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아, 첫인상이요? 벌써 4년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나네요. 음... 아! 무서웠다? 무서웠던 것 같아요. 좋아했던 사람의 첫인상 치고는 되게 독특하죠? 하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처음 시내에서 만났을 때, 전 좀 무서웠어요. 왜 그걸 여우상? 여우상이라 하나요? 어쨌든 그랬어요. 눈꼬리가 약간 위로 치겨있어서 좀 사납다는 느낌을 받았죠. 그게 제가 4년동안 정말 사랑했던 여자를 봤던 첫인상이었어요.


학교에 입학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일학년 때 부터, 좀 적응되고 정신없이 바빴던 이학년, 그리고 그 고등학교 삼학년까지. 저는 그 사람과 같은 반, 뒷 번호로 있었어요. 일학년 때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어요. 제가 학교에 적응을 잘 못했던 이유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그 사람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거든요. 운동을 잘하는 1년 선배였어요. 그렇게 1년이 거의 다 갈 즈음,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죠.


그 선배가 그 사람을 놔두고 다른 사람과 사귀기 시작한거에요. 그날 저는 그 사람이 우는 걸 처음봤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그걸 보고 제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보고 지켜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 감정을 지각하지 못한채, 그렇게 고등학교에서의 1년이 지나갔어요. 


제가 본격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커지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였어요. 그 사람은 왜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여자애들과 관계가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학기 초에는 정말 많이 울었거든요. 소리없이 자습실 제 옆자리에서 울고 있는 걸 보고있자니, 정말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생각했죠. 이 사람이 다시는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나라도 그녀를 아껴줘야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오지랖일까 싶지만, 그때는 나름 진지했다고요. 하지만, 그때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니었어요. 그냥 계속 곁에 있고 싶다, 계속 이야기하고 싶다, 더 알고 싶다. 그런 거였으니까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각한 건 그 사람이 방학 동안 잠시 기숙학원에 간 때였어요.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한 달 동안 정말 힘들더라고요. 보고싶다, 얘기하고 싶다, 그런 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 튀어나왔으니까요. 그렇게 오랫동안 본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게 될 수 있냐고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녀의 곁에서 천천히 스며들어갔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수 없을거 같네요. 어쨌거나 그렇게 힘들던 겨울이 지나고 만난  그 첫 날, 저는 그녀가 밝게 웃고 있는 걸 봤어요. 지금까지 제가 봤던 미소 중 가장 밝은 미소였어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그 때, 그녀는 빙긋 웃으며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했어요. 잔인한 아이러니였죠. 저는 그때야 제 감정을 확신했는데. 


그래서 생각했어요. 어차피 그 사람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있으니까, 내가 잘하면 나를 한 번은 돌아봐주겠지. 그래서 전 정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어요. 20kg 넘게 살을 뺐고, 공부를 미친 듯이 했고, 프로젝트가 있으면 제일 앞장서서 했어요. 하지만-그녀는 한 번도 절 봐주지 않더라고요.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는게 어떤건지 정말 알겠더라고요. 하루하루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하는 질투. 날 봐주지 않는 그녀에 대한 원망. 그렇게 반복되는 생각 속에, 끊임없이 절망의 나락으로 하루하루 깊숙히 걸어들어가는 그런 생활을 계속했어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그럼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때라도 나를 생각해주지 않을까? 그랬죠. 그래서 전 지나가듯이, 때로는 적극적으로 그녀를 돕기 시작했어요. 보고서, 발표, 자기소개서, 정말 안해본게 없네요. 호구라고요? 그랬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개호구죠. 그때는 몰랐어요-아니,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요. 내가 그냥 이용만 당하는건가? 주위 친구들-저, 그리고 그녀와 모두 친한 친구가 그랬어요. 넌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하지만-제가 배운 사랑은 내가 가진 전부를 바치는 거였는걸요. 제가 더 뭘 할 수 있었겠어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자 그 일이 터졌어요. 그녀의 친구 중 한명과 싸웠어요. 그랬는데 그녀는 정말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저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하더라고요. 마음이 무너진다는게 무슨 느낌인지 아나요? 저는 그때 알게 되었어요. 주위의 모든 세계가, 나를 지탱하고 있던 모든게 한 순간에 사라지는 그런 절망. 그렇게 제 첫사랑은 잔인하게 끝났어요.


요즘은 어떠냐고요? 그냥 가끔 생각나요. 가끔 생각하죠.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잘 지냈내 물어볼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냥 지나칠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요. 정확히 말하면 지쳤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겠네요. 


이런 거지같은 첫사랑을 겪은 제가,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또 다시 그렇게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정말로 해결해 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