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얀 꽃잎이 흩날리고 청아한 바람이 부는 핏빛 하늘 아래의 절벽에서 나는 아직도, 그녀와 기적처럼 닿고있었다.

 

 찌르르릉 하는 알람시계소리가 나를 깨운다. 나는 요새 별 희한한 일을 겪고있다. 벌써 세 달째 나는 어째선지 비슷한 꿈만 꾸고 있다. 젊어서 나는 사주니 굿이니 하는 초자연적인 일에 신경 쓰는 일이 무식하기 따로 없는 짓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런 것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기대왔던 것들이 점점 사라져가는 탓이겠지. 뭐 그런 심오한 불안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최근 받은 건강검진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한 것과 지인들이 말하는 무속적 경험같은 이유들 도 그 무식한 불안과 관련되어 있었다.

 

"또 같은 꿈을 꿨어."

 

 정년이 다가오면서 점점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생기자. 대학교 때부터 관계를 이어온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늘었다. 돼지기름 냄새와 독한 소주향이 진동을 하는 고깃집에서 만나 항상 하는 이야기는 퇴직 후의 노후계획 대학생 때의 이야기 그리고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침 그런 소재들도 질리기 시작해서 나는 최근 나의 고민을 화두에 올렸다.

 "신기하네 그게 언제부터 그랬다고?"

 "세 달 전부터."

 "또 또 실없는 구라를."
 
 대기업에 취직한 지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던 녀석이 자신의 자랑질이 방해받자 유치하게 시비를 걸며 툴툴댔다.

 몇 년 전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녀석이 소주를 한잔 들이키고 홍합탕 국물로 속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

 "야 그런 것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마라.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일주일동안 같은 꿈만 꾸셨다고."

 술상에서 단 둘이서만 속닥거리던 녀석들도 내 고민에 관심을 가졌는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근데 꿈 내용이 뭔데? 혹시 아냐 엄청난 길몽일 수도 있잖냐. 그, 누가 그랬는데 요 근처에 그렇게 용한 점집이 있데 한 번 가봐."

 점집이란 말을 꺼내자마자 녀석들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내 팔 다리를 잡고 억지로 끌어내려서 종로 골목 어귀에 자리한 점집의 무당 앞에 던져다 놓았다. 실로 보니 무속인의 분위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밤 열시 외진 골목의 고요한 공기 가운데에도 무속인을 보기만 하면 누가 내 바로 옆에서 꽹과리라도 두들기는 듯 한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티비에서 간혹 나오는 무속프로그램과는 차원이 달랐다. 화려한 색상의 한복을 입고 눈을 부릅 뜬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미지의 곳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해몽은 20."

 말도 꺼내기 전에 그녀는 나의 고민거리를 알아챘다. 그 용함에 나는 소름이 몸에 쫙 돋치며 두려움을 느꼈으나 친구란 녀석들은 마술쇼를 본 것처럼 박수를 치면서 놀라워하며 신나있었다. 나 또한 그녀의 신통함에 입과 지갑이 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용을 지불하고 나와 그녀는 친구들을 쫓아내고 해몽을 시작했다.

"하아 여자네 아가씨야 19살? 그 정도 먹었나. 아 아닌데 애초에 이게 나이를 먹는 것인가? 좀 특이한 케이스라 힘들구만 아는 사람이야?"

"아뇨 기억에 없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저를 아는 눈치더라구요. 제가 꿈 속에서 자다가 깨어나면 그녀는 도망치듯 어디론가 가버리고 그 순간 딱 알람소리가 울리면서 꿈이 끝나버립니다."

"일단 확실한 것은 나쁜 꿈이 아니야.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지 그런데..."

"네."

"그럴리가 없는데, 잘 기억해봐. 사실 이상한 것은 바탕이야. 바람이 불고 하얀 국화밭이 피는 새빨간 하늘 아래의 낭떠러지. 흉한 것과 길한 것이 공존해있어 풀이 하기 참 어려운 케이스야."

"저 그럼 이 꿈을 그만 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미안하지만 아마 해결책은 꿈 속에서 당신이 찾아야 해 여자랑 대화라도 시도해봐. 이 정도로 끈질기게 찾아오는 녀석은 섣불리 쫓아내면 해를 끼칠 수가 있으니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돈은 돌려주겠네."

 점집에서 빠져나오면서 친구들은 이렇다 할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한 무속인을 사기꾼이라며 비웃었다. 그 뒤로 우리는 당구장에 들러 게임 몇판 하고 각자 집으로 해산했다. 그들의 반응에 동의하는 척 했지만 사실 나는 그녀가 사기를 친다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의 그런 눈을 보면 그런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해답을 꿈 속에서 찾으라니, 꿈이 아무리 생생하다지만 어떻게 나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집으로 돌아와서 반겨주는 것은 언제 찍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가족사진과 텅 비어버린 56평의 빈 공간. 작은 애들과 와이프는 큰 애가 유학을 가게 되면서 미국으로 따라나섰다. 나는 흔히 말하는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되었다. 외롭냐고? 아니, 전혀. 어차피 애들 엄마와는 오래전부터 각방을 쓰며 지내왔고 주말까지 빼앗는 지독한 업무 덕에 자식들과의 대화는 전혀 없었다. 아 그렇지 그 녀석들은 용돈 달라는 말이라면 곧 잘 했었다. 잘 된 일이지. 이제 집 안에서 담배를 피워도, 드라마 시간에 야구채널을 틀어도, 술에 찌들어 밤늦게 들어와도 잔소리 하는 사람은 없다. 필요할 때만 지어내는 가증스러운 아부들도 듣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들이 괜찮았다. 그래, 괜찮아.

 새벽 4시의 공기는 알코올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아니, 내가 술을 마셔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평범히 있을 때에도 그렇게 느껴진다. 아주 조금 거슬리는 습도와 기분 좋게 찬 온도는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사람을 알딸딸하게 만들어 기분 좋게 한다. 새벽 공기를 갈비뼈가 올라가도록 가득 들이쉬어 취하고 넥타이를 대충 풀어 던지고 라텍스 침대에 몸을 맡겼다.

 오늘도 또 같은 꿈. 나보다 한참 어린 여자의 무릎을 베고도 잘도 곤히 잠들어있다. 흰 국화 밭의 아가씨 그 순백의 순수함 사이에 옥에 티라면 바로 나 오십을 넘어 나아가는 냄새나는 아저씨가 분명했다. 가끔은 무언가 말하려고 생각은 해봤으나 나는 내가 생각하는대로 움직이는 꿈속의 나는 들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무속인의 말도 들었겠다. 속는 셈치고 말을 걸어본다.

 "너는 대체 누구야?"

 깜짝 놀랐다. 정말로 나의 의지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이게 자각몽이라는 거구나.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나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소녀는 큰 눈을 희번뜩 뜨더니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내 곧 내 머리를 내던지듯이 무릎에서 치워버리곤 도망가기 시작했다.

 "미안해 지금은 안돼."

 커튼을 치는 것을 잊버려서 안면을 직격해 오는 늦봄의 따가운 햇살 그리고 고막을 때리는 알람소리와 함께 나는 잠에서 깼다. 지금은 안된다니 무슨 의미일까? 그럼 대체 언제 뭐가 된다는 말이지? 대체 그 아이는 누구지? 애초에 만난 적이 있나? 숙취의 탓인지 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보니까 물 다 떨어졌었지.'

 홀애비란 이런 법이다. 나는 싱크대의 수돗물을 틀어 컵에 따르지도 않고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염소향이 나는 소독약 맛이 느껴지는 것이 찜찜했지만 귀찮으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그 여자아이가 누군지 찾기 위해서 서재로 향했다. 인생 처음으로 졸업앨범들이 쓸모가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한 때엔 버리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호통까지 치시며 말린 경험이 있었기에 초, 중, 고 모두 보관 중이었다. 손이 닿지 않는 책장 맨 위에 나란히 모셔둔 그것들을 만지자 손 끝에 어마어마한 먼지들이 손 끝을 검게 오염시키며 묻어나왔다. 이사를 다닐 때를 제외하곤 30년 넘게 건드려본 적도 없었으니까 먼지 외에는 꽤 잘 보존된 상태였다.

 문제는 무수한 초, 중, 고 동창들 중 사이에서 누가 그녀인지 찾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 중에 그녀가 있으리라는 것도 확실치 않은 상태이다. 전학이나 자퇴  등의 이유로 앨범에 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뭐, 별 수 있나."

 순간 그만두려 생각했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솔직히 처음 이 꿈을 꾼 날은 기분이 좋았다. 비록 꿈일지라도 소녀의 무릎을 베고 잠드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경험을 한 그 날은 그야말로 계탄 날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벌써 세 달째이다. 내가 무속인을 찾아간(친구들의 억지도 있긴 했지만.) 이유도 세 달 동안 같은 꿈만 꾸는 것에 묘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 정체 모를 아가씨를 나의 조용한 잠에서 쫓아낼 시기가 온 것이었다.

 꿈 속의 소녀는 중, 고등학생 쯤 되어보였기 때문에 초등학교 앨범은 바닥 아무 데에나 팽개쳐두고 먼저 중학교 앨범부터 열어보았다. 앨범을 받고 30년만에 다시 열어본다. 나는 30년이나 이 앨범이 학생들의 돈을 뜯어내기 위한 쓰레기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부터 그 생각이 아주 맞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사람 한 명 한 명의 사진을 볼 때 마다. 가슴의 어딘가가 소용돌이 치듯 무언가들이 뒤섞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들은 다들 잘 살고 있을까?

 귀찮을 것 같던 졸업앨범의 확인은 체감 상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졌다. 앨범을 버리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던 어머니의 말씀이 이제서야 이해가 됐다. 잊고 있던 즐거웠던 날들이 폭죽이 터지듯 머리 속을 순식간에 채워간다.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문제가 생겼다. 중학교 앨범을 전부 뒤져보았지만 어디에도 소녀의 얼굴은 없었다. 대체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고등학교 앨범이 남아있긴 했지만 거기에 그녀가 있을 것이라곤 예상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꿈일 뿐인데, 게다가 세 달이다. 세 달이면 소녀가 지인이건 혹은 귀신이건 자기가 질려서라도 알아서 포기하겠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나는 구르듯 거실 소파로 향한 다음 바닥에 널부러진 리모콘을 각질이 하얗게 진 엄지발가락으로 열심히 조작하여 야구 중계 채널을 틀었다. 나의 몇 안되는 힐링 중 하나, 기러기 아빠 최고의 위로. 이거 하나로 나는 이 거지 같은 인생을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가장은 피곤한 법이다. 이렇게나 좋아하는 야구를 보고있더라도 일주일 내내 업무로 지친 피곤은 이길 수가 없다. 시원한 캔맥주도 탁자에 꺼내놨는데 마시면 잠이 팍 깰텐데 집으러갈 힘도 없다. 눈 앞의 2회 초 스코어 2대0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깜빡 깜빡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한다.

 또 그 소녀였다. 그 반복의 익숙함도 잠시 이번엔 묘한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소녀가 있고 내가 소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있다는 설정은 변하지 않았다. 바뀐 것은 배경이었다. 절벽 위에 생긴 국화밭이 아니라 놀이터였다. 그리고 그곳의 정자에 나는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있었다.

 "여기 기억하니?"

 꿈속의 나는 화들짝 놀라 침을 후르르릅 삼키며 소녀의 무릎베개에서 벌떡 일어났다. 3달 내내 내가 말을 걸기만 하면 도망치던 소녀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전개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고 간신히 고개를 도리도리 좌우로 흔드는 것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가 있었다.

 "그래, 오늘 저녁은 치킨 어때?"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나는 입을 연신 뻐끔거리다가 겨우 고개만 사십오도로 갸우뚱 움직였다.

 "이제 갈게."

 눈을 떴더니 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은 야구 스코어였다. 스코어 4대5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역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런 명경기에 치킨은 빠질 수가 없지. 그런데 그녀가 치킨을 시켜먹으라고 말했던 것은 이 명승부를 예상해서였을까? 어쨌거나 잠시라도 경기를 놓치는 것이 불안해서 나는 이리저리 달려다니며 집 안의 전단지를 찾아다녔으나 서랍에도 냉장고 앞에도 전단지는 그 자취조차 없었다. 

 "꼭 필요할 때에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하는 수 없이 1층에 있는 전단지 꽂이판을 찾아가려는데 현관문을 열자 운 좋게도 동네 치킨집 전단지가 문에 붙어있었는지 천천히 지그재그를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원래는 브랜드치킨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나 이 치킨집에서 치킨을 배달시켰다.
 
 후라이드 치킨 한마리를 배달시키고 나는 급한대로 소파에 풀썩 몸을 던졌다. 그런데 그녀와의 대화는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나의 시선은 언제부턴가 스트라이크 존이 아니라 반지모양으로 파랗게 빛나는 전원버튼을 향해 가있었다. 

 결국 나는 티비를 껐다. 그러고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가져와 소파에 정좌하여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의 기억이 굉장히 끊어진 여러장의 사진같은 느낌이라면 고등학교의 기억은 비교적 짧은 동영상같은 느낌이든다. 이름이 가물가물한 녀석은 찾기 힘들었다. 얼굴만 보면 그 사람의 이름은 절로 따라왔다. 확실히 이 때 나는 가장 행복했었다. 그들의 이름을 되뇌이는 것 그 작은 행동으로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치킨 배달왔습니다."

 숨이 많이 가쁜 듯 문장은 끊어져서 들려왔다. 중간중간 섞인 쇳소리가 남자의 나이대를 알려주고 있었다. 

 "아, 예 가요!"

 나는 현관문을 열고 그대로 멈춰버렸다. 배달원이 내미는 치킨을 받지도 않고 왼손은 문고리를 잡고 오른손은 벽을 짚은 채로 서있었다. 조금 많이 피부가 타고 선이 굵은 팔자 주름이 생겼으며 손가락 마디마디가 두꺼워졌지만 나는 이 얼굴이 누군지 바로 알아봤다. 왜냐하면 방금까지 나는 이 남자의 30년 전 사진을 보고있었으니까. 이러는 내가 답답했는지 남자는 조금 커진 목소리로 나를 재촉해왔다.

 "손님 치킨 받으셔야죠."

 치킨을 시켜먹으라고 했던 것은 이 재회를 노리고 한 말이었나?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짓을 꾸미는 걸까. 지금 만약 그녀가 나오는 꿈이 길몽이냐 흉몽이냐 묻는다면 나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흉몽이라 답할 것이다. 그만큼 나는 이 남자와의 재회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더 이상 내가 기억하는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현수, 녀석은 그때 한참 유행하던 샤기컷에 샛노란 염색을 고수하던 날라리였다. 바리깡을 들고 쫓아오던 담임에게서 전속력으로 도망치던 모습이 그가 책상에 앉아있던 기억보다 더 선명하다. 확실히 불량한 아이였지만 친구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던 노래를 잘 부르던 현수. 내가 웃으며 반가워하던 사진 속의 현수였다. 현수는 당연하게도 변했다. 평범하게 잘생긴 얼굴은 그냥 평범해졌으며 노란 머리카락은 온 데 간 데 없이 여느 아저씨처럼 이발소에서 짧게 깎은 검은 머리털만 남았다. 기타 줄에 골무라도 씌운 듯 투박해보이던 손 끝은 부드러운 살이 돋았다.
 음악과 어깨를 나란히하던 현수는 기억 속으로 사라진 듯 하다.

 이제는 그가 내가 가장 갖고싶던 것을 손에 넣고싶던 것을 갖고있는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글 끝까지 모른 척하려했다.

 현수는 혀를 쯔쯔 차며 멍청하게 서있는 나의 품에 치킨과 콜라를 밀어넣었다. 

 "준혁아 계산해야지."

 어찌해야 했을까, 나는 이 상황에 아무말도 아무행동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선 많은 문장들이 검은 실처럼 풀리더니 뭉치의 형태로 얽히고 섥히기 시작했다. 현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었다. 얼굴이 벌개지고 목 구멍이 꽉 막혀서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배달가방을 챙겨가는 현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 손에 들린 만 오천원을 낚아채고 현관문을 열었다.

 "여기 쿠폰 받으시고. 다음에도 꼭 저희집으로 시켜주세요."

 그가 나가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려 거실 탁자위에 콜라와 치킨박스를 올려놓았다. 그의 실수였을까 손에는 두장의 쿠폰이 들려있었다.

 
 "준혁이 이 새끼야 또 혼자 먹냐?"

 천원짜리 단팥빵 봉지를 뜯으려 검지와 엄지를 맞댄 손모양이 풀렸다. 현수가 시야가 흔들릴 정도로 세게 뒷통수를 가격한 탓이었다.

 "쫌, 부르기만 하면 되잖아 아프다고."

 나는 눈썹 사이를 잔뜩 좁히고 그를 째려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뒷통수에 손을 가져다 대보니까 살짝 부어오른 듯한 느낌도 났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현수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 도는 나를 걱정해서 점심시간은 꼭 나와 밥을 같이 먹어주는 상낭한 녀석이니까 뒷통수 한대 쯤은 내줄 법 했다.

 "새끼, 엄살피우긴 겁나 갖다 대기만 했구만."

 현수는 이래저래 반에서 튀는 녀석이다. 교복 마이는 어디에 가져다 팔았는지 그것 대신에 어깨에 커다란 징이 여러개 박힌 라이더 자켓을 걸치고 다녔다. 머리는 또 눈을 가릴 정도로 길게 기르고 고구마색 비슷한 노란색으로 염색을 했다. 또 꽤 잘 생긴 외모로 인기도 많은 편이었는데 이런 녀석이 나같이 조용한 녀석과 같이 있는 것이 처음엔 부담스러웠으나 익숙해지자 고마움은 커져가고 있었다.

 "오늘은 야자 해야지 현수야."

 현수의 왼쪽 어깨를 있는 힘껏 치며 말했다. 연약한 주먹에 나만 고통스러울 뿐이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야자는 무슨 나는 가수할거잖아."

 "가수는 공부하지 말란 법 없잖아."

 이번엔 현수가 나의 오른쪽 어깨를 툭 밀치고는 나를 향해 씩 웃었다.

 "야 임마 공부 잘 하는 놈은 펜 잡고 노래 잘 하는 놈은 마이크 잡아야지."

 현수는 악보가 잔뜩 들은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쳐멨다. 나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보이고 교실 밖을 향해서 질주할 때 휘날리는 금빛의 머리카락이 부러웠다. 그저 교실 안에서 차가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뿐이었던 나는 그가 되고싶었다.


 느닷없이 교실 배경이 사라지고 소녀와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운 나와 흰 국화가 잔뜩 핀 절벽이 나타났다. 달콤한 회상을 베개로 삼아서 잠들었던 것일까, 이제는 꿈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그 시절에 닿고싶어서 나는 그녀의 무릎베개를 끌어안고 울었다. 

 "어쩌자고 현수를 부른 거야 나는 그런 현수를 바란 것이 아니었는데, 왜 너는..."

 소녀는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또렷해져갔다. 흰 국화와 같은 피부에 가을밤의 바닷가처럼 아득한 눈동자를 가진 소녀를 나는 분명히 만난 적이 있었다.

 "안녕, 허준혁 저를 기억하고있나요?"

 배경은 벚꽃나무가 있는 밤의 놀이터로 바뀌었고 그녀의 옷은 하얀 원피스에서 통이 넓은 무릎 한쪽이 찢어진 데님팬츠와 박시한 핏의 붉은 칠부 반팔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캔맥주, 그것이 확실히 기억났다. 내가 사다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기억났다. 이름 모를 소녀, 그때도 지금도 이름은 알지 못한다. 내가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름같이 희미한 것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녀를 지칭하기 위한 확실한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랑한, 사랑했던 사람. 이름 모를 소녀였다.

 "이제 기억하시나 봐요. 저에요 저. 음 이름은 말하지 못하겠네요, 이건 꿈이고 어차피 저는 당신 깊은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 정보일 뿐이니까요."

 "못말하지 들은 적도 없으니 그런데 정보라니 딱딱한 표현 쓰기는 넌 확실히 걔가 맞네."

 "헤헤 오랜만이에요 허준혁."

 성까지 붙여서 말하는 이상한 말투와 눈 밑에 점을 가진 그녀를 보아하니 나는 꽤나 기분 나쁠 정도로 그녀에 대해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나도 너는 현수를 위해서 찾아온 거지?"

 "어 아니요! 분명 현수씨를 위해서 온 건 맞지만 당신을 위해서기도 해요."

 "참나 기특하기도 하셔라 정확히 우리의 뭘 위해서 왔는데?"

 "저 여기서 다시 현수씨의 노래를 듣고 싶어서 왔어요! 현수씨 노래 엄청 잘 부르잖아요. 더해서 잘생기기까지했고 아 생각할수록 최고네요 이 남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술배가 잔뜩 튀어나온 지금의 현수가 통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목까지 이어지려는 턱수염 자국이 남은 그가 노래를 부르면 확실히 흥이 날 법하다고 생각하니까 와하하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소녀의 기분나쁘다는 눈빛이 느껴지자 웃는 것을 그만두었다.

 "근데 잠깐 이건 우리를 위한 게 아니고 널 위한 거잖아."

 "아니죠 현수씨는 노래하는 거 좋아하셨으니까 현수씨를 위한 거 맞아요."

 "지금 현수는 노래 싫어할 수도 있잖아."

 "왜 싫어하는데요?"

 현수가 그럼 왜 노래는 안하고 치킨배달을 하겠냐? 라고 꽤나 멍청한 질문을 하려 했으나 다행히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이 한박자 더 빨랐다.

 "왜 허준혁은 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해요? 멍청이가."

 볼을 부풀리고 짜증을 내는 그녀가 꼭 복어같았다. 더 따지려 했으나 그 꼴이 하도 보기가 싫어서 그만두었다.

 "그럼 그건 그렇다치고 나를 위한 건 뭔데?"

 괘씸하게도 나에게 돌아갈 이익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인지 소녀는 빔이 나올듯이 눈을 크게 뜨며 고민 중이었다.

 "죄송해요, 진짜 허준혁을 위해서 온 것도 맞는데 기억이 안나네요.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은 제쳐두고 아무튼 현수씨 노래 들려줄 수 있죠?"

 "아니 그건 힘들지 우리 30년만에 봤다니까. 그리고 내가 머뭇거리다가 분위기 망쳐서 노래 못들어."

 "저 그러면 허준혁이 죽을 때까지 꿈에 나타날래요. 아, 몰라 노래 듣고싶다구요. 허준혁이 어떻게 해봐요. 나는 모르겠으니까."

 그녀는 맥주를 따고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현수 노래 들으면 아예 안 나타나는 거냐?"

 "뭐 그렇죠. 달리 올 이유도 없으니까. 왜,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어요?"

 침묵했다. 부끄러우니까, 거짓말로 꺼지라고 했다가는 정말로 가버릴 그녀였음을 알고 있었으니 차마 가버리라고 대답하지도 못했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얼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몇십년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때라면 이대로 붉어진 얼굴을 놀림당했을 텐데 나이를 먹은 나는 약삭빨라져서 그녀가 놀리기 전에 말을 돌려버렸다.

 "현수는 네가 기억하던 그 모습이랑은 한참 멀리 떨어져버린 것같다. 네가 나처럼 실망하지 않을 자신 있으면 정말로 노력해볼게."

 "그래요 고마워요."

 치킨은 식어버렸고 아침 햇살이 커텐 사이를 자르듯이 들이치려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현수가 준 쿠폰 두장이 아직도 손에 들려있었다. 그대로 손에 쥐고 잠든 듯 했다. 전자시계의 붉은 빛은 오전 8시를 밝혔다. 평소와 다른 주말의 취침 패턴에 놀랐지만 딱히 불만스럽지 않았다. 조급함에 젖던 평일의 아침과는 달리 주말의 아침은 천천히 빛나는 햇볕과 함께 느긋함을 전제로 흐르고 있었다. 창 밖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여유로워보였고 또 어딘가가 들떠보였다.

 모든 것들이 완벽했으나 나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 그녀가 내준 책임 막중한 임무 탓이었다. 현수가 다시 한번 노래부르게 하자. 간단했으나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으며 그 전에 나는 현수와의 재회가 두려웠다. 나는 꿈을 포기한 자를 감싼 저주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그들은 포기하지 못한 일에 대해 영원히 속박되면서 그 속박을 풀기위해 안간힘을 다 한다. 목줄에 묶인 들개처럼 발톱으로 긁고 날카로운 이빨로 자르려할 수록 상처만 늘 뿐이다. 영원히 묶여버릴 정도로 좋아했던 일이기에 우리는 절대로 그 목줄을 풀 수가 없는 것이다.


 "현수야 미안하다."

 동네 놀이터 그네에 현수와 나는 앉아있었다. 부모님이 억지로 집어넣은 학원 탓에 나는 어깨를 찍어 누를 듯이 무겁게 책을 쑤셔넣은 가방을 메고있었다. 현수는 기타를 메고 간단한 멜로디를 팅기는 중이었다.

 "미안하긴 새끼야. 노래는 또 부르면 되는 거여.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그와 함께하기로 한 공연에 참가하지 못하겠다고 통보했다. 그게 공연 5시간 전이었다. 부모님께 공연 사실을 들켜서였다.

 "우리 음악 말인데, 나는 이제 못하겠다."

 내가 음악을 포기한 이유는 욕이 나올 정도로 간단했다. 부모님을 거스를 수가 없어서. 우리 집은 가난했었다. 그나마 공부에 소질이 있던 나는 부모님의 버팀목이었고 자랑이었다. 그러나 음악을 하면 내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모님은 나에게 음악은 포기하라며 부탁을 해왔었다. 나는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어머니와 노가다판에서 벽돌을 나르는 아버지를 져버릴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못하는데?"

 현수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리집 가난한 거 너도 잘 알잖아 더는 엄마, 아빠 걱정시키기 싫어."

 "꼭 공부여야 하냐? 너 노래 잘 하잖아 노래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멍청한 소리 마. 나보다 노래 잘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널렸어. 언제까지 이렇게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살 작정인데? 우리집은 가난하다고 나 하고싶은 것만 해선 살 수가 없어."

 현수의 주먹이 부르르르 떨고있었다. 가난한 것은 현수도 마찬가지였다. 싸구려 기타며 노란머리, 자켓은 그가 편의점에서 밤을 새어가며 직접 벌어서 산 것들이었다.
가난이란 핑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신을 다 한 그에게 이 말은 충분히 화를 돋굴만했다. 부르르 떠는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와도 불만은 없었다.

 "그래 너는 공부도 잘 하니까 나는 이해해. 그럼 우리 밴드는 이제 해체하자 너는 공부로 나는 노래로 성공해서 만나는 거야. 준혁이 너 돈 많이 번다고 나 쌩까고 그러지마라 앙?"

 현수는 기타 가방에서 마이크를 꺼내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실전 연습을 한다며 고물상에서 주워온 것이었다. 녹내가 내 코를 넘어 가슴 속에 들어찼다.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울리지 않는 마이크에 대고 테스트를 해본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현수는 통기타 반주를 시작했다. 맞춰볼 필요도 없는 곡이었다. 인삿말보다 더 많이 주고받았던 가사였으니까 말이다. 밤편지, 이어폰을 뚫고나와서 현수가 내게 말을 걸게 한 내가 가장 아끼는 가수의 곡이었다. 싸구려 기타 반주를 뚫고 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듀엣 안 한다. 마지막이니까 다 너한테 양보할게 다시는 후회하지 않게끔 열창해라."

 나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열창했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였다. 밤의 놀이터에서 가로등을 조명삼아 모래밭을 스테이지 삼아 첫 소절부터 시작한다.

 "이 밤, 그 날의."
 

 지금도 우리는 결국 음악이라는 목줄에 묶여있는 채이다. 그 공통의 목줄은 우리를 목죄는 것과 동시에 30년이 넘게 우리를 연결하고있었다. 나는 눈곱도 떼지 않고 차키와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현관문을 닫았는 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흥분되는 마음이 앞선 상태로 시동을 걸었다.

 나는 차를 몰아 근처의 대형 악기점에 방문했다. 씻지도 않고 폭탄 맞은 머리에 목이 늘어난 흰티에 실밥이 풀어진 반바지 차림으로 달려온 나는 기타 코너에 뛰어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내 눈에 제일 먼저 띈 녀석을 집어들었다.

 "이걸로 주세요."

 통기타를 장보듯 고르는 나를 직원은 눈이 희둥그레지더니 정말로 그러겠냐고 물어왔다. 돈 만큼은 많은 나는 의기양양하게 카드를 내밀었다.

 "이, 이천백이십만원 일시불로 해드릴까요?"

 "네 그리고 보험이고 뭐고 필요없으니까 이거 빨리 기타가방에다 챙겨주세요."

 집에 도착한 다음에는 우리가 연습하고 공연했던 곡들을 공책에 기억나는 대로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반복재생시켜서 따라불렀다. 가사나 음정이 틀리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불렀다. 내가 노래를 그만두고나서 현수가 계속한 만큼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나이가 든 만큼 호흡은 짧아졌고 목소리도 탁해져 있었다.

 어느새 오후 여섯시, 현수가 운영하는 호프집이 문을 여는 시간이었다. 올해 쉰의 허준혁은 막 집어온 기타를 챙겼다. 서비스로 준 하모니카도 혹시 모르니 챙겨보았다. 더해서 요즘 길거리 공연을 할 때 쓴다는 스피커랑 마이크도 트렁크에 실었다. 열 여덟의 허준혁이 첫 공연에 쓴다며 교실의 책상을 몰래 빼오던 때의 떨림이 쉰의 허준혁에게 전해져오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이름 모를 소녀의 집요함으로 인해 30년만에 만난 친구의 가게로 들어섰다. 아주 작은 가게였으나 상가와 어울리는 인테리어가 중년의 감성을 사로잡는 감이 있었다.

 "사장님 계십니까?"

 "아, 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주방에서 나오던 현수는 들고있던 가위를 떨어트렸다. 아마 나의 희한한 몰골 탓이겠지. 아는 척도 하지않던 옛 친구가 어깨엔 기타가방을 메고 한 손엔 불 줄도 모르는 하모니카를 쥐고있으니 말이다.
 
 "준...혁이냐?"

 "이거 받아."

 이천만원짜리 기타를 그에게 냅다 던졌다. 호프집의 손님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그를 부추겼다. 8명 남짓한 관객들의 환호가 귀를 먹막하게 만들었다. 초저녁의 노을이 꿈의 스테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현수는 위생모자를 벗어던지고 나와 무대에 올랐다. 

 그는 나에게 녹슨 마이크를 내밀었다.

 "기특한 새끼, 첫 곡은 알지?"

 "반주나 제대로 하자 현수야."
 
 현수와의 재회의 막이 오르기 시작한다. 기타반주에 가끔 잡음이 들어와 입가를 찌른다. 마이크에서 떨어진 녹에 손바닥이 적갈색으로 물든다. 술냄새가 뇌를 녹인다. 허파와 목구멍은 긴 개와 짧은 폐를 반복한다. 음이 제대로 나온다는 신호였다.
 
 "지금 우리 함께 있다면..."

 "오 너 아직 안 죽었잖아 잘하는데?"

 가사의 하이라이트와 함께 이별의 막이 내린다.

 "난 파도가 머물던 모래 위에 적힌 글씨처럼."


 이름 모를 소녀, 너는 이 무대를 기다리고 있던 거였어. 현수가 먼저 놀이터에서 떠난 그 날 너를 만났지. 바닥에 떨어져 검은 딱지처럼 붙은 담배꽁초와 함께 너는 비릿한 연기를 뿜고 있었어 굵은 눈물을 떨어트리면서 말이야. 

 "저기 이런 곳에서 울고 있으면 신고 들어와."

 "내 이름이 뭐냐고? 허준혁이야."

 "뭐? 맥주? 심부름 값 주면 사올게."

 네가 하도 흐느끼면서 말해서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어. 물론 몇 번 정도는 못알아들은 말도 있었는데 귀찮아서 넘어가긴 했지. 맥주캔을 따면서 하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니까. 노래를 너무 잘 해서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고 했었는데 그 노래는 철썩같이 현수가 부른 거라고 믿었잖아. 아무리 나라고 말해도 얼굴이 매치가 안된다나 뭐라나 하면서 반박해서 엄청 짜증났지만 뭐라고 하지도 못해. 달빛 아래의 너는 너무 예뻤거든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는 말. 그때 이해했어.

 실망했는지도 모르겠어 이 목소리가 네가 사랑하던 현수의 것이 아니니까. 차라리 내 꿈에 안 나타났다면 네 환상은 깨지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뭐 나에겐 잘 된 일이야. 그때는 수능 전까진 노래를 흥얼거리지도 않겠다는 다짐에 그만 뒀지만 다시 만난다면 꼭 확인시켜주고 싶었거든. 

 그러니까 이건 내 노래지 현수의 노래는 아니잖아? 그래서 너는 떠날 이유가 없어. 나를 위해서 온 거라면 그래서 나를 위한다면 그냥 이대로 꿈 속에서라도 남아줘. 이름 모를 그대여 부탁이야.
 

 "그대가 멀리 사라져 버릴 것 같아 또 그리워 더 그리워."

 공연을 마치고 나는 현수와 마주앉아 치킨과 맥주를 나눠먹으며 거나하게 취했다. 갓 튀긴 치킨은 질리는 맛이 전혀 없어서 맥주도 쉴틈없이 들어온 탓이었다. 
집에 온 나는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안녕 허준혁 노래 잘 들었어요 진짜 잘하는데요?"

 "거짓말 하기는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데."

 신기하게도 이번 꿈엔 나의 손에 맥주캔이 들려있었다. 그녀의 칭찬이 부끄러웠던 나는 얼른 술을 들이켰다.

 "지금이 마지막이에요. 이제 이렇게 나타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제 푹 잘 수 있다구요. 무당 보러 갈 이유도 없고 좋죠?"

 "생각보다 그닥 아무렇지도 않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맥주의 탓이었다.

 "왜요? 저를 쫓아나고 싶어서 무당까지 찾아갔으면서."

 왜? 왜냐면 너는 결국 현수의 노래를 듣지 못한 것이고 어, 내 노래를 들은 거고, 너는 현수를 좋아하고 나한테는 아무 감정도 갖지 않은 여자니까 나는 그러니까, 너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런 나를 위했었고... 나 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문맥의 무의미한 음절들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눈은 웃었는데 입은 그러질 못했다. 처진 눈 밑과 깊게 패인 입가의 주름이 자리도 잡지 못하며 어그러졌다. 어떻게 해야 나는 그녀를 온전히 잡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도 답은 나오질 못했다. 이 나일 먹고 떼라도 써야할까? 아니면 팔을 붙잡고 놔주지 않아야 할까?

 이름 모를 소녀는 그런 내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듯 유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무 오래 있었어요. 허준혁이 평범한 일상을 하려면 저는 사라져야해요. 봐요 벌써부터 꿈에 얽메이려 하잖아요. 그래도 지금 당장 떠나는 건 아니니까 너무 불쌍하게 그러지 말아요."

 분명 말은 귀를 타고 흘러왔으나 제대로 전해진 단어는 찾기 힘들었다. 눈 앞의 그녀에 온 정신이 팔렸다. 결국 나는 떼라도 써보기로 했다. 

 "그래! 너 나를 위해서 왔다고 했잖아. 그게 뭔지 기억났어?"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내 앞머리를 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럼요. 사실 애초에 잊어버린 적도 없었는 걸요. 이게 제 최종 목표이니까."

 나는 나의 가벼운 이야기 자루에서 그녀가 흥미가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막무가내로 집어던졌다. 현수가 차인 이야기, 내가 대학에서 처음 사귄 여자 이야기, 가출한 이야기, 결혼 했던 이야기 등 내가 일단 재밌다고 생각하면 일단 던지고 보았다. 그녀가 관심을 가져줄수록 나는 안심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나는 그 짓을 계속했다.

 결국 소재는 동이 났고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필사적으로 시간을 끌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가오는 이별의 공포가 덮쳐오려는 것에 안간힘을 다 해서 도망쳤지만 결국 올 것은 오는 법이었다.

 "정말... 답답해 죽겠어요. 당신이 뭘 하든 어차피 저는 떠나요. 30년만에 다시 오는 기회인데 이대로 버리려고요?"

 이름 모를 소녀가, 내가 사랑했던 소녀가 포옹을 해왔다. 50살을 먹은 나는 직감했다. 안녕이 다가온다.

 처음엔 어른스럽게 이별하려했는데 나는 그다지 나이값을 못하는 인간인가보다. 꿈 속의 나는 아직도 열아홉이고 학생의 신분으로 흡연을 즐기는 다소 불량한 소녀를 좋아한다. 맥주캔을 심부름시키는 소녀를 좋아한다. 나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름 모를 소녀를 좋아한다.

 "좋아했다. 뭐, 생각보다 무덤덤하네 나도 좀 어른이 된 걸까?"

 싱긋 웃는 얼굴.

 "비웃기는, 그래 솔직히 나는 네 겉모습에 반했다. 나는 불량한 여자라면 딱 질색이야 처음 보는 사람에게 술 사오라고 시키는 너는 특히 사절이지. 그 잘난 얼굴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도망갔을껄?"

 "정말 괘씸했네요."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았어. 내 노래를 듣고 진심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또 반했지. 그걸 현수가 부른 거라고 우길 때는 엄청 슬펐다고."

 그녀가 서서히 반투명해져가고 있었다.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뺨이 추적추적 젖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사실 나는 지금도 좋아한다고. 가지마 그냥 이대로 남아줘 이름도 모르는 너지만,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너지만 너를 좋아해. 제발 사라지지마..."

 그녀를 향해 손을 아무리 뻗어보아도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대로 통과할 뿐이었다. 양팔을 아무리 허우적 대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새하얀 국화밭이 핀 절벽의 핏빛 하늘이 무너져간다. 꽃잎은 부서져 떨어지는 하늘의 충격에 세상천지로 흩날려 떠난다.

 "...이제 저도 솔직히 말할 수 있겠어요. 사실 저는 정보따위가 아니에요. 무당을 찾아갔던 것은 정답이었죠. 그래요 저는 유령이에요. 암으로 죽었어요. 그 날은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을 삭발하기 전날이었죠. 그게 그때는 끔찍하게 싫어서 놀이터에 혼자 와서 울었어요. 빨리 죽자고 줄담배까지 태우고 있을 때 노래가 들려왔어요. 제가 특히 좋아하는 노래라 오열까지 해서 대체 누가 부르는지 염탐하는데 그때 보이는 사람들이 현수씨와 허준혁이었어요."

 
 '흐엑, 깬다. 목소리는 완전 내 취향인데.'

 웬 범생이 한명과 날라리 이상한 조합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노래 한 곡을 마친 다음엔 날라리 혼자 놀이터를 떠나는 것이었다. 범생이는 내 쪽을 향해 다가왔다.

 "저기 이런 곳에서 울고 있으면 신고 들어와."

 그녀는 만만해 보이는 그에게 술을 사오라고 시켰다. 이렇게 퉁퉁 부은 눈으로 편의점에 들르는 것이 부끄러워서였다. 엄청 흐느꼈는데 용케도 알아듣는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이음!"

 "내 이름이 뭐냐고? 어..."

 자상한 범생이와 소녀는 금방 친해졌다. 

 "노래 듣고 울었다고? 그거 나야! 엄청 잘 하지?"

 소녀는 어쩐지 그를 솔직히 칭찬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 날라리가 부른 것이 아니냐고 시치미를 뗐다. 답답해 미치겠다는 그의 반응이 웃겨서 더 그랬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소녀는 그에게 이름도 말하지 못하고 뛰어돌아왔다. 어째선지 그 다음부터는 매일 그 멍청해 보이는 범생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사실 저는 그 노래를 당신이 불렀다는 거 알고있었어요. 그때는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에 모르는 척 했지만. 현수씨가 좋다는 말도 다 거짓말. 제일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저였어요. 이제는 다 말하고 갈래요."

 그녀는 이제 거의 형체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꿈속 세계도 거의 다 무너져 간신히 내가 발 디딜 자리만 남았다.

 "준혁씨, 저도 당신에게 반했어요. 한 눈에는 절대 아니에요. 당신 진짜 못생겼으니까. 나를 기억해준 것은 정말로 고마워요. 그 단 몇 시간의 만남을 기억하는 것에 감동했어요. 당신의 노래를 더 듣고싶은데 그게 마지막이라 아쉬워요. 아, 생각보다 할 말은 별로 없네요. 괜히 부끄럽기만 하고."

 그녀의 형체가 사라지기 바로 직전으로 변했다 아마 수 초 후면 사라질 정도로 투명해졌다. 나는 떨어지고 있었다. 꿈 속 세계는 소멸 직전으로 치닫았다.

 "당신을 좋아해요. 이제 진짜 안녕이에요. 이때까지 저 없이 잘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괜찮겠죠? 당신을 걱정하진 않을래요. 그랬다간 너무 상냥한 당신이 나를 걱정할 테니까. 울지도 말아요.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영원히 당신의 기억에 남으려 하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제 이름은..."

 찌르르릉 알람소리가 새벽공기를 진동시켰다. 오전 6시 출근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비타민도 챙겨먹고 아침도 간단히 해결했다. 운 좋게도 오늘은 처음부터 지하철에 앉아서 갈 수가 있었다. 이름 모를 소녀가 꿈에서 사라지고 세 달이 지났다. 나는 보란 듯이 잘 살고있다. 그녀가 나타나기 전보다 훨씬 더. 그녀의 이름은 끝까지 알 수가 없었다. 쓸 데 없는 말만 장황히 늘어놓더니 정작 중요한 것은 전하지 못한 것이었다. 뭐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이름 모를 소녀', 내가 좋아하던 외모가 수려했던 소녀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어폰을 꼽고 눈을 감는다.

 "이 밤 그날의 반딧불을 당신의 창 가까이 보낼게요."

 "사랑한단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