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 4장 보러가기


"피곤해서 깜빡 잠든 거야. 내가 일부러 안 받은 게 아니라..."

"어련하겠냐? 전쟁 터져서 쫄쫄 굶을 때도 깜빡 졸아라? 어!"


사실 라면은 교무실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교무실 가서 남는 거 달라고 하면 되는 거였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질대로 날카로워졌고, 교무실까지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닥치자 드디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럼 대원이한테도 꼼짝말고 여기 있다가 받아놓으라고 말을 하던가! 왜 맨날 나만 가지고 들들 볶아! 대원이는 나가서 지 친구들이랑 놀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꼬박 라면만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니가 잘못해 놓고 누구더러 큰 소리를 쳐? 니가 누나잖아! 엄마 아빠 없으면 네가 대원이 돌봐야 하는데 엄마 아빠 만약에 없어도 왜 내가 다 해야 하냐고 그럴 거야?"

"엄마는 아들만 맨날 업어키우고 나는 딸이라고 무슨..."

"내가 언제 너랑 대원이랑 차별했어? 대원이가 오빠였으면 내가 대원이더러 타놓으라고 시켰겠지!"

"아 그럴 거면 대원이를 먼저 낳지 그랬어! 나 누나 같은 거 하기 싫어!"

"누나 하기 싫으면 너 혼자 나가서 살어! 가뜩이나 쪼들리는 형편에 나도 대원이 하나만 키우면 편하고 좋으니까!"

"그래!"


말하다가 자기 혼자 감정에 북받쳤는지 연희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명자는 그런 연희를 쳐다도 보지 않는다. 교실 안의 사람들은 그런 두 모녀를 쳐다본다.


"연희 엄마. 연희가 어린 마음에 내심 서운했던 거 아니야?"

"서럽긴요. 나는 저만한 나이에 엄마 논에 나가시면 집에서 남동생 둘이랑 여동생 하나를 업어 키웠어요. 저렇게 철이 안 들어서 나중에 애미 노릇이나 제대로 할런지..."




사근동에서 지대가 높은 지역은 비교적 낙후된 지역이다. 사근동에서 좀 산다는 사람들이 사는 저지대는 다 잠겼지만 오히려 정말 못 사는 산동네는 무사했다. 사근동 속 두 동네의 운명이 절묘하게 갈렸다.


연희는 사근동교회 뒤쪽 언덕으로 나와 쭈그려 앉아 잠긴 동네를 쳐다본다. 큰 길이었던 곳에 물이 차서 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사는 이 곳이 베네치아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 난리 중에도 웃음이 나온다. 기분이 좋아지려고 하는 중에 찬물을 끼얹듯 한 순간에 몰아닥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머, 완전히 다 잠겼네."


고지대에 사는 몇 안 되는 부잣집 아이들이다. 그 중에는 연희와 같이 과외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없는 형편에도 명자의 교육열은 대단해서 그런 부잣집 아이들과 같이 과외를 할 정도였다.


"어? 너 연희 아니야?"


연희는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고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떡진 머리와 엉망이 된 차림새 때문에 급히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동네는 다 잠겨서 물 위로 남은 지역이 얼마 되지 않았다. 엄마도 피하고 싶고 부잣집 아이들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아서 어딘가에 피하고 싶어도 섬처럼 고립된 좁은 지역에서 숨어있을 곳은 없었다.






"우리 애들 아버지 못 보셨어요?"

"같이 피난 나온 거 아니야?"

"아니예요. 새벽에 잠깐 갈 곳이 있다고 혼자 나갔는데 그러고 대피방송 나올 때까지 안 들어와서 일단 우리만 나왔어요. 그 이도 이리로 대피했을 줄 알았는데 여기도 안 보여서..."

"연희네가 찬석네랑 가깝잖아. 연희네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연희 엄마! 찬석 아버지 봤어? 집도 가깝잖아."

"아니? 못 봤어. 우리야 정신 없이 나와서 가게로 나갔는데 그 길목에서도 못 본 것 같아."

"연희 아버지, 찬석 아버지 봤어?"

"나도 못 봤지."

"어, 어떡해요..."

"찬석아, 걱정 말어. 여기로 못 왔으면 한양여고 쪽으로 갔겠지. 물 빠질 때까지만 좀 기다려 봐."


홍수에 길이 막혀 사근국민학교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반대편인 한양대학교나 한양여중고 쪽으로 올라갔다. 연희가 나가고도 세 시간 동안 찾을 생각도 안 했지만 혹시 나갔다가 무슨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닌가 싶어 내심 불안해진다.


"날도 이런데 얘는 어딜 돌아다니는 거야..."






폭우가 그치고 날이 갰다. 구름이 걷히니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가 나온다. 저녁이 되도록 연희는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연희 아버지. 나가서 연희 좀 찾아봐."

"나는 쌀 지키고 있는데 당신이 나가서 찾아 봐."

"당신은 애 아버지가 돼서 애가 들어오던 말던 관심이 없어?"

"연희 어디 갔어?"

"참 일찍도 물어보네. 아까 나랑 싸우고... 아니다. 이런 날 애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뭔 정신으로 사는지 원..."

"그럼 당신이 쌀 보고 있어. 내가 찾아오지."

"됐어. 내가 가서 찾는 게 낫지."


"연희야! 연희야!"

"아줌마. 안녕하세요."

뒤에서 연희랑 같이 과외하는 영재가 인사를 한다.


"어. 영재구나."

"연희 찾으세요?"

"응. 연희 봤어?"

"연희 지금 교회 뒤에서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요."

"응. 그래. 고맙다."

"아줌마도 피난하셨어요?"

"응. 너희 집은 안 잠겼겠구나?"

"네."


교회 뒤쪽으로 가니, 떡진 머리를 하고 친구들과 놀고 있다. 아이들에게 물난리는 그저 몇 년에 한 번씩 오는 동네 축제 같은 건가 보다.


"연희야!"

"야. 너희 엄마 오셨다."


"흥. 대원이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면서?"

"이런 날 엄마가 신경 쓸 데가 얼마나 많은데 너까지 왜 엄마를 신경 쓰게 해? 그냥 좀 얌전히 있으면 안 되겠어? 일단 돌아가자. 좀 있으면 물 빠질 거야. 곧 집으로 돌아가야지."


언덕 아래를 보니 정말 물이 많이 빠졌다. 피난했던 사람들도 하나하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원이만 예뻐하는 집에는 왜 돌아가?"

"엄마 진짜 화내기 전에 그냥 따라 와."

결굳 연희는 마지못해 명자를 따라간다.


"엄마가 대원이만 위하는 것 같았어? 언제?"

"맨날 대원이는 가만히 있구, 나만 시키구."

"그건 네가 더 믿음직스러워서야. 대원이는 뭐든 아직 미숙해서 엄마가 뭘 시켜놔도 마음이 안 놓이는데 너는 그래도 좀 낫잖아. 엄마는 아들이고 딸이고 똑같아. 그리고 너는 내 첫 아이잖아. 첫 아이는 처음이라 서투르고, 애틋하고 그래. 막내는 날계란 같이 그냥 놔두면 데굴데굴 굴러 떨어져서 깨지지 않을까 싶구."


믿음직스럽다는 말에 어린 연희의 마음이 그나마 좀 풀린다. 아무 말 없이 명자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간다.






물이 다 빠진 거리는 처참했다. 온 동네 바닥이 진흙뻘 바닥이다. 피난할 때 들어온 길을 도로 빠져나오면서 벽에 뻘이 덕지덕지 붙은 가게와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쌀집도 이렇게 되어 있을 광경을 생각하게 되어 고개를 돌려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한다.


쌀집 앞에 이르니 아니나 다를까 진흙투성이다. 그래도 가게는 안쪽의 골방을 제외하고는 벽지를 바르지 않아서 물만 뿌리면 좀 낫다. 문제는 이 안의 벽지와 살고 있는 집이다. 도저히 집의 상황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없는 형편에 도배업자를 부르면 앞으로는 하루에 두 끼만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직접 바르기엔 오늘은 너무 힘들다.


"오늘은 일단 가게에서 자자."

"에? 집에 안 가?"

"오늘은 엄마가 피곤해서 도저히 집은 정리를 못 하겠다. 여보 일단 가게부터 청소합시다."


모레부터 학교가 다시 열리기 때문에 가게를 빨리 청소하고 쌀을 다시 가져와야 했다. 혹자는 물난리가 나고도 금방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산다고 신기해 하겠지만 상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운명은 그렇게 그들을 채찍질했고, 숨 돌릴 틈도, 눈물을 흘릴 틈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강해졌고, 억세졌다.


급한대로 가게의 진흙 찌꺼기를 물로 청소하고 쌀을 들여놓는다. 큰 대야 옆으로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덮는다.


"내일은 우리 꼭 집에 돌아가자."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간 집은 도저히 그간 살던 집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집 안에 있는 가구들을 완전히 다 버려야 했다. 신혼 때 가져온 장롱은 몇 번의 물난리에도 그냥 닦아서 쓰곤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썩어 쓸 수 없게 되었다.


"이거 엄마가 살아계실 때 해주신 건데..."

"테레비도 당분간은 못 보겠다."

"아빠. 테레비 못 봐?"

"응. 그래도 아빠가 금방 돈 벌어서 우리 대원이 태권보이 보게 해줄게?"

"태권보이 아니구 태권브이. 학교 가면 애들이 다 그거 얘기하는데 나만 쭈구리된단 말이야."


아들의 칭얼거리는 보다 못한 명자가 한 소리 한다.

"이 놈 새끼 똥 싸고 있네. 지금 동네가 물바다가 돼서 다들 테레비 내다 버리는데 너만 태권브이 못 보겠냐?"

"그래두..."

"아빠가 금방 사줄게. 약속."

"약속."






"어서 오세요. 아주머니."

명자가 순화식당의 주인 아주머니와 옆에 얼굴의 흰 아가씨 한 명을 맞는다.


"아이고, 물난리 난지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금방 열었어."

"물난리 나서 이거저거 다시 사고 도배도 새로 한다고 돈 많이 땡겨 써서 열심히 벌어야 해요. 하하하."

"우리는 모레나 돼서 열려구."

"근데 옆에 계시는 아가씨는 누구?"

"아, 새로 들어온 우리 순화 색시."

"아~ 며느리가 곱게 생겼네. 신랑하고 신부가 둘 다 선남선녀네? 하하하하하. 신랑이 잘 생겼으니 얼마나 좋아요? 하하하."

"인사하렴. 여기는 세민쌀집 연희 엄마."

"안녕하세요."

"얼굴이 흰 게 도시 사람 같은데, 서울 사람이여?"

"충청도 영동이예요."

"영동이면? 우리 연희 아버지도 영동 사람이여. 연희 아버지 이리 나와 봐."

"왜? 아, 오셨어요?"

"여기 이 사람이 순화식당 큰 며느린데, 영동 사람이래."

"영동 어디요?"

"추풍령이예요."

"나는 황간이요. 여기서 동향 사람을 다 만나누만. 하하하."

"동향 사람이니까 우리 며느리 좀 잘 돌봐주구려. 얘가 숫기가 없어서 누구한테 영 말 붙이지를 못 해. 연희 엄마가 좀 잘 지내줘. 얘야. 너도 어려운 일 있으면 세민쌀집 와서 부탁도 하고 그러렴."


없는 형편이지만 명자도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좋다고 받아들였다.


"어, 그리고 앞으로 우리 식당에 쌀 대는 거 세민상회가 해줬으면 하는데."

"아이고~ 아주머니 덕분에 우리가 살아요. 하하하. 근데 전에 대주던 쌀집은 갑자기 왜?"

"아 글쎄, 우리가 쌀값을 떼먹었다고 하질 않나. 내가 그럴 사람이야?"

"그 집 주인 노망난 거 아니야? 하하하하하."


"그럼 난 이만 돌아가네."

"예~ 살펴 가세요."

한참 수다를 떨고 나니 하늘은 황혼에 저문다.


"당신도 참. 아 우리 살림에 누굴 도운다고 덥썩 그런 말을 해."

"아니, 우리한테 인자 쌀 맡긴다고 하기도 했고, 새댁 소개시켜 주는 자리에 '아니요. 우리 먹을 것도 없어요.' 이럴 수는 없잖아. 그리고 우리도 남들한테 도움 많이 받았으니까 우리도 같은 동네 사람끼리 돕는 게 순리지."


'착하고 여린 사람은 패자, 악하고 계산적인 사람이 승자.'라는 말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세민상회 내외는 항상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들에게도 그들이 보인 진심이 항상 보답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진심을 배반당한 때도 많았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할 줄 안다는 것은 분명 그들의 인생에 큰 복이 되었다. 진심을 다할 줄 모르는 사람 곁에 타인은 많을지 몰라도 진심으로 다가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분명 진실된 나의 사람은 남기 마련이다. 신뢰가 쌓였고, 친구가 되었고, 가족이 된다.


회광반조 6장 이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