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평화로운 침묵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져 버렸다. 나는 언제나와 같이, 아무런 감흥 없이 마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리돌이 문을 여는 내 뒤를 따라 들어온,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마트로 들어서는 그 작은 발걸음은 달나라 사람에게는 위대한 도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처음 보는 것들이 잔뜩 줄을 지어 일렬로 도열해 있는 매대 위에 놓여 있는 과자 박스, 조미료, 그리고 밑반찬들. 벽면 신선실에서는 마치 김을 뿜듯 냉기를 흘리며 야채와 각종 유제품을 보관하고 있는 개방형 냉장고, 그리고 정육 코너의 고기들. 일반적인 슈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들. 하지만 이 녀석에게는 마치 루브르 박물관에 필적하는 충격이 온 것 같았다. 그녀는 미어캣마냥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뜨고서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마트 안을 둘러 보고 있었다. 내가 장바구니를 챙겨 물건을 집으러 가고 있는 중에도, 리돌은 넋이 나간 양 마트 입구 앞에서 고개만을 돌리고 있을 뿐 움직일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돌아온 듯, 나에게로 달려와 물건을 이것저것 바꿔 집어 보여주며, 단 하나의 문장을, 계속해서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민재, 이것은 무엇입니까?"

 

 깜빡하고 있었는데, 사실 리돌은 자신한테 궁금한 것이 생기면 끝없이 질문을 던지는 스타일이다. 머리가 아파 온다. 집에서 TV를 볼 때 물어보는 것에 대해서는 그래도 대답하기가 짜증나지는 않았었다. 질문하는 대상이 계속 바뀌니까 지겹지 않고, 나도 이 녀석이 지구에 대한 상식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선생된 입장으로 어느 정도 정성껏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장 볼것을 고민해야 되는데다가, 질문의 양이 비교도 안 되게 많다. 무엇보다, 장보러 온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이 쪽으로 쏠리는 것이 너무나도 신경쓰였다. 세네살 먹은 애들이나 할 법한 일을 훤칠한 키의 처자가 하고 앉아 있으니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리가. 내가 지금 미역국을 끓이기 위해서 건어물 코너에서 미역을 고르고, 정육 코너에서 쇠고기를 고르는 그 와중에도, 적어도 한 100번은 이게 무어냐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리돌, 좀만 조용히 해주라. 지금 너때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우리만 보고 있어. 나중에 집에 가면 설명해 줄테니까 지금은 그냥 조용히 따라만 와 줄래?"

 

 내가 이 말을 하는 와중에도, 리돌은 엄청나게 놀란 얼굴로 한 손에는 깐대파를 들고 나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살 물건이었기에, 나는 그녀에게서 파를 집어다 장바구니에 놓고서는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제서야 리돌은 '이것은 무엇입니까'를 그만 하게 되었다.

 

 브즈으으으으....

 

 주머니에서 전화기의 진동이 온다. 나는 리돌에게 다시 한 번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내고서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민재야, 엄마다."

 

 "아, 예 어머니. 식사 하셨어요?"
 
 "나야 여기 일하는 데서 밥 먹었지. 너는 뭐 먹었어?"

 

 "아까 집에서 남은 것 갖고 먹었어요." 

 

 "그래. 밥 좀 챙겨먹고. 다른게 아니라 너 다음주 할아버지 제사야. 이번에는 꼭 내려와라. 너 지금 일자리 구하느라 바쁜건 아는데, 집에 이럴 때라도 내려와야지."

 

 나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방금 리돌을 상대한 것 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가 한 번에 몰려왔다.

 어머니, 이번에는 가지 않으면 안 될까요. 지금 뭐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요. 다른 친척들하고 이야기 할 것도 없어요. 매일같이 물어보는 결혼 이야기도 이제 지겹단 말입니다.

 이런 모든 말들은 머리속으로만 맴돌았다. 어차피 집에 이런 얘기 백날 해봐야 싸우기만 한다. 작년, 구직을 핑계로 내려가지 않았을 때 이미 아버지하고 한 대거리 하기도 했고. 굳이 대답을 하지 않는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어머니는 핸드폰 너머로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너 지금 바쁜 거 다 아는데, 집안일인데 어쩌겠니. 작년에도 안 왔었잖아. 올해는 꼭 와. 응?"

 

 나는 약간의 침묵을 더 더한 다음, 마지못해 대답을 하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이번에는 갈게요."

 

 "그래, 그래. 그건 그렇고, 너 아직도 딱히 사귀는 애 없는 거야?"

 

 "없어요. 없어. 그런 일 있으면 어머니한테 먼저 얘기했겠지."

 

 "주변에 여자가 없는 거야 아니면, 뭐가 잘못된거야? 왜 우리 아들 여자친구가 없지?"

 

 애인이라... 지금 나가는 스터디 쪽에 마음이 가는 아이가 있기는 한데, 사귀는 사이는 커녕 요샛말로 '썸'타는 사이도 아니다. 그냥 내가 일방적으로 마음이 있을 뿐. 나는 문득 지금 내 눈 앞에서 어육소시지를 헬스 기계마냥 구부렸다 폈다를 계속하는 정신빠진 아이를 잠깐 쳐다 보았다. 리돌은 여전히 입을 쩍 벌리고서는 나에게 들고 있는 어육소시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금 '이것' 에 대해서 이야기 할 필요는 딱히 없겠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서는 다시 대답하였다.

 

 "만날 때가 아닌가 보지 뭐."

 

 "얘는, 사람 만나는 데 때가 어디 있어. 그냥 너가 잡으면 되는 거야. 만나면 다 때가 되는 거야."

 

 어머니, 세상 일이 말처럼 쉽게 흘러가면 우리나라도 통일이 이미 되고도 남았겠습니다. 나는 리돌을 툭툭 쳐서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신호를 보낸 다음, 계산대로 향했다.

 

 "알아서 만나요. 알아서. 나중에 생기면 말씀 드릴게."

 

 "알아서 만나긴. 그래, 알았다. 지금은 뭐하고 있어?"

 

 "장 보고 있어요. 먹을 거 사." 라고 말하며 마트 직원에게 카드를 건네었다. 마트 직원은 전문가적인 손놀림으로 내 장바구니에 있던 물건들의 바코드를 찍으며 봉투로 그 위치를 이동하였다.

 

 "뭐 해먹을 거야?" "10만 5천원입니다." "미역국 할라고. 국거리하고 뭐 이것 저것 샀어요."

 

 ...잠깐만.

 

 "어머니, 잠시만요."

 

 나는 잠시 통화를 중단하고서는 직원에게 가격을 되물었다. "얼마라구요?"

 

 "10만 5천원입니다."

 

 "네?!"

 

 뭘 샀다고 십만원 가까이 나와? 나는 검은 봉투에 담긴 물건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분명히 나는 미역국거리를 사기 위한 재료들하고 간단하게 집어먹을 밑반찬 몇 개와 야채만을 골랐을 뿐이었는데, 지금 봉지 안에는 내가 전혀 고르지 않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물건들이 잔뜩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젤리곰, 아까 보았던 어육소시지, 그리고 이건 뭐야, 고추장 10키로짜리는 왜 들어 있는거야? 그리고 기타 등등.

 

 너냐!? 나는 뒤에 있는 리돌을 무섭게 째려 보았다. 자기를 범죄자 보듯 쳐다보자 리돌은 마치 굉장히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민재가 선택한 것입니다. 넣은 건 당신입니다. 민재. 당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아니, 내가 언제 이런 걸 장바구니에 담았다고..."

 

 얘가 지금 거짓말까지 하네? 어이가 없어지려고 하는 찰나, 지금 내 지갑을 넘어가는 지출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나는 지금 누구하고 통화하고 있었는지를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

 

 "민재야! 너 지금 여자아이랑 같이 있는 것 맞지? 응? 그런데 무슨 얘기야? 지금? 책임져야 한다고? 지금 바로 엄마한테 얘기 못할 일인거야? 응?"

 

 우리 어머니는 나이에 비해서 귀가 너무 좋으신 편이다. 핸드폰 너머로 갑자기 다급해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뒤에서는 기다리는 손님들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계속해서 찌르고, 리돌은 아직도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야, 씨, 이걸 날 보고 어쩌라고?!


 "아,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아이 바꿔봐 빨리."

 

 "계산해드려요?"

 

 "민재, 괜찮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