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다를 바 없는 하루였을 것이다. 그래야 했었다.





 머리가 터져 나갈듯이 아프다. 퉁퉁 부은 두 눈은 뜨기조차 힘들다.

 왼쪽 팔에 힘을 주어 봤다. 다행히 왼쪽 팔은 움직이는 듯 하다. 

 그럼 아래 깔려 있던 오른팔은?  

 힘겹게 몸을 굴려 오른팔을 움직일 수 있게 해 보았다. 어깨부터 최대한 힘을 실어 움직이려 해 보지만, 아무래도 틀린 듯 하다. 몸을 굴리는 방향에 따라, 내 오른팔은 마치 삼겹살집 개업날 풍선인형처럼 아무렇게나 널부러지는 게 느껴진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불은 이미 걷어찬 상태인 것 같다. 이불에 싸여 있었으면 10분은 더 옴짝달싹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팔을 움직이는 대로 내비두었다. 어떻게 뻗었길래 팔을 깔고 전혀 움직이지도 않은 채 잘 수가 있었을까. 술에 절은 다음 날 무언가를 하는 일이 힘든 일인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 심각한 듯 하다. 몸뚱아리 바깥쪽 뿐만 아니라, 안쪽도 문제다. 아무래도 지금 그대로 일어나면, 내 뱃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로 비둘기 모이를 실컷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일단 가만히 누워서 몸부터 좀 추스리고 봐야 할 판이다.

 

 "아이고야아아."


 절로 신음성이 튀어 나온다. 당연히, 몸도 움직이지 않고 속도 메슥거리면 누가 없더라도 신세한탄이 하고 싶어지겠지. 그게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이라는 게 문제지만.

 몸도 움직일 수 없겠다, 눈도 떠지지 않겠다. 할 수 있는 건 머리를 굴리는 일 밖에는 없다. 도대체 어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를,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딱 10초만에 그만두었다.


 안돼, 안되잖아. 머리를 '굴린다' 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의 표현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조금만 머리를 쓰려고 해도, 마치 산비탈 드럼통 굴러가듯 머리가 울린다. 그리고 그 고통에, 도저히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생각나지 않는다. 언제나 술만 마시면 이렇다니까. 입으로는 매일같이 줄여야지 줄여야지 하는데 어느 이상 마시기만 하면 고삐풀린 망아지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이제 그 이상의 기억은 모두 말소되어 버리는 거고.

 어쨌든 나는 다시 한 번 박살난 기억의 파편을 힘겹게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기억은 어쨌든 빨리 생각해 내는 편이 좋다. 혹시라도 내가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다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자 최대한 빨리 수습할 수 있도록. 

 보자, 어제 도대체 내가 뭘 했더라? 처음부터 생각해보자. 

 일단 그래, 시험을 망쳤다. 

 갑자기 이 생각을 하니까 머리가 더 아파오네, 제기랄.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왜 그런 거 있잖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란 게.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쓰레기 몇 개 걷어 차고, 쓰레기봉투에 발이 박혀서 신발 다 버리고...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이게 머리 아픈 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라, 끝내주게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래, 그건 어쨌든 그렇다 치고. 나는 어금니를 악다물고 기억을 이어나갔다. 슈퍼에 들렀었지, 음. 소주를 사고, 집에 올라왔다. 부서질 듯이 열어제낀 집 안에는 놀란 얼굴의 리돌과 나비가 있었고, 들어오자마자 잔도 안주도 없이 소주를 깐 내 주위에 앉아 무슨 일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이어 때마침 반찬을 갖다주러 온 성희 씨가 들어왔고, 그리고,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언가 위험한 장면에서 기억이 멈춘 것 같은데. 급작스레 떠오른 기억 편집점에 아픈 두뇌가 갑자기 미친 듯이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성희 씨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거 아냐? 지금이라도 일단 내려가서 먼저 사과부터 하고 봐야 하는 건가?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터 물어 보는 것이 순서겠지? 그렇지?

 일단은 좀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된 일 인지를 물어봐야 할 듯 싶었다. 술 마시고 난 다음의 노숙자 뺨치는 몰골로 그대로 얼굴을 들이밀 수는 없기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씻고, 무슨 말을 할지 정리는 하고 이야기를 해야 할 거 아냐. 나는 일어나기 위해 그제서야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한 오른팔로 침대 바닥을 짚었다. 

 

 물컹.


 물컹?


 이상하다. 내 침대는 물침대가 아닌데. 게다가, 지금 손에 아직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이 촉감은 분명 무생물의 그것은 아니다. 

 ...갑자기 안 좋은 느낌이 든다. 

 나는 왼손으로 떠지지 않는 눈을 부벼 억지로 벌리고서는 내 손에 짚인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죄송합니다!"

 

 상황 판단을 모두 내리기 전에 척수에서는 이미 사과를 명령하고 있었다. 엄청난 고음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팔은 어떻게든 치우려 하였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 져서인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그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손을 떼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로, 어떻게든 붙잡아두려 하는 이성의 끈은 자꾸 멀리멀리 도망을 가고 있었다. 새하얘지는 머릿속에서는 의문문만이 자꾸 만들어지고 있었다. 

 간신히 오른팔을 떼고 나서야 내 머리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시 한번, 왜?! 지금 내 오른손이 받침대로 썼던 부분은, 누워 있는 어떤 여성의 가슴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금발머리로 살짝 가린 옆모습이 굉장히 낯이 익은 모습이라는 데 있었다.

 

 왜 성희 씨가 여기 누워 있는 거?! 내 옆에, 내 침대에, 왜?! 


 금발머리의 절세미녀는 내 옆에서 코를... 그래.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것도 집이 무너질 정도로 크게. 이 와중에도 갑자기 씁쓸함이 입안을 감돈다. 나는 이런 우렁찬 코고는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고서도 인지하지 못한 것인가. 코고는 소리 뿐만 아니라, 모습은 더 가관이다. 언제나처럼 하얀 티에 파란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는 부분은 맞는데, 이게 내가 알고 있는 그 성희 씨가 맞나 싶다. 턱이 돌아갈 듯이 입을 쩍 벌리고 양 팔도 아까의 나처럼 위아래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더 정확하게는 왼팔은 침대 위로, 오른팔은 바지 안으로. 흡사 심야에 찜질방에서 보이는 아저씨의 자세처럼. 

  

 어쨌거나 성희 씨는 자신의 흉부가 눌리고, 옆에서 괴성을 질러대는 그 와중에도, 코 고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그 업어가도 모른다 라는 상태인가. 덕분에 나는 이성을 챙길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었다. 만일 여기서 성희 씨가 일어나 같이 소리라도 질러댔다면, 나에게 제정신이라는 것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성희 씨가 없는 반대편, 그러니까 왼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시 허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퍽


 퍽?


 왜 내 자꾸 침대에서 나서는 안 되는 촉감이 느껴지는 거냐. 이미 오른손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미 불안해진 마음을 두 눈에 가득 담고서는 나의 왼손을 바라 보았다.

 내 왼손은 누워 있는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두상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분노로 쌍심지를 킨 두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리돌은 언제나처럼, 조용히 나에게 말했다.

 

 "놓으십시오."


 "네." 



 

  모든 진실, 아니, 진실이라 믿었던 섣부른 겉껍데기가 산산히 부서진 그 날. 

  그 어느 때보다 야멸찬 현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거짓된 허상을 뚫어 버린 그 날.




 "민재는 그 여성을 확인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 아침 민재의 수공품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민재와 함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창 밖에는 어느 샌가 내 마음 같은 먹구름이 꾸물대고 있었다. 계속 쳐다보면 마음만 더 심란해 질듯 하여 대충 커텐을 치고 두 아가씨를 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리돌은 앉자마자 방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얘는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머리 아파 죽겠는데 헛소리까지 번역해야 될 시간은 없다. 나는 일단 좋은 말로 대충대충 넘긴 다음, 말이 통하는 사람에게서 정보를 캐내기로 했다. 


 "뭐... 그래, 좋아. 수공품이고, 확인이고, 네가 방금 한 이야기가 어떤 뜻이든, 그래. 오케이. 그런데 말야."


 "무엇입니까?"

 

 "너 말고. 저, 성희 씨?"


 "네, 네?!"


 성희 씨는 내가 말을 걸기 전까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화살이 자신한테 돌아간 것에 놀라 나를 토끼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그... 제가 기억이 없을 때 성희 씨나 이 녀석한테 무슨 짓을 한건 아니죠? 네?"

 

 "그런 일 없었습니다." "아, 안했어요! 아니, 아니, 안 했을 거에요?!"


 두 아가씨는 내 질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당황하였다. 특히 성희 씨는, 식탁을 엎을듯이 손을 내저었다. 리돌은 언제나처럼 평온한 말투로 내 말을 부정할 뿐이었지만, 성희 씨는 시선을 어디로 둘지 모르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불신과 당황이 섞인 채 나를 바라 보는 두 여성동무의 시선은...  솔직히 낯뜨거웠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간신히 떨쳐내었다.

  

 "자, 자. 다시 정리를 좀 해 볼게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전.혀."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음주폭행한 사람이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그런 모습을. 물론 나는 지금 기억이 안 나니까 배째라는 식으로 얘기한 것도 아니고, 이 아가씨들이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확인해 주었다. 단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니까, 괜찮지? 음, 괜찮을 거야. 아마도. 

 마침 타이밍 좋게 말을 끝내자 천둥이 쳤다. 마치 예능 프로 효과음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부분을 강조하자, 리돌의 눈이 흡떠졌다. 마치 그것도 기억 못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는 그 비난의 눈초리를 짐짓 무시하고서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저는 성희 씨가 방에 들어온 그 부분부터 기억이 없어졌단 말이죠. 일단 제가 두 분께 별다른 짓을 하지 않은 건 다행인데, 그... 제가 혹시 실례되는 말을 했다던가, 아니면 알아둬야 될 사항이 있는지 좀 알고 싶어서 여쭤보는 거에요."

 

 그런데, 내가 상황의 정리를 요구하자 성희 씨도 리돌도 갑자기 '아' 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까 내 말을 부정할 때 보다 훨씬 부끄러워 하는 표정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뭐야, 이건?? 


 "저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네? 지금 얘기 못할 정도로, 그런 거죠?!"


 내 목소리의 톤은 가빠지는 심박수 만큼이나 높아지고 있었다. 지금 이건 뭐지? 방금 전에는 내가 자기들한테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해 놓고서는, 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니까 대답을 못하는데? 응? 나의 추궁에도 성희 씨는 바닥만 쳐다보며, 리돌은 먼 산만을 쳐다보며 내 말을 무시할 뿐이었다. 


 "성희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를 좀 해 주세요오! 뭔지 알아야 사과라도 할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민재 씨는 잘못한... 게 없어요..."

 

 "아니, 잘못 한게 문제가 아니라 뭔 일인지 알려 달라는 거 아닙니까!" 

 

 "아니에요..."


 아무래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것 같다. 잘못한 것 같은 사람, 즉 나는 자신의 잘못을 알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당한 사람, 즉 성희 씨는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았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무언가 있는데, 얘기를 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아니 그보다, 이 주눅 든 양반이 방금 전까지 그렇게 흥분하던 그 아가씨가 맞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굳이 되묻지 않았던 또 하나의 목격자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야, 리돌아. 도대체 무슨 일인데? 응? 알아 듣지는 못하겠지만 좀 말해주지 않을래?"


 리돌은 귀신이라도 붙은 듯 천장을 노려보고 있다, 갑자기 내가 자신을 부르자 화들짝 놀란 듯 나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은 방금 전에 성희 씨가 그러했듯,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얜 또 왜 이래? 

 그리고, 리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삽시간에 방 안의 공간은 침묵으로 채워졌다. 모두 말을 하지 않을 이유는 충분하다. 리돌은 (아마) 아무 생각 없이, 성희 씨는 부끄러움으로, 그리고 나는 어이없어서. 그리고 그 잠깐 동안의 고요함은, 생각보다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모두들 방금 전의 흥분을 가다듬었으니.


일단, 다시 성희 씨에게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지금 일어난 수라장을, 누군가는 정리해야 겠기에.


 "저기..."

 

 "민재."


 그리고 그 타이밍에, 리돌이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그냥 지금까지 생각하느라 말을 안 한 건가?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어이구 깜짝이야. 뭔데?"


 리돌은 잠시 표정을 찌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는 나를 향한 채로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며 창 밖을 쳐다 보았다. 무언가를 더 생각해 내려는 듯이. 종잇장 같은 침묵이 살짝 더 더해진 후, 리돌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진실은 칼과 같습니다. 그것이 어둠 속에 싸여 있다면 잡으려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날카롭든, 그렇지 않든 간에. 민재는 정말 알고 싶습니까?"


 "...뭐?"


 갑자기 얘 번역기가 맛이 갔나?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문장을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말한 거지? 설마, 이거 준비하려고 방금 전까지 말을 안 한 건가?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냐?"


 리돌은 벙쪄 있는 나에게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래, 뭐 아버님이 말씀은 하셨겠지, 음. 평소에도 좀 그렇게 얘기해 보지 그랬냐. 니가 갑자기 그렇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지. 갑자기 엄청 똑똑해 보이네. 마치 리돌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리돌의 뒤에 있는 창문 커튼 너머로 무언가... 굉장히 빛나는 듯한. 

 과학 시간에 들은 적이 있다. 번개는 광속이고 천둥은 음속이기에, 번개를 보고 한참 있다 천둥소리가 들린다고. 아무래도 리돌 뒤에 비친 것은 번개인 듯 했다. 왜냐하면 리돌 뒤로 지나간 순간적인 반짝임 뒤에,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엄청난 흔들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르릉! 우르릉! 천둥 소리는 끊이지 않고 창문을 울려 댔다. 거, 엄청 가까이도 떨어졌나 보네.

 

 그리고 천장에서 정체불명의 물체가 괴성과 함께 리돌의 얼굴로 뛰어 내렸다. 


 "주군! 위험합니다!"


 천장에서 떨어진 것은 오늘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나비였다. 그리고 리돌은 안면을 강타한 급작스러운 습격에 뒤로 자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 녀석, 천장에서 졸고 있다가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리니까 깜짝 놀랐나? 그리고, 그게 문제가 아니다. 방금 전의 그 한 마디로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나는 리돌의 안면을 덮고 있는 얼룩색 털가죽을 잽싸게 나꿔 채어 내 바로 옆에 던져 놓았다. 그리고서는 나도 몰랐던 내 비장의 기술을 사람들 앞에서 선보이게 되었다. 생판 처음 해 보는, 복화술이라는 기술을. 

 “어이쿠, 밖에 테레비가 왜 이렇게 크게 틀어졌을까? (멍청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지금 옆에 성희 씨 있는데!) 날도 이렇게 꿀렁거리는데 굉장히 잘 들리네요?!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런데, 무언가 이상한데? 나를 쳐다보는 모습에서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보통 고양이가 말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일단 놀라고 봐야 되는 것 아닌가? 지금 성희 씨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은 절대 놀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 각오를 굳히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무 말 없이. 

 얼레? 그리고 리돌도 약간 놀란 표정은 지었지만, 당황스럽게 성희 씨를 쳐다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말없이 커텐으로 가려진 창 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대답은 성희 씨가 아니라, 나비에게서 먼저 튀어나왔다.


 “어리석은 것! 더 이상 네 놈에게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의 언사를 숨기지 않은 것 뿐! 지금 이제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할 틈조차 없느니라!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고서 나비는 잽싸게 집 문 쪽으로 뛰어 나갔다. 


 “자, 주군! 빨리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내 방에 있던 두 아가씨는 무엇에, 아니, 무엇이라고 할 것도 없지. 나비에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뭐야? 내가 복화술을 익힌 것처럼, 저 녀석은 최면술을 배운 거야, 뭐야?!

 나 역시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 여자들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무언가 이 어이없는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서.


 “자, 잠깐만요. 리돌아? 성희 씨?”


 내가 등 뒤에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중간에도 그들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뒤늦게 일어난 덕분에, 천천히 움직이던 아가씨들이 문 앞에 설 때 쯤에야 그녀들의 뒤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은 내가 뒤에서 다가오든 말든,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문고리를 돌릴 뿐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

 리돌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나오던 말을 닫아 넣었다. 


  문 밖에는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쏟아지는 모양을 말하는 뜻 그대로, 분명 그것은 소나기였다. 유성의 소나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보통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낭만이 담긴 반짝이는 점들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의 모양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분명히 유성이 대기권을 돌파할 때 마찰로 인해 불타오른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 하늘의 모습은 불바다 그 자체였다. 

 불꽃, 화염, 업화, 작열하다, 타오르다. 

 파랗고, 노랗고, 시뻘건 빗방울들이 대기와 닿아 검고 하얀 연기를 꼬리처럼 달고 떨어지고 있었다. 구름은 자신의 몸을 뚫어 내리는 불청객들을 버티지 못하고 토해내듯 자신의 낯빛을 바꾸었다. 저 불꽃들의 영향인지, 비도 오지 않고 있는데 번개가 불꽃의 비를 타고 마구잡이로 지표면에 꽂혔다. 하늘의 모습은 마치 잿물 가득한 어항 안에 괴로워하는 열대어들이 몸부림을 치는 듯해 보였다. 불꽃의 파편은 부딪히는 곳마다 폭발을 일으켰고, 개중 큰 것을 맞은 빌딩들은 마치 썩은 고목처럼 한강으로 넘어졌다. 


 단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지옥.


 문 밖에서 피어 나오는 매캐한 탄내는 나를 잡아 흔들며 외쳤다. 지금 눈 앞의 광경은, 현실이라고. 


 “이... 이게 뭐야?!”

 

 나는 외마디 혼잣말과 함께 뒤로 주춤 물러섰다. 무의식적으로 방  안을 돌아 보았다. 아직 내 방 안의 집기는 원래 있었던 것처럼 그대로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리돌이 서 있는 곳을 바라 보았다. 도저히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불의 바다. 지금  내 방은 나온  모습 그대로인데, 왜 방금 전의 이 평화로운 모습에서, 갑자기, 이렇게, 왜 갑자기 문 밖의, 그저 흐리기만 해야 될 저 하늘은, 저렇게  본 적 없는 모습으로 꿈틀대는 거지?! 

 

 도저히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그 때,






  나는 깨달아 버렸다. 




 

  리돌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 새하얀 손바닥에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체온은 나의 팔을 파고 들었다. 그 괴리감 덕분에, 잃어 버렸던 정신을 다소나마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초점을 잡아 다시 리돌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리돌의 눈 역시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성희 씨가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던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리돌. 뭐가 미안한데? 그리고 저건 뭔데?! 갑자기 왜 서울이 불바다가 되었어?!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야?! 너가 한 일은 아니지? 응?”


 지금까지 리돌이 보여준 능력이라면, 왠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달나라 소녀가 보여준 모습은, 절대 이런 무차별적인 파괴와는 거리가 멀었다.

 리돌은 나의 팔을 그러쥔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그 불에서 온 비 때문에 일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 때문일 수 있습니다.”


  “너... 때문이라고?”


 나는 멍청해진 얼굴로 리돌에게 되물었다. 리돌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때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던 수많은 불기둥 중 하나가 리돌의 뒤에서, 우리가 있는 옥탑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으로만 보아도, 십몇초 뒤에는 이 곳에 떨어질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런데, 저게 진짜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내가 아직 헛것을 보고 있는 거 아냐? 지금 그냥 방금 이야기한 부분이, 자기가 벌린 깜짝쇼라서 그렇게 이야기한 부분이 아닐까?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공황이 왔다. 꼬여버린 머릿속에서 몸에 내린 명령들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지금 눈 앞으로 쇄도하는 불덩이를 보고도, 나는 내 팔을 잡고 있는 리돌의 몸을 돌려 그냥 불꽃이 곧 떨어질 거라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아무런 말 없이. 그냥 저건 아무것도 아니냐고 묻는 듯이.

 리돌은 뒤에서 날아오는 유성을 흘깃 보고서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표정은 마치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해 보였다. 그래. 저런 커다란 게 떨어지는데 이렇게 침착한 걸 보면, 분명히 이 녀석 스스로가 무언가를 했기 때문에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는 거겠지? 그런 거지? 반신반의하는 그 와중에도, 일말의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저런 표정이라도 보여줘서 다행인거...


 갑자기, 점점 커지며 이 쪽으로 다가오고 있던 그 유성이 공중에서 폭발했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불과 20미터 남짓한 거리 에서 폭발한 그 불덩이는, 그 티끌조각을 마치 불꽃놀이처럼 현란하게 사방에 흩뿌렸다. 그리고 그 조각들 대다수가, 자취방 옥상 위로 떨어져 내렸다.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던 나와, 리돌의 위에도. 


 “으아아!”


 방금 전까지 고민에 휩싸여 있어서 그랬다... 라고 일단 변명을 해 놓아야 겠다. 부끄럽게도, 방금 나에겐 눈 앞에 있는 소녀를 지킬 생각보다는 내 안위가 더 중했다. 나는 리돌을 감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내 머리 만을 양 팔로 감싼 채 그 자리에 엎어져 버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파편들이 많이 떨어졌는데도, 주변의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계속해서 강 건너의 마천루가 무너지며 지표면을 울리는, 마치 먼 곳에서 나는 산사태와 같은 굉음 뿐.

 나는 빼꼼히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 보았다. 그 곳에는 떨어져 내리던 불꽃의 빗줄기는 물론이고, 폭발과 함께 생겼던 머리 위를 뒤덮고 있던 매캐한 연기자욱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내 눈 앞에는, 한 손을 위로 쳐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리돌이 보였다. 온 세상이 검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그저 하얄 뿐인 소녀는 마치 세상을 혼자의 몸으로 막고 있는 듯해 보였다. 

 

 “당신은 괜찮습니까, 민재?”


 리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치켜 올렸던 손을 그대로 나에게 내밀었다. 얼떨떨하게 그 손을 받아서 몸을 일으켜 몸을 추스리고 나니, 어느 새 옆에는 성희 씨가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리돌과 동일한 - 염려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성희 씨를 쳐다보자, 얼굴에 가득찬 염려는 무언가 불쌍하다는 표정 - 연민으로 바뀌었다.


 “사과할게요. 민재 씨.”


 이야기를 듣자 마자, 내가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부터 나는 대체 무엇에 대한 사과를 받고 있는 것인가. 이 사람들은 나한테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아니,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진실이란 말인가. 리돌 혼자만 그렇게 이야기했다면 상관 없다. 지금 에서야 완전히 믿게 된 사실이지만, 이 녀석은 달나라 사람이니까. 하지만, 성희 씨는 저번부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나는 가슴 속에서 끌어 오르는 모든 분노, 궁금증을 한 번에 끌어내어 성희 씨에게 토해 냈다.  


 “...도대체, 도대체 뭘요?! 왜 리돌도 그렇고, 성희 씨까지 저한테 사과를 하는 겁니까?! 두 사람이 지금 서울이 불바다로 만든 거에요?! 도대체 저한테 뭘 어디까지 숨기고 있는 거에요!”


 바락바락 악을 써 대는 나를 보며, 성희 씨는 아무 말 없이 꺼질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기쁨에 나오는 미소가 아닌, 무언가 검게 타버린 자신의 속을 긁어 굳이 보여주는 듯한.

 

 “사과할게요. 민재 씨. 처음 말씀드린 사과는 지금까지 당신을 속여 온 것에 대한 것,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사과는 지금부터 일어날 부분에 대한 사과에요.”

 

 그렇게 말하고서 성희 씨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무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도저히 말을 더 붙이기가 힘든 그 분위기에, 나도 추궁하는 것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래지 않은 시간 뒤, 성희 씨의 뒤로 서 있던 63빌딩이  끝없는 불비에 그 허리가 끊겨 한강으로 천천히 그 모습을 가라앉힐 때 즈음,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치 하늘에 날아가는 새에게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지구 위의, 모든 것이 끝날 거에요.”





                                                                                                                                                                                                                       - 1부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