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일어나는 일. 일상적인 일. 항상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한 일.

 

이제는 너무나 당연했던 일이 너무나 특이했던 일로 기억되는 때다.

 

침대로 부서진 건물의 틈으로 한낮의 눈부시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쬔다. "특이했던" 예전이라면 지각이었을테지만 지금은 확실히 아니다. 지금이 주말인지 평일인지도 구분이 정확히는 가지 않는다. 동료들은 어느샌가 감시탑 교대를 하고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조금 더 눈을 붙일까 하다가 충분히 잤다고 생각해서 일어나 앉았다.

 

"이봐, 최근 배달일이 새로 들어왔는데 같이 갈래?"

 

"뭐, 그러지. 어짜피 산책도 나가고 싶으니깐."

 

평범한 일상이 특이한 일상이 된 이후, 우리는 배달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뀌어버린 세상에서 역사 선생이란 직업은 도통 써먹을 구석이 없다. 그냥 물건을 들고 가는것은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닐것이다. 그렇기에 돈을 주고 우리 같은 배달자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배달자라는 직업도 그리 좋지만은 않다. 언제 습격받아 죽을지 모르니깐.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지만 이제 그냥 사는게 희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번 배달일은 그렇게 신나거나, 무슨 사연이 있거나, 비싼 물건을 배달하는 그런 일이 아니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적힌 상자를 좀 되는 거리까지 배달해달라는 그냥 시시한 일이다. 한 두세시간 정도 걸리는 그런 거리였기 때문에, 가면서 길거리 구경을 하는것도 그리 재미없는 일은 아니다.

 

"이 상자 말이야."

 

"무슨 문제 있어?"

 

"절대 열지 말라는거 정말 열고 싶지 않아?"

 

"그렇지."

 

"근데 열어보면 안되잖아."

 

"그렇지."

 

"그럼 티 안나게 열어보고 닫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어?"

 

"그럼 열어볼게."

 

"안돼!"

 

사람은 하기 싫다고 하면 더 하고싶어지는 법이다. 뭐 어쩔 수 있나. 조심스레 테이프를 뜯고 나서 안을 보니 검은 보자기에 만년필이 2개 쌓여 있었다. 마침 만년필의 잉크가 다 떨어져 있었기에, 그냥 몰래 하나 빼서 바꿔넣었다. 이 만년필, 왜인지 모를 뭔가 고풍스럽고 깔끔한 디자인이다. 그냥 이제 아무것도 열어보지 않았다고 하자. 아니 그래야만 하니 그렇다고 치자. 한 몇시간 쯤 걸었다, 이제 물건을 주고 배송료를 받으면 된다. 일단 배송료를 받고 도망가자고 미리 이야기했다.

 

들키지 않게 빨리 도망쳐 뛰듯 집으로 왔을때는 이미 해질녘이었다. 해가 넘어가며 우리는 싸온 식량 조금을 제외하고서는 지금까지 먹은것도 없었기에, 늘 먹던 그냥 보존식품이었지만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화창하던 아침과는 다르게 조금씩 구름이 끼더니 밤이되서는 잔뜩 구름이 끼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가져간 만년필이 마음에 꽤 걸렸지만 그냥 잊고 원래 내 만년필인것처럼 쓰기로 했다.

 

 

나는 항상 일기를 쓴다. 어제와 오늘을 구분 지어주는 느낌이기도 하고, 날짜 개념이 사라져버린 이런 세상에서는 날짜를 세는것이 중요하기도 하기에, 나는 최대한 매일 일기를 쓰려고 한다. 내 만년필 (정확히는 지금은 내 만년필이 아니긴 하지만) 로 한자 한자 써가는 그 느낌도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어찌되었든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안뜬다는 것은 내가 이미 죽었을테니 계속 뜨는건 확실할것이다. 약간은 찌부듯한 기분으로 일어난 그날은 짐을 챙기기로 했다.  장거리 배달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에, 한 며칠치 짐을 싸둘 필요가 있다. 며칠간 먹을 식량이나 물을 다 가져가기에는 집에 남아있을게 없으니, 그냥 돈도 챙겨가면 된다. 하지만 정말 불행하게도, 지금은 정부가 날아가버린 이후기에, 돈따위는 그냥 불쏘시개, 아니 불쏘시개로도 질이 안좋은 그냥 종이뭉치이다. 정말 가치가 있는 돈은 동전이다. 동전은 한낱 종이뭉치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이다. 동전에 대한 한가지 불만점은 딱 하나 있는데, 정말이지 무겁다. 하지만 동전은 금속 무게당으로 가격을 매기니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짐을 챙기고서 나는 이번엔 홀로 여행을 떠났다. 장거리 배달은 나의 역할이었고, 지금껏 수십번 배달을 갔다와도 나는 큰 상처 없이 (자잘한 상처는 조금씩 있긴 했다만) 귀환할 수 있었다. 물론 만년필과 일기장은 챙겼다. 장거리 배달이야말로 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좋은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배달할 물건은 그냥 어떤 액체인데,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 문명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들고 나를 시켜 팔아먹는것이리라 난 짐작한다. 왜인지 나는 이런 액체 물품은 열어보고 싶지 않다. 녹색 축축한 그런 액체는 더더욱. 나는 상자를 꼼꼼히 점검하고 내 가방에 넣었다. 동료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이제 짧을테지만 항상 재미있었던, 앞으로도 재미있을것이라 생각하는 그런 여정을 떠난다.

 

 

내가 텐트를 치고 불을 지피면 가끔씩 스캐빈저나 밴딧들을 만나곤 한다. 스캐빈저는 위협하면 자기도 살기위해 하는 짓이니 도망가고 말지만 밴딧일 경우에는 나는 상당히 곤란하다. 특히 집단 밴딧이면 그러한데, 내가 지금 그런 상황이다. 지금 굉장히 곤란한 상황이고,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특히나 사람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가진 밴딧은 내가 정말로 싫어한다. 가장 현명한 방법은 물건을 내주고 가만히 있는건데, 저 밴딧은 물건 말고도 내 목숨도 가져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는 정말이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여기서 끝나는걸까? 하루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 밴딧이 내 목에 칼을 가져다 댄 것까지만 난 기억난다. 그 이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침대로 부서진 건물의 틈으로 한낮의 눈부시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쬔다. 어디선가 본 듯한 광경이다. "특이했던" 예전이라면 지각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내 주머니에는 만년필이 들어있다. 음... 아직은 잘 모르겠다.

 

 

 

-- 2편계속