진을 고치는 데에 봐주는 것 말고는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상태라 조금 아쉬웠지만, 마법진에 대한 지식은 아예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고칠 수 있었어도 필리아의 마력이 아니라서 금방 들통났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슬쩍, 필리아를 곁눈질로 살펴보니 내 스마트폰을 보며 고쳐나가던 손이 어느 지점에서 멈추는 게 보였다.


거기를 살펴보니 빨간색으로 빛나는 부분들이나 파란색으로 빛나는 부분들과는 다르게, 보라색으로 빛나는 걸 보면 정상적인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필리아도 이상함을 눈치챈 것인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여기에 적혀있지 않은데다가, 뭔가 이상하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필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여태까지 봐왔던 색으로 구분하면 파란색은 정상, 빨간색은 비정상이었다면 보라색은 대체 어떤 의미인걸까.


머리를 굴려보지만, 처음 보는 색이라서 어떤 의미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직접적으로 건드려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달리 없었다. 금향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기는 했지만, 아까 전화를 걸어놓고 또 걸기는 조금 그랬다.


시간이 약간 흐르기도 했고, 아마 자고 있지 않을까. 잠에 취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염치라는 게 보였다.


눈 딱 감고, 양심과 염치를 잊고 전화를 걸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보라색으로 빛나는 부분을 쳐다보니 필리아도 그곳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건드려도 괜찮은 걸까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건드렸다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여기가 가장 핵심인 부분이라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시무룩하게 그곳을 바라보던 필리아는, 자기 뺨을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고는 태도를 바로 잡고는 그곳에 손을 갖다 댔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부분을 만져도 괜찮은 걸까, 필리아가 걱정되어 바라봤지만, 건드려도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아니, 잠깐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필리아가 손을 갖다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진 전체가 빨갛게 변하고는 방 안을 빨간색으로 가득채울 정도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눈이 아파올 정도로 발광하기 시작한 마법진의 모습에 필리아는 당황하며 여기저기 손대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마법진에 다가가 위에서 아래로 그어봐도 사라지기는 커녕 그 모습 그대로인 마법진이 보였다.


"어, 어… 이거 어떻게 할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금향에게 전화를 걸까 싶었지만, 일단은 생각나는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도 안 통한다면 그때가서 전화를 걸어도 괜찮겠지.


주머니에서 복주머니를 꺼내어 다치지 않은 손으로 비늘을 쥐었다.


파란색 기운이 손을 휘감으며, 마력을 사용할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하고는 마법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청하의 비늘에게 부탁하듯이, 마법진의 마력을 가라앉혀달라는 느낌으로 마력을 움직이니 비늘에게서 뻗어나가는 마력이 마법진의 위를 뒤덮었다.


발광하던 마법진을 청하의 비늘에서 나온 마력으로 덮어버리니, 빨간색의 빛이 파란색 기운의 밑으로 짓눌려서는 눈이 아플 정도에서 쳐다봐도 괜찮은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빛은 해결되었지만, 여전히 빨간색으로 빛나는 마법진을 보며 보라색으로 된 부분을 쳐다보니 여전히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기만 고치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제 수준으로는 고칠 수 없어요…."


"…제게 스마트폰을 주시겠습니까?"


뻗은 손은 그대로 냅두고, 다친 손으로 필리아에게 손을 내미니 내 손 위로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띄워진 사진의 핵심 부분에 금향이 적어놓은 것을 보니 마력을 이용하여 강제로 전환시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나와있었다.


마력을 어떻게 사용해서 전환시키는 건지는 모르겠다.


전환시키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가 싶었지만, 아미야에게서 아직은 배우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고, 필리아를 바라보니 고개를 내젓는 것을 보면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전환시키는 방법은 알고는 있지만, 제가 그걸 할 정도의 마력도 안 되고, 전환시킬 정도로 마력을 잘 응용하는 것도 아니라서…."


"그럼, 제가 사용하는 마력을 이용하게 해준다면, 전환이 가능하십니까?"


"마력의 양으로 강제로 전환시키는 정도라면 가능해요!"


내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먹을 불끈 쥐는 필리아를 바라보며,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른 손을 필리아에게 내밀었다.


"마력을 건네드릴 테니,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네, 네!"


조심스럽게 내 손을 마주잡는 필리아의 손은 냉동실에 들어간 것처럼 차가웠다.


시체처럼 느껴지는 차가운 손에 잠깐 놀랐지만, 그런 내 반응과는 다르게 필리아는 부끄러워하며 손을 잡고 있었다.


청하의 마력에게 부탁하듯이, 필리아가 이용할 수 있도록 마력을 움직이니 처음에는 처음으로 거부하는 반응을 보였다.


필리아가 사용하는 마력의 색은 머리색처럼 분홍색이었는데, 그런 분홍색을 거부하듯이 밀어냈다.


…청하가 내게 건네준 비늘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남들의 손을 타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필리아를 얼굴을 쳐다보니 당황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해주세요! 이대로 마법진을 냅뒀다가는 어떻게 될 지 몰라요!"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잘만 움직이던 마력이 남에게 사용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직접 마법진을 전환시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전환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렇지만, 방법이 없었다.


청하의 비늘에게 다시 한번, 이번에는 마력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청하에게 부탁하듯이 마력에게 부탁했다.


제발, 이번 한번만 부탁이니 필리아가 의도하는 대로 움직여달라고.


청하도 아니고 그 일부에 빌듯이 부탁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비늘에 담긴 마력은 내 부탁을 잠깐 생각하는 것처럼 밀어내는 것을 멈추더니, 청하의 반응처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필리아의 마력에 섞이기 시작했다.


파란색 마력이 분홍색의 마력에 섞인 채로 마법진의 핵심 부분으로 보이는 보라색 문양에 다가가더니, 문양을 비틀듯이 파고들어갔다.


강제로 뚫어내는 것처럼 전기가 파직거리며 들여보내는 것을 거부하던 보라색 문양은, 이내 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안으로 들어간 마력이 보라색 문양을 강제로 꺼버리듯이, 빛을 잃어버리고 마법진의 빛도 사그라들었다.


"…됐습니까?"


"됐, 됐어요! 성공이에요!"


"그럼, 조용히 말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방음 마법이 꺼졌으니 주변으로 소리가 다 들릴 겁니다."


"앗, 네."


방음 마법이 꺼졌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제서야 파악한 필리아는 마주 잡은 손을 풀고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한숨을 내쉬며,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다시 켜지는 건지 알기 위해 주머니에 넣었던 스마트폰을 도로 꺼내어 금향이 고쳐야하는 부분을 적어놓은 사진을 보니 거기에 마력을 흘려보내면 된다고 적혀있었다.


마력을 흘려보내라는 글에 비늘에 담긴 마력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어느샌가 비늘로 되돌아간 마력은 삐진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짜로 청하같네.


이런 곳에서도 청하를 닮은 비늘의 모습에 헛웃음이 지어졌지만, 움직이지 않는 마력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청하가 나만 사용하라고 건네준 비늘을 필리아가 사용하도록 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비늘을 건네준 적은 없었지만, 비늘에 담긴 마력을 사용하게 해주었으니.


머리를 긁적거리며, 필리아를 바라보니 필리아도 머리를 매만지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 조금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새벽에 한 번, 오늘 두 번이나 손가락을 찔렸음에도 필리아는 벌써 부족해진 것인지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내게 부탁해왔다.


막을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중지 손가락을 내밀려다가 손 모양이 마치 욕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기에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필리아도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얼굴이 굳었지만, 이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번으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열기는 주저하던 필리아는, 앙 하고 새끼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내 새끼 손가락의 맛을 음미하듯이 혀로 굴려대며 송곳니 쪽으로 옮기는 것에 그렇게 좋은 맛은 나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에서 나는 맛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짠맛이 전부 아닌가. 이물질이 묻었으면 이물질도 포함된 맛이 나겠지만.


뭐가 그렇게 맛있다는 건지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새끼 손가락을 빠는 필리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송곳니에 찔렀다.


…아, 이번에는 생각보다 더 깊게 찔렀다.


본능적으로 느낄 정도로, 새끼 손가락에 난 상처가 다른 손가락에 났을 때보다 더 크게 났다는 걸 깨달았다.


송곳니에 찔린 새끼 손가락의 상처에서 나오는 피가 주르륵 흐르는 느낌이 나며, 필리아가 열심히 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다른 손으로 제지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얌전히 손가락을 빨았다.


아기도 아니고 뭘 그렇게 열심히 빠는 건지.


피가 맛있는 건지, 아니면 손가락이 맛있는 건지 눈웃음까지 지으면서 빠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손가락의 맛이 궁금해진다.


금향이나 청하에게도 손가락을 내밀면… 아니, 생각이 점점 이상해져간다.


이것도 필리아가 가진 흡혈귀의 특성인걸까, 내가 이상해지는 걸까.


되도록이면 전자이기를 바라지만, 후자라면 참 안타까울 것 같다.


남자였을 때라면 하지도 않았을 행동을 여자의 몸이 되고 나서는 생각보다 자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내 손가락을 빤다고 했으면 질색을 했을 텐데, 지금은 필리아가 빨고 있는 것도 그러려니 하며 넘기고 있지 않나.


몇 번째로 드는 의문인,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필리아가 마법진을 다시 활성화시킬 정도의 마력을 보충하고 나서, 멀쩡히 고쳐진 마법진을 확인하고는 필리아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필리아에게 전화를 걸어본다.


"준비 끝났어요!"


"그럼, 적당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스마트폰의 너머로 후읍 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필리아의 소리가 들렸고, 나는 내 방에 들어와서 스마트폰이 아닌 벽에서 소리가 들리는 지 확인할 준비를 마쳤다.


"…후원, 감사합니다!"


빽! 하고 스마트폰에서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지만, 벽 너머로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았다.


마법진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됐습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덕분에 쫓겨나지 않을 것 같아요!"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다음엔 이런 일이 없을 거니까!"


자신만만한 필리아의 말에 불안밖에 안 느껴졌지만, 그래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제발 같은 일이 일어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