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렸을 때 개미굴을 가지고 놀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네 역시 그렇군요. 어린 시절 개미굴을 가지고 놀았던 경험은 아마 인류 대부분이 가지는 경험일 것입니다.

 

 개미굴은 어디에나 많이 있어서 찾기도 쉬울 뿐더러 다양한 방법으로도 놀 수 있는 훌륭한 놀잇감입니다. 그 조그마한 개미굴로 노는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수정 요함)인간이란 그때부터 인간이라는 종이 가지는 최고 무기인 창의력을 갈고 닦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개미에게 고마워 해야겠지요? 뭐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쳐도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고전적인 방법부터 말해볼까요? 개미굴을 가지고 논 경험이 있는 백 명 중 구십 구 명이 이 굴에다 액체를 넣어봤을 것입니다. 깔끔하게 물을 들이붓기도 하고 노오란 오줌을 개미굴로 조준 해서 갈기기도 해봤을 것입니다.

 

 액체를 들이붓다보면 개미굴에서 개미 몇마리가 둥둥 떠오릅니다. 여섯개 다리를 잔뜩 오무린 채로 더듬이를 파들거리면서 떠오릅니다. 그리하여 또 어디가 파들거리냐면 어린 시절 우리내 입가가 파들거립니다. 저는 개미가 익사하여 두둥실 떠오르는 꼴이 하도 웃겨서 저도 모르게 파들거린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여러분들은 그때 왜 파들거리셨습니까?

 


 칠월 중순의 칠은 칠죄종의 칠이다. 틀림 없이 그렇다. 불순한 칠, 이 불결한 숫자의 근원이 지랄맞게 뜨거운 이 날씨라는 내 짐작도 틀림이 없다. 나는 이맘때면 할 일이 없다. 학교가 방학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요, 집이 조금 잘 산다는 것은 작은 이유였다. 주변은 공부를 한다거나 돈을 번다고 땀을 뺀다던데. 그런 소식을 들으면 나는 아주 잠깐의 위기감을 느낄 뿐이다. 온도계가 30을 넘기면 또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상대적으로 덜 뜨거운 바닥에 누워서 뒹굴거리면 내살이 찬 바닥에 붙었다가 주욱 늘어났다가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가 바닥 전체가 내 열기로 냉기를 잃어버리면 나는 뜨거운 바닥에서 그저 덥다는 이유로 덥고 만다. 

 

 저녁 즈음에 온도계가 29도를 가리키면 이번엔 열기가 피부 밖에서 안으로 옮겨간다. 땀구멍을 통로로 들어온 열기로 열이 난다. 

 

 '부모를 잘 만나서 나는 잘 먹고 잘 사는구나. 친구는 중복 더위를 직격으로 받으면서 떳떳하게 벌고 떳떳하게 쓴다고 그러던데. 반대로 나는 이 죽일 놈의 더위도 제대로 피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두 손바닥을 벌려 돈을 받는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워하며 변변치 못한 소비를 하고있다.'같은 소리를 오만하게 되뇌인다. 그리고 나를 욕한다. 비하한다. 물론 누가 들을 세라 속으로만 그런다. 이렇게 멋없는 분노가 또 있을까? 

 

 자 그럼 조금 더 시원해진 새벽에는 무엇을 할까? 그 시간대에 나는 손바닥만한 여자들을 사랑하곤 한다. 그들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공짜로 춤(아닌 것도 있다)을 보여준다. 그래 나는 몇분간 그녀들을 사랑한다. 그녀들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녀를 사랑하다가. 곧 공허한 사랑의 과정을 잊는 엄청난 쾌락과 함께 한번에 내쳐버린다.

 

 내쳐버린 나는 후회를 한다. 그 엄청난 쾌락의 댓가 또한 열이기 때문이다. 둔부가 축축히 젖는 것은 매우 기분이 나쁘다. 그냥 잠이나 잘 것을 왜 그랬냐 질책해봐도 나만 바보같다.

 

 그럴 때에는 남색 하늘을 안대 삼아 곤히 잠들자.


 
 눈을 뜨면 나는 기지개와 함께 날이 선 욕을 뱉는다. 위협은 없고 짜증만 잔뜩 들어선 욕. 여름 해가 내 안면을 직격해 오기 때문이다. 자의도 타의도 아닌 이상한 기상은 나를 이상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도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에어컨이 있었더라면 더위를 피하는 일이라도 가능했겠지만, 어머니는 잦은 이사로 에어컨 설치 비용을 여러번 지불하는 것을 걱정하셨기 때문에 집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집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매한가지인 것이었다. 밖에나 가보자.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곳에서 더운 것 보다야 뻥 뚫린 곳에서 더운 것이 조금 덜 하겠지. 핸드폰이 폭염특보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만류했지만 무시했다. 폭염에 가만히 얻어 터지는 것 보다야 움직이며 맞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웃기는 논리지만 어쨌든, 나는 아파트를 나왔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데 보이는 것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쓰레기 더미 리어카를 옮기는 노인이었다. 백발에 금방이라도 쏟아져나올 것처럼 튀어나온 눈과 앙상한 팔다리가 어쩐지 나를 두렵게 했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으로 두 눈을 도망시켰다.

 

 도망은 실패였다. 노인이 끄는 리어카에 쌓인 쓰레기 탑 때문이었다. 종이 박스를 차곡차곡 쌓은 탑은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반대로 노인은 내 턱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작았다.) 검은색 노끈으로 될 대로 묶어둔, 견고한 탑의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덮쳤다. 탑에게 가려져서 햇빛이 오지 않았다. 백발이 촉촉히 젖어들어갔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발목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노인 발치에서 1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개미떼가 길에 떨어져 녹아내리는 우유맛 아이스크림을 맛보고 있었다.

 

 달콤한 액체에 멋대로 턱을 들이대는 이 검고 작은 생물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날이 더워서 그랬나보다. 머리가 뜨거워져서 난폭한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밟아 죽여버리겠다. 밟아 죽여버려야 이 후덥지근한 화가 풀릴 것 같다.

 

 개미를 밟으려고 개미떼 위로 발을 든 순간 내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 생각해보니 만약 이 검은 패거리를 밟는다면 내 운동화는 개미들의 키틴질 다리 머리 가슴 배 그리고 흰색 내장으로 범벅이 돼버리지 않는가? 십이만 육천원 짜리 흰 운동화를 일단 개미떼에게서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이것들을 어떻게 보복해야하나 궁리했다. 신호가 바뀐 것도 그냥 무시했다. 노인의 리어카가 가버리자 그늘이 사라져서 정수리가 지글지글 끓었다. 다리가 아파서 아예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개미를 응시했다.

 

 조사를 해보니까 그들의 본거지는 콘크리트 틈이었다. 평범한 도구로는 부술 수 없는 철옹성같은 터였다. 그들의 신체조건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었다. 그 터를 등에 지고 무리에 끼어 새카만 광택을 건방지게 번들거리고 꽁무니를 당당히 휘두르며 걷는 모습이 나를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것들을 라이터로 지져버리자니 내가 덥다. 중간에 경찰이 껴서 훼방을 놓을지도 모른다. 생수를 붓자니 돈이 아까웠다. 어렸을 때처럼 오줌을 갈기기에는 수치심을 아는 나이가 돼있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무턱대고 화가 났나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쩌자고...

 

 
 어렸을 적에 저는 작은 곤충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이 적당한 사이즈였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노는 것은 뭔가 허한 느낌이 있어서 그닥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동물과 놀자니 그것들은 어린 저에게 너무 빠르고 컸습니다. 그랬던 어린 제게 곤충은 아주 적당한 놀잇감이었습니다.

 

 곤충 중에서도 개미는 매우 흥미로운 놀잇감이었습니다. 그들은 작은 인간입니다. 사회를 만들고 계급을 만들어 치밀하게 운영합니다. 이런 면에서 지구에서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이지요.

 

 그렇습니다. 작은 인간, 그들이 훌륭한 놀잇감인 이유입니다. 작은 인간들을 내려다보면 저는 꼭 신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진짜 인간들'이 저를 화나게 만들면 작은 인간들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여섯 쌍의 다리를 떼어버리고 더듬이를 잘라버리고 머리를 뜯어버렸습니다. 머리가 떨어진 개미는 몇 초간 잘도 돌아다닙니다. 그 꼴이 하도 웃겨서 몇 개의 머리가 떨어졌는지 모릅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대로 개미떼를 방치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는데 이번엔 어린 아이가 사탕을 떨어트렸다. 콘크리트 개미굴 바로 옆으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작은 속물들이 굴에서 쏟아져나왔다. 아이의 침이 마르지도 않은 사탕에 또 멋대로 턱을 들이밀었다.

 

 다섯 살쯤 되어보이는 아이는 울지도 않았다. 체감상 조금 먼 발치에서 잠깐 사탕을 쳐다보다가 놀이터로 뛰어가버렸다. 나는 또 무턱대고 화가 나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일점오 리터 짜리 생수병을 사왔다. 거기에 침과 가래를 잔뜩 뱉고 그대로 콘크리트 개미굴에 부어버렸다.

 

 노란 점액이 개미굴을 덮었다. 개미들이 안에서 떠오르다가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듯이 가래침에 들러붙었다. 언제나처럼 열심히 발버둥 쳐보지만 가래에 더 엉킬 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깔깔거리는 웃음을 해버렸다. 지나가는 이가 나를 미친 놈으로 봤을 것이다. 그 괘씸하던 벌레들이 흐르는 물을 타고 하수구로 도로로 한꺼번에 귀양을 가는 것이 볼만했다.

 

 나는 기분이 조금 나아져서 집으로 돌아갔다.

 


 개미굴에 죽은 풍뎅이를 넣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개미는 한 마리 두 마리 모이다가 어느 순간 떼거지로 달려나와 풍뎅이의 몸을 순식간에 해체해버립니다.

 

개미들은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별개입니다. 개미가 일하는 것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은 종종 일하기 위해서 동료들을 밟고 올라탑니다. 그 이유가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인지 그저 자신의 편리를 위한 것인지는 제가 개미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둘 중 하나만 이유였으면 합니다. 단순한 이기심에 그랬다면 단순한 도덕적 잣대에 따라 그들을 비난해버리면 그만인 것이고 단순히 관리를 위한 것이었다면 결과만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여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그 이유가 둘 다라면... 업무 효율성을 위해 자신의 편리를 위했다면, 혹은 그 반대라면 나는.

 


 다음날 나는 다시 그 개미굴을 찾아갔다. 어제 놓고 간 페트병이 아직도 제자리에 있었다. 간곡한 햇빛을 난해하게 굴절시키며 개미굴을 비추고 있었다.

 

 어제 본 리어카를 끄는 노인이 다시 내 옆에 섰다. 오늘은 한 층 더 견고해진 종이 탑을 쌓아 올린 리어카를 끌고왔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와 좀 더 떨어져 개미굴을 사이에 두고 섰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림자는 나를 덮쳐왔다. 당연히 개미 굴도 그림자의 안정권에 들어섰다. 개미 한 마리가 뽈뽈뽈 콘크리트 굴 속을 기어나왔다. 그 꽁무니를 씩씩하게 씰룩이며 기어나왔다.

 

 무거운 태양빛을 짊어진 노인과 옆에 선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개미는 땀은 커녕 눈물조차 흘리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