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주세요."

 

...그리고 이것이 그녀와 나의 두 번째 만남이다.

 

 "...지금 뭐하는 거니?"

 

 "밥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상황 설명이 조금 필요할 듯 싶다. 어제 리돌을 공원에 놓아 두고 집에 온 다음, 앞서 말했던 일정대로 나의 하루는 마무리 되었다. 
 하루 전에 있었던 꽤나 특별한 이벤트가 무색하게도, 오늘 하루도 역시 지극히 반복적이었다.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돌아오는 스터디, 스터디. 지치는 하루였다. 지치는 것조차도 지친다. 자신에 대한 반성을 되짚어 볼 겨를이나, 나름의 소회를 풀 겨를도 없이, 오늘도 TV대용으로 틀어놓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채널을 굴리고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럴 터였다.

 

 밤 10시. 5층 옥상 위의 옥탑방. 

 

 나는 헤진 반바지에 늘어진 반팔티를 입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문을 열고 서 있고, 공원의 미아로 남겨졌던 어제의 불청객은, 어제와 같은 복장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 방 문 밖에 서 있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방범 걸이 하나 만큼. 그리고 마음의 거리는, 계속해서 멀어지는 중.

 

 "저기, 아버님께서 아무 집이나 이렇게 문 두들기고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시지 않던? 너 그러다 진짜 큰일난다?"

 

 "괜찮습니다. 어제 이미 민재 씨 여기에 살고 있음을 확인. 나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미행까지?! 얘 진짜 큰일날 애네?"

 

 쫓아오기 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딱히 신경쓴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저는 배가 고픕니다. 밥을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보다 한결 더 당당하구나. 맘에 든다."

 

 문장 속에 숨겨진 뜻은 차치하고 맘에 든다는 말은 제대로 번역이 되었는지,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홍조를 띄었는지 아닌지 그런 희망찬 망상따위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내가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으니까.

 

 쾅쾅쾅! 쾅쾅쾅!

 

 "아, 진짜! 가, 임마!" 

 

 "어제는 줬습니다. 오늘은 안 주신다?"

 

 "협박이냐 그건? 말투부터 교정하고 와! 내가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널 어떻게 계속 먹여주냐?!"

 

 대답없는 쾅쾅쾅. 


 얘 안되겠네, 진짜?! 나는 문을 확 열어제끼고 그녀에게 악다구니를 써 댔다.

 

 "야! 여자한테 쌍욕하기전에 가! 내가 너희 아빠라도 되냐?! 진짜 달에서 왔으면 왕복티켓 이용권은 끊어놓았을 거 아냐?! 가서 청룡열차를 타든 88열차를 타든 아무거나 빨리 집어타고 가라고!"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군요."

 

 "에?"

 

 목소리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줄창 들어오던 번역기 아줌마의 목소리가 아닌, 약간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분명히 리돌은 키가 나와 비슷했을 텐데, 지금 수평을 유지하고 있는 내 시선의 끝에는 금방이라도 단정한 정장 차림새의 앞섶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약 10도 가량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 곳에는, 뿔테 안경을 쓴 갈색 머리의 외국인 아가씨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빼곰히 숨어 나를 쳐다보는 리돌의 모습도.  

 

 "저, 저기. 누구시죠?"

 

 "아, 그렇군요. 일단 소개부터 해야겠죠."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며, 그녀는 가방에서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명함을 꺼내어 나에게 건넸다. 나도 얼결에 그 명함을 두 손으로 받아들어 버렸다.

 

 "캐롤라인 스미스라고 합니다. 이곳 노량진에서 영어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한국 억양으로 말하며 건넨 명함에는 크레센트 어학원이라는, 조금 수상쩍은 학원의 이름과 그녀의 이름, 연락처 등이 모두 영어로 기재되어 있었다. 

 

 "아, 예, 성민재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물론, 이 아가씨도 함께 말이죠."

 

 "아... 예. 들어오세요."

 

 뿔테 안경을 올리며 조곤조곤 말하는 그녀의 분위기는 마치 저 달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아가씨조차도 이성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나는 그만 학생방문을 온 선생님을 받듯이 캐롤라인과 리돌을 방 안으로 안내했다. 

 다행히 방 청소는 자주 하는 편이라, 그리 크게 더럽지는 않았다. 다만 방 중앙에 널부러져 있는 세탁건조대와 거기 걸려 있는 속옷들 때문에 누가 앉을 자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두 아가씨가 내 방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그 찰나의 순간에, 건조대를 빨래째로 접어서 화장실 안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리고 방 한켠에 기대어둔 밥상을 꺼내어 잽싸게 방금까지 세탁 건조대가 있던 자리에 피고, 부엌에서 컵을 꺼내 냉장고에 남아있던 오렌지 주스를 따르기 시작했다. 리돌은 나의 뒤에서 일련의 움직임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스미스 씨는 어느새 자리에 앉아 자신의 수첩을 읽고 있었다.  

 

 "먹을 것은 줍니까?"

 

 나는 그녀를 쳐다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 하지 마."

 

 잠시 멀뚱멀뚱 서 있던 리돌은, 이내 함지박만하게 웃으며 식탁으로 돌아갔다. 지금 뭐 씨알이라도 준다는 뜻으로 해석한건가?
 주스를 쟁반에 받쳐서 식탁으로 가져왔다. 리돌은 진짜로 무언가 씹을 거리를 기대했는지, 주스를 따른 컵을 이리 들어보고 저리 돌려보고 계속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옆에서 무슨 난리를 피우건 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는 듯, 캐롤라인은 조용히 대화를 시작하였다.

 

 "일단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군요. 민재 씨를 찾아보자고 말한 것은 일단 리돌 양이 원한 사항이고, 저는 확인차 같이 이 곳에 온 것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한 마디를 끝낸 캐롤라인은 차분하게 주스를 한 모금, 입에만 대듯이 마실 뿐이었다. 마치 회의실에서 바이어를 상대하는 회사 간부의 모습이 물씬 풍겨나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재씨가 리돌 양을 보호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투만 사무적인, 말 그대로 여과없이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듯한 말이 내 가슴을 강타했다. 심리적인 타격은 육체적으로도 효과를 주었다. 입에 컵을 그대로 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캐롤라인의 얼굴은 타액 섞인 오렌지 에센스를 처방받을 뻔 했다. 나는 마시던 주스를 있던 자리 그대로 컵 안에 원위치 시키고 사레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

 

 "콜록!... 저기, 잠시만요. 뭐라고 하셨죠?"

 

 "리돌 양이 말하더군요. 어쩌다 이곳 대한민국에 왔는데, 지금껏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사람이 민재씨 혼자라고."

 

 당연히 그리고 미친 소리를 하고 다니면 대로변에서는 누구라도 제대로 된 호의를 베풀 수가 없겠지. 그리고, 아니, 내가 특별히 착하고 잘난 놈이라는 게 아니라, 그 정도의 선의는 누구라도 베풀 수 있는 거 아냐? 

 

 "경찰의 보호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이미 경찰에서도 이 아가씨를 정신이상자로 취급하여  유치장으로 보낸다고 하더군요. 특히 오늘, 저를 만나기 전, 길거리에서 달의 문명? 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때 리돌 양 앞에서 우스갯거리가 되라고 춤을 추며 돌던 인간이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그 이상한 사람과 리돌 양 둘 다 경찰한테 이미 제재를 당했습니다. ."

 

 그건 너무 심한데. 

 

 "리돌 양은 아버님이 오실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더군요.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결론은 아버님이나, 혹은 다른 보호자 분이 오실 때 까지 누군가가 보호해 주는 편이 가장 좋다고 여겨집니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잠깐, 잠깐, 잠깐요."

 

 내 맥끊기에 캐롤라인은 눈꼬리에 미동도 없이 주스를 마실 뿐이었다.

 

 "저기, 말하시는 요지가 뭔지는 대충 알겠는데, 그래서, 제가 이 아이를 지금 보호해야 된다는 말입니까? 누군지도 모를 여자애를? 저기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사람 좋아보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거 조금 도와줬다고 제가 부처나 예수로 보이십니까?"

 

 "민재씨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은 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리돌 양이 겪은 이야기와 오늘 저와 함께 있으면서 사람들이 그녀에게 했던 행동들만 종합해 보아도 알 수 있어요.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고서 그녀는 잠시 리돌을 바라보고서는, 말했다. 

 

 "당연히 민재씨가 걱정하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 혼자 사는 방에 젊은 여자 혼자 두면 어떻게 안심을 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시죠. 그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대신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한 소녀가 이렇게 불쌍하게 길거리에 나앉아 있는데, 그걸 모른체 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사람된 도리고 뭐고, 저는 지금 제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사람이에요. 지금 외간남자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빼고서라도, 밥벌이도 안 되는 애를 데리고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아,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민재 씨에게 달마다 리돌 양 대신 생활비를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는 마치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는 마냥, 캐롤라인은 가방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 앞에 내밀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시어머니야, 뭐야.

 

 "부족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오갈 곳 없는 고양이 하나 거둬 주신다고 생각하시고 받아 주시면 되겠습니다."

 

 고양이라...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말할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리돌이 번역기를 끈 목소리로 캐롤라인에게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을 보면. 어떻게 알아듣기는 했나보지? 이런 고성에도 캐롤라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핸드폰을 잠시 만지고서는 책상 위에 조용히 엎어 놓을 뿐이었다. 방금 그녀의 표현 비슷하게 말하자면, 어디서 개가 짖나 라는 표정이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을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의 혼란하디 혼란해진 머릿속에서 내린 결론은,

 

 어디 회사의 비서같이 생긴 이 아가씨 역시 정신병자일 가능성이 높다 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방금 말한 말마따나 집 나간 고양이 같은 애한테 생활비까지 주어가며 동정을 베푸는 건가. 스톡홀름 신드롬 같은건가? 오늘 계속 이런 정신나간 애와 같이 있다가 그만 같이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그리고 그 정도까지 신경을 써 줄수 있는 사람이, 본인이 직접 데리고 살거나 혹은 다른 선택지도 없이 우리집으로 일직선으로 쳐들어왔냐는 말이다. 

 어쨌든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일단 상대방의 어투에 맞추어 최대한 예의바르고, 신속하게 부탁을 거절하기 위해 운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