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드디어 끝났네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을 입은 여자가 말했다. 

"너무나도 긴 싸움이었소." 

은빛 갑주를 입은 남자가 답했다. 그들이 흰빛으로 두르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주위에는 온통 시체더미와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남자가 거대한 왕좌에 앉아 버티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거대한 은빛의 검이 박혀있었고, 그 주위에는 불길한 검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허나 결국 승리한 것은 우리 아니오? 이제 슬슬 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때였다.

쿠웅! 

그들이 성채가 중심부터 진동하여 무너지기 시작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소! 빨리 빠져나가도록 합시다!"

"잠시, 그 전에."

갑주를 입은 남자는 등 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왕좌의 중심에 앉아있던 자의 가슴에 박아놓고는, 길을 빠져나갔다.

"마왕의 술수임이 틀림없으니, 끝마무리는 확실히 해야하지 않겠소?"




그렇게 모든 이들이 빠져나간 대전 안에서, 가슴팍에 두개의 검이 박힌 남자는 웃었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사지로 들어가는 꼴이라니."

불길로 기름을 두르고 들어가는 자들을 보고 그는 웃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한채 죽음으로 향해가는 이들을 보고 과거의 자신을 비추어봤기 때문이리라. 성 밖으로 나간 이들은 그들이 바라던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달콤한 나날, 친구들과 치열했던 전투를 회상하며 나누는 맥주 한 잔, 보고싶었던 가족들과의 재회, 그 어떤 것도.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사랑했던 세계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허상이었으니까.

지상에 잠들어있던 망령들이 인간을 베어넘길 것이다. 바다 깊숙한 곳에 봉인되있던 해룡이 날뛰어 바다가 울부짖을 것이다. 하늘이 갈라지며 속박되어있던 용이 빠져나올 것이다. 이 세계의 중심에 잠들어있던 재앙이 부활하여 해를 집어삼킬 것이다. 어디로 도망가도 그들이 살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땅 한 조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그날은 인류의 보루이던 용사가 인류의 대적 마왕을 베어넘긴 날이었다.



대륙 모든 신전은 이 세계의 시작을 이렇게 설명한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그에 대적하는 어둠이 존재했다. 신은 긴 싸움 끝에 어둠을 몰아내었고, 세계의 경계에 자신이 가장 믿을만한 이들을 세워 어둠이 더 넘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들은 오늘도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ㅡ여기에 진실은 없다.

빛의 진영의 지휘관은 신. 어둠의 진영은 겨우 '마왕'. 그러한데, 신이 겨우 왕 따위를 이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물론 가능했다.

그 마왕을 만들어 낸 것이 신이라면 말이다.

나-마왕은 만들어진 존재였다. 정확히 말하면 변화된 존재였다. 빌어먹을 신에 의해. 아득히 먼 옛날, 신은 어둠과 맞설 전사들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우리는 의심없이 출정하였다. 신의 뜻을 받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신에 의해 마왕이 되었다.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그렇게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어둠이 되었다. 그곳에서의 일상은 간단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추방당해 이지를 잃은 신족들을 베어넘기는 것. 그것 외에 할 일은 없었다. 싸우지 않으면 어차피 죽는다. 싸우면 하루를 더 살 수 있다. 이대로 죽으면 사후에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떠돌아야 한다-신이 받아주지 않을, 타락한 영혼이었으니까.

신은 자신을 이끄는 이들에게 말했다. 저 너머의 경계에 마왕이 있으니, 그들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그들이 나의 적이고, 곧 너희의 적이니 멸절시키라고 말이다. 어째서 쓰레기 처리를 돕는 우리를 죽이라 하였느냐-이유는 간단하다. 공포만큼 사람을 잘 움직일 수 있는게 또 있던가? 신에게 있어 믿음은 곧 힘이 된다. 만신전의 여러 신은 서로를 누르고 자신이 이 세계의 유일무이한 신이 되기 위하여 인류의 공포를 부추겼다. 그럴수록 그들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 테니까.그러나 이들은 인간의 의지를 너무나 얕봤다.

신앙심인지, 혹은 그저 고향을 지키려는 의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류는 대대적인 연합군을 구성하였고, 유래없는 인류 연합군이 결성되기에 이른다. 이들은 파죽지세로 나아가 마왕성이라 불리는 곳 앞에 도달했고, 또다른 신족과 전투하고 있던 우리의 뒤를 쳐 나의 목을 날리기 직전까지 왔다. 정신없이 싸우던 신들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차례로 강신하기 시작했지만ㅡ늦었어. 내가 먼저 죽어버리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이미 2/3이상이 사망한 인류는 이지를 잃은 신족들을 이길 수 없다. 쫓겨난 신들과 함께 지상으로 내려온 고대의 존재 단 하나조차 이길 수 없다. 인류가 모조리 사망하고 세계가 파괴되기 시작하면, 이 세계를 지배하려던 신들은 그 세계 자체가 파괴되는 걸 보게 될 것이다. 

내 죽음 하나로 이렇게 멋진 결과라니, 죽을 만하잖아? 

나는 꼭두각시들의 놀음을 받아주며 천천히 옥죄어오는 죽음을 만끽했다.

세계가 천천히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