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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azing on a Monday Afternoon (...Revisited)

#2 2018년의 2월에는 네 번의 화요일이 있었다고 하더라

#3 점심식사에는 120분 정도가 적당하다

#4 Have A Nice Day

#5 진실은 공상을 찢는가

새로운 시작 (완결)

 

#3 점심식사에는 120분 정도가 적당하다

 

 

B1.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현대 과학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나의 짧은 식견으로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미래의 과학기술로도 불가능할 것 같지 싶다. 그런데도 인류는 기나긴 세월 동안 계속해서 미래를 예상해 왔다. 그것도 불확실함을 견딜 수 없는 측정의 영역에서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어떤 전문가의 말이나, 최첨단을 달리는 기계의 연산이나, 혹은 이 사회의 집단적인 사고조차 '틀려도 괜찮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례는 아마 이것이 유일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가설을 세운다. 가설은 대개 결과와 일치한다. 그러나 가설이 결과와 일치하기만 한다면 그 누구도 어떤 연구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설은, 그리고 예측은, 틀릴 수 있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측이 빗나가고 가설이 틀리는 것은 인류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사회에 동기를 부여하는 실패라는 것이 이렇게 존재함을 우리의 선조들은 오래전부터 인지해왔다. 그렇기에 '틀려도 괜찮아'라는 합의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수천 년에 걸친 인간 사회의 '미래 예측'이라는 항목에 대한 암묵적 합의에 따라, 나는 오늘도 빗나간 일기예보에 저주를 퍼붓고 있다.

 

 

L.
  날씨가 더우면 아이스크림이, 날씨가 추우면 어묵이 잘 팔린다고 하더라. 당연한 말 같지만, 평균을 내 보면 기온에 따라서 사람들의 기호가 미묘하게 갈리기 때문에 재고를 남기기 곤란한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들이 기온에 신경을 곤두세운다고 하던가. 영상 4도에서부터 어묵이 잘 팔린다고 하니, 오늘의 최고기온은 6어묵, 최저기온은 21어묵인 셈이다. 21어묵이라! 어묵을 21개씩이나 잡고 먹는 것은 거의 고문이지 않을까. 한 번에 6개씩만 먹어도 입천장을 홀라당 데워먹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다면 오늘 낮은 화상을 입을 정도로 춥다는 말이구나. 분명 어제 내가 본 대로라면 양 볼 가득 욱여넣을 수 있을 정도였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5어묵이나 더 쑤셔 넣다니. 국가인권위원회에 기상청을 제소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뭐, 그냥 푸드 파이터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1.
  문화권의 차이는 수면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을 제외하고는 바닥에 잠자리를 펴는 것이 보편적인 전통이었다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어쩌면 침대의 사용은 부자연스러운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 사회의 절대다수가 침대나 높은 의자가 딸린 식탁을 사용하게 된 것은 무언가를 동경해서였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그 변화를 지켜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셈이다. 따라서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어색한 줄도 몰랐다. 굳이 '어색하지 않은'대로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따라서, 지금 내가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무서운 것이 없을 뿐인 어느 수요일 아침의 이야기이다.


  오늘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다만 어제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일까? 안타깝게도 그런 비관론자들의 푸념을 들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발언을 전력으로 부정하면서 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린다. 오늘은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샌가 나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보았다.

 

 

2.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에게는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다만, 어제가 오늘을 만든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는 없을 것 같다. 어제 병원에서 돌아온 나는 알 수 없는 강한 고양감에 휩싸인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내 집 안을 말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열리지 않은 서랍은 없었고 들춰지지 않은 가구는 없었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들이 있었지만, 결국 나의 선택은 한 뭉치의 재미없는 종이였다. 


    『필지 내 환경 정비와 토지 정비 계획』


  문서는 마치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이 건물과 토지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해서 이 공사를 진행하는 이유에 관해서 설명해 놓았다. 요는 이러하다. 본래 이 필지는, 지금처럼 같이 남북으로 긴 장방형의 필지가 아니라 대략 오각형 모양의 땅이었다. 별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던 주변의 공터와 달리 이곳은 원래에도 주택 건물이 한 채 있었다. 그러던 중 이 일대를 도시로 개발하면서 같은 위치에 유사한 면적으로 변형되었다. 현재 이 도로변을 구성하는 다른 필지들의 경우 원래 논밭이거나 유휴지였기 때문에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쪼개서 주택가를 구성할 수 있었지만, 이곳의 경우 원래 토지 면적과 유사한 부지를 만들면서도 다른 건물들과 동서 폭을 일정하게 가져가고자 세로로 긴 땅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길게 튀어나온 부분은, 주택가의 남쪽에 위치한 작은 언덕 자락에 걸치게 되는데, 그동안은 경사가 심해서 텃밭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이 땅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해서 언덕을 깎아내고 낮은 축대벽을 세워 사용할 수 있는 면적을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몇 가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지만, 개발 당시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적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은 나는 일단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이것 말고는 두 장의 설계도가 있다. 먼저 서류에서 본 대로의 설계도다.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이 정도면 이 크기의 건물을 한 세 채는 더 올리고도 남았을 것 같다. 깔끔하게 정리된 설계도에는 다만 건물이 아니라 넓은 차고와 정원을 만든다고 쓰여 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1950년대 미국 교외 지역에서나 보던 구성이 만들어질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된다면'이라고?


    '된다면'?
    '... 면'?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본다. 나는 종이를 한 장 넘긴다. 그리고 완전히 다른 결과물을 본다.

 

 

3.
  어떤 사람에게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것을 나는 '보호'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켜두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켜두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나는 '독점'이라고 부른다.

 

 

  드러내놓고 내주지 않는 것을 나는 '독점'이라고 부른다. 독점이 발생하는 원인은 다양하다. 단순한 과시에서부터 이익의 창출 수단까지. 그러므로 독점은 인간의 인정에 대한 욕구, 혹은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욕구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에게는 같은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드러내지도 않고 내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다. 드러내지 않았기에 아무도 그 가치를 모른다. 내주지 않았기에 대상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지도 않는다. 나는 신문의 사회면이나 뉴스에서 보도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드러날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는 것이 있다. 숨기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숨기지 않는 사람은 존재조차 논의된 적이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어째선지 그런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은 빛과 같은 속도로 이동한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세상에 자기 혼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해답에 이르게 된다. 다만 내 생각은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지도 않는다. 나는 아인슈타인이 아니고, 이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불쾌함에 사로잡혀야만 한다. 딱 한 가지, 내가 결론 내린 것이 있다.


  드러내지도 않고 내주지도 않는 것을 나는 '은폐'라고 부른다.

 

 

4.
  2월 6일, 오후 8시 32분. 8과 32가 모두 2의 거듭제곱이라는 놀라운 사실에 나는 전율하고 있었다. 세상은 0과 1로 이루어져 있으니, 결국은 2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버즈 올드린 만세. 


  물론 사실은 그럴 리 없다. 내가 보고 있었던 것은, '모든 서랍을 여는 과정'에서 발견한, 한 개의 봉투 때문이었다. 낡은 봉투에 들어있는 낡은 종이돈. 생긴 모양은 지금의 것과 다르지 않지만, 분명히 낡았다. 어림잡아 십 년은 되어 보이는 이 비밀스러운 존재. 묻어있는 먼지의 양으로 생각건대 이것을 여기에 둔 사람은 과연 이 존재를 기억하고 있기나 할까. 봉투를 바라보면서 나는 어쩌면 미래를 크게 바꿔놓을지도 모르겠는 생각을 한다. 이 돈은 과연 어떤 돈일까. 드러내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 이 돈이 존재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왜 저마다 깊숙이 숨기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까. 나와 너의 가장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봉투의 의미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봉투가 세상에 다시 나오는 그날에 어떤 용도로 쓰기에 될지 나는 모른다. 다만 어쩌면 나는, 이 봉투를 손에 쥔 사람의 가장 진정한 '그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알고 싶다면 망설일 것 없이 들춰야 하는 것이다. 어제 나는 이 집을 둘러보면서 꽤 많은 것을 찾았다. 사람이 거주하는 집에서 나올 수 있을 만한 것들을 대부분 보았다. 그것들의 위치를 전부 다 기억한다면 무슨 장애라도 있는 것이겠지만 원래 필요할 때 갑자기 생각나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현관 안쪽의 투박한 벽장에서 삽을 꺼내고 나간다.

 

 

5.
  사람들은 과거에 이끌린다. 기억과 추억이라는 단어가 있다.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시려오는 것들이 있다. 아름답게 남아있는 것들이 있다. 더럽혀지지 않고 순수한 동심이 있다. 동심에는 환상이 있고, 따라서 환상에는 과거가 있다. 자면서 꾸는 꿈도 사실은 과거에서 나온다. 언젠가 생각해두고서는 의식 저편에 묻어두었던 것들이 자면서는 드러나기도 한다. 의식의 세계에서 과거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원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힘들 때면 과거를 꺼내 든다. 힘들고 외로운 시기에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깝지만 성장한다는 것은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절망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 다 큰 어른이 미래를 이야기한다면, 높은 확률로 남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안정적인 투자처는 과거를 들이밀고 고위험 고수익의 사업 - 혹은 사기 - 은 미래를 들먹이는 법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한 몸 불사를 청년들밖에는 없다. 모두 커가면서 과거에 얽매이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또한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자위하는 그 행위를 쾌락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이끌린다. 그러나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4차원 시공간의 우주에서 시간에는 방향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와 미래라고 부른다. (그러니 사실 현재란 없는 말이다. 지금을 즐기라니, 도대체 어떤 지금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안타깝게도 가능성의 이야기도 아니다. 학문적인 의미로 과거는 빅뱅 이전의 역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빅뱅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면 빅뱅이라는 사건 이전의 시간이라는 것을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빅뱅 이전에 대해서 우리 우주 내에서는 그 어떤 해답도 줄 수 없다. 빅뱅이라는 사건이 현재를 정의한다. 빅뱅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가 현재까지를 정의하기 때문에, 그 너머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가 있다면 미라는, 적어도 말만은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과학도 미래를 알아내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래는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왔다. 어렸을 적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가져다주는 존재는, 어느샌가 우리가 상대할 수도 없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인류는 진화를 거듭하면서 명석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최대한으로 비겁해졌다. 21세기의 인류에게 가장 큰 적은 외계인 침공도 핵전쟁도 아닌 불확실성이다. 우범지대의 범법자들은 얼핏 보면 가장 용맹한 자들로 보인다. 흔히 '생각이 없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법과 제도는 그들의 충동적 사고를 막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미래가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불확실성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의 영국과 미국이 그러했고, 앞으로도 시간개념이 존재하는 우리 우주 안 어디서든지 이런 사태는 일어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과거에 이끌리는 것은, 최소한 미래와는 달리 과거는 적어도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과거에 이끌린다.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와 당신에게 선택지는 애초에 주어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안전한 과거를 뒤로하고 언제나 미래라는 전쟁터에 내몰리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불안하다. 심정적으로 불안하기도 하고, 존재 자체가 불안정해지기도 한다. 또한 그래서 사람들은 불행하다. 대체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제와 아무 다를 바 없는 오늘이 보장되어있거나, 아니면 일시적으로 젊음이라는 요소가 마조히즘을 발현시켜 미래를 마주하는 고통을 쾌락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전자를 나는 어제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뭐 솔직해 응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상태는 이어질 수 없기에 이 또한 인간을 불안정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 이끌리지만, 미래로 나아간다. 따라서 불안하고 불행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과거라는 안식처를 스스로 걷어찬 존재가 있다. 혹시 당신은 과거에 놓고 온 것이 없는가. 

 

 

6.
  다우징 로드라던지 펜듈럼이라든지. 어쨌든 무언가를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아마도 TV였을 것이다. 수맥을 찾겠다는 사람들은 흔히들 이 땅이 수맥이 지나는 곳이라 기운이 안 좋다던가 어떻다든가 하는 말들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대한민국의 지하 그 어디서도 물이 나오지 않는 곳은 없지 않을까? 지하수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는 수맥을 찾으면서 해야 하는 말은 "이곳에는 유전은 만들 수 없겠군"이 되어야 맞을 것도 같다.


  아무튼,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모두 내가 들고 있는 이 삽 한 자루 때문이다. 이 집에서 드러나지 않은 모든 것을 찾기 위해서 들었다. 아X존에서 17.5파운드나 하는 다우징 로드를 살 바에야 맛있는 거라도 사 먹는 게 나을 것 같았기에 이 삽으로 무언가를 탐지해 보려고 한다. 나는 다우징 로드의 원리를 잘 알고 있다. 바로 식스 센스다. 인간의 근육은 자신이 인지하는 것에 따라서 미세하게 떨린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로든 특정 장소에서 "무언가의 기운"을 느낀다면 손의 미세 근육 또한 미세하게 떨린다. 다우징 로드는 이 미세한 떨림을 눈에 보이는 흔들림으로 바꿔준다. 그러니까 사실 잘 돌아가고 흔들리는 꺾인 막대기라면 다 상관없는 것이지만, 뭐 브랜드값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어쟀든 혹시나 해서 젓가락이라도 한 쌍 들고 가 본다.

 

  삽을 손에 든 순간 나는 하려고 했던 일을 미뤄두고 먼저 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숨겨진 것들을 찾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는 어디일까? 영화에서라면 보통 차고나 다락방, 아니면 지하실이다. 이 집에는 일단 차고나 다락방은 없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지하실이다. 지하실은 대중문화계를 먹여 살린 장본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스펜스 추리물, 공포물, 범죄물 등 다양한 장르와 매체를 넘나들며 훌륭한 공간을 제공해왔다. 지하실의 불은 갑자기 나가고 문은 갑자기 잠기는 법이고, 뭐 다 그런 거다. 사실 이 집에 지하실로 들어가는 문 따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그렇듯 언제나 숨겨진 공간은 있는 법이다. 따라서 나는 그 순간 삽을 거꾸로 들고 바닥을 향한다. 어째서냐면, 턱턱턱턱턱턱턱턱하다가탁하는 소리가 날 때 그곳을 들어낼 셈이기 때문이다. 지하실 입구는 아니더라도 숨겨진 상자나 공간 같은 것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재미있는 가까운 미래를 기대하면서 소리는 열린 공간에 울려 퍼진다. 먼저 거실에서 턱턱턱턱턱턱턱턱 주방에서 턱턱턱턱턱턱턱턱 침실에서 턱턱턱턱턱턱턱턱 화장실에서는 틱틱틱틱틱틱틱틱퉁퉁퉁투우웅. 이 집 안에는 턱턱턱턱턱턱턱턱하고도턱하는 공간밖에는 없었던 모양이다.


  창밖에는 어느덧 그림자가 정남 쪽을 넘어서 기울어지고 있다. 목제품을 조각하는 장인의 마음으로 집 전체를 두들기는 나의 노력은 용서받지 못하였다. 더 두드리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쉴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두드릴 만큼 두드려야 문이 열리지 XR을 재촉한다고 XS가 되는 법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노력이 아니라 노오력을 하였다 하더라도 해결될 것 같은 문제는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다만 이제 한 가지의 선택지는 확실하게 지워졌기에, 나는 삽을 든 본래의 목적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7.
  어린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시선을 떼지 않는 것. 몇몇 동물에서도 보이는 그 특징은 인간 부모가 지니게 되는 숙명인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여유가 생긴다. 미국 중부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처럼 가끔가다 약간의 조정만 가하면 되게 된다. 언젠가는 알아서 시야에서 멀어져가니 그것은 섭섭하게도 느껴질 수 있고, 어쩌면 하나의 독립된 개체를 만드는 과정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뿐만이 아니라, 방금의 설명으로는 상당히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처음엔 주의를 기울여 대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움직이게 된다. 성장한다고도 하고, 적응한다고도 하고, 우리말로는 익숙해진다고도, 커간다고도 한다. 처음에 공들여 설계도를 그려놓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느샌가 완성되어가는 멋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사람 일이 다 그렇듯 설계도대로 만들어지는 일은 거의 없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점점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은, 사실은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간 뒤 그대로 자신이 들어온 쪽을 바라보면 문은 열려있다. 나는 문에 힘을 가하여 일을 했기 때문에 변화가 생겨난 것이다. (현관문이 다시 닫히는 것은 경첩 부근에 일종의 족쇄가 있기 때문이다. 방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한 것이다. 너도 알잖니?) 내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는다면, 문은 계속 열려있는 채로 존재하면서, 점점 더 많은 변화가 공간에 생겨난다. 변화는 다시 되돌려놓지 않는 한 계속해서 커지기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속 팽창하는 우주를 붙잡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기에 미래는 언제나처럼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게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점점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신경 쓰지 않는 것들은 제멋대로 변화를 계속하기도 하고 변화된 상태를 그대로 간직하기도 한다. 시간을 흐르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는 있나 보다. 그리고 딱 한 가지 불가능한 것이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다. 신경을 기울인 그 순간부터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 '원래대로'라는 말은 실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찢어진 조각을 억지로 기워놓은 꼴밖에는 될 수 없다. 다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8.
  거실에는 널찍한 창이 있다. 남쪽으로 난 유리창은 한국인의 전통적인 남향 선호 사상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집이 자리 잡은 위치에는 문제가 있다. 이 집의 남쪽에는 언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이 집의 창문에서 1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가파르게 경사는 올라간다. 어쩐지 좀 춥다 했다. 창밖을 바라보자 흙을 쌓아놓은 언덕밖에는 보이지 않게 된다. 계획한 대로가 맞다면 이 경사는 가파르게 15미터정도까지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평지가 있을 것이다. 나의 키는 2미터도 되지 않기 때문에 15미터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는 없다. 하여튼 엄청 높다. 여기서 보면 25미터정도는 돼 보이는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아버지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크다'라는 것만은 아닐 것 같다. 


  각설하고, 내 눈에 보이는 이 인위적인 언덕의 형태는 상자를 덮어놓은 검은 천막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그 천막을 벗겨낼 것이다. 비탈길에 삽을 들이밀자 그냥 지면을 파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지간히도 단단하게 공사를 해놓았거나, 아니면 단순히 오랜 시간이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서서히 파기 시작한다. 높이를 고려하면 천막의 위로 올라가는 것은 힘들어 보였기에, 적당히 나의 눈높이 정도에 해당하는 부분을 파고 있다. 이 근처 집들에는 울타리도 없고, 옆집과 비슷한 남북길이를 이 주택 건물 또한 가지고 있기에 지나가다 본다면 나는 그냥 동네 뒷산을 파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상상해보기를, 이 공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에는 자신들의 재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선대 소유자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파고, 파고 또 판다. 동사와 동물 명사가 혼란을 일으킬 때쯤인 것 같다. 벌써 밤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덕은 가파르고 높을지언정 결국 동서 폭은 일반 주택 한 채의 너비이기에, 이 정도 했으면 적어도 위로 올라갈 만한 얕은 경사라고 만들어졌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 먹은 구조인지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렇지가 못했다. 조금 전에 검은 천막이라고 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사람보다 훨씬 큰 상자를 덮고 있는 아주 넓은 천막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아래에서 사람이 천막을 당기면, 천막은 조금 아래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눈앞에는 다시 천막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흙을 판다. 위에서 흙이 흘러내리며 다시 그곳을 덮듯, 옆을 파다 보면 다시 메꿔진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가파르게 흘러내린 것이라면, 나는 생각해본다. 아마도 그렇게 깊지 않은 곳에 구조물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훌륭하게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추정에 의해 의지를 다졌건만,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너무 춥다. 어느덧 해는 진 지 오래고 아마도 열 한시도 넘은 것 같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은 물론이다. 분명 집에 불은 켜보기도 했지만, 바깥으로 나가보면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월요일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는 않다.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발생시킨다. 우선 뜨거운 물로 목욕이라도 하고 나는 자러 가야겠다. 내일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