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강의 노을은 짙게 물들었다.

그 날이었다. 그 날은 유독 노을이 보라색이었다. 수원의 도심에서 나와 놀던 너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낡은 버스를 타자고 재촉했다. 버스는 KTX 선로를 지나고, 비봉의 공단을 지나고, 남양의 신도시를 지나고, 사강의 시장을 지났다. 그리고 나서 도착한 곳은,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배들만이 남아있는 갈대숲이었다.

너는 다리에 힘이 풀려 갈대숲에 주저앉았다. 나는 너의 옆에 앉아 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너는 말했다.



이 모든 건 없어질꺼야.

사랑도, 생명도, 하늘도, 땅도.

나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았어. 날 버린 사람은 너무도 많아. 그리고 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지.

난 걔한테 모든 걸 줬어. 걔의 달콤한 말에,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지. 남양 시골에서 공부만 하던 촌년은, 그렇게 입에 발린 사탕같은 말에 녹아버렸지. 나는 걔의 모든 게 좋았어. 걔의 엉뚱한 면도 좋았고, 똑똑한 면도 좋았어. 얼굴이 딱히 잘생기진 않았지만, 걔의 귀여움이 좋았어. 걔가 손 잡자고 하면 손 잡아주고, 안고 싶다고 하면 안아주고, 키스하고 싶다고 하면 키스해줬지.

걘 인계동에서 술을 마실때마다 난폭해졌어. 평소에는 멀쩡하던 걔는 술만 먹으면 나를 때렸어. 하루는 모텔에 가서 술을 같이 마셨는데, 침대에 속옷만 입고 누워있던 나에게 술병을 던졌어. 소주병은 산산조각났고, 내 몸에 박혔어. 여기, 이 상처들을 봐. 이젠 아쉬울 것도 없으니까. 내 다리에서는 피가 나고, 내 가슴에서도 피가 났지. 이불은 빨갛게 변해갔고, 나는 그렇게 기억을 잃었어.

그 다음날 눈을 뜨니까 병원이더라고. 내 옆에는 걔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어. 한 번만 봐주라는 걔의 말에 나는 미친년마냥 알겠다고 했지. 그리고 걔의 차를 탔어. 집에 데려주겠다고 한 걔는 갑자기 나를 이곳으로 끌고 왔어. 그러고서는 나를 여기 가드레일에 묶었어. 나 하나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했대. 나만 안 만났더라면, 자기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너가 너무 싫다고 그랬어. 나를 계속 때리던 찰나, 저쪽에서 어떤 아저씨가 오시니까 걘 자기 차를 타고 달아났어.

그 아저씨가 남양에 있는 큰 병원에 데려다줬어. 갈비뼈가 3개나 부러졌댔어. 걘 이미 도망간 뒤였고. 경찰은 나한테 계속 의미없는 질문만 계속했어. 한 달이 지나니까 연락이 왔어. 걘 카자흐스탄으로 도망갔으니까 포기하라고.

그래서 난 이제 너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어. 어머니는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야. 난 이제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노을빛이 유난히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그날, 너는 바다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고, 파도는 너를 삼켰다. 너가 사라진 그 해변에는, 버려진 소주병의 파편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